소설리스트

88화 (88/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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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오리 속에서는 어떠한 생명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카델의 불꽃은 모든 것을 불태웠고,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하아…하아…….”

거친 숨을 고르며, 카델이 천천히 양팔을 내렸다. 마력을 거두기가 무섭게 회오리와 화룡이 공기 중으로 흩어지며 소멸했다.

강렬한 열기의 잔상 속,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회백색의 잿가루만이 바람을 타고 날릴 뿐.

“카델 경! 대단하십니다. 그 마족을 이토록 압도적으로 격퇴하다니…….”

모들렌이 들뜬 얼굴로 다가와 카델을 추켜세웠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칭찬이었으나, 정작 당사자인 카델은 전혀 기뻐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카델의 시선은 에르고가 서 있던 자리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분명, 죽었는데…….’

턱까지 흘러내린 코피를 훔쳐 내는 손이 떨렸다. 조심스럽게 굴러간 눈동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허공의 한 곳을 들여다보았다.

「남은 시간 07 : 53 : 21」

“왜…….”

“카델 경? 뭔가 문제라도…….”

어째서 카운트다운이 끝나지 않는 것인가. 퀘스트를 완료했다는 시스템 창 역시 떠오르지 않았다.

분명히 에르고는 죽었는데. 살점 하나, 내장 하나 남기지 않고 깡그리 불태웠는데.

혼란에 빠진 카델이 굳어 있을 동안, 성검술의 해제를 명한 가르엘은 조금 전까지 회오리가 자리했던 지점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멀리서 보았을 때와 다를 바 없이, 마족의 흔적이라곤 허공에 휘날리는 잿가루가 전부. 눈을 의심할 것도 없는 완벽한 발화였다.

“……응?”

그러나 잔해의 중심부로 나아가던 가르엘의 발치에 무언가가 걸렸다. 주먹만 한 보라색 결정체. 가르엘이 허리를 숙여 그것을 주워 들었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그가 결정을 들고 카델에게로 다가갔다.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기도 전에 초를 쳐서 죄송합니다만, 불길한 걸 주워 버렸거든요. 혹시 짐작 가는 바가 있을까요?”

카델이 순순히 물건을 받아 들자 가르엘의 눈매가 곱게 휘어졌다. 카델은 그런 가르엘을 향해 탐탁지 않은 시선을 보낸 후, 손안의 물건을 내려다보았다.

“마족이 불탄 자리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 대단한 화염 마법에도 녹지 않은 걸 보면, 범상치 않은 건 확실한데 말이죠.”

가르엘은 ‘대단한 화염 마법’을 강조하며 주섬주섬 술병을 꺼내 들었다. 그를 발견한 모들렌이 즉시 술병을 빼앗으려 했으나, 가르엘의 악력을 이기는 건 무리였다.

“단장님! 술을 마시려거든 아무도 없는 곳에서 마시라고 몇 번이나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포기해, 모들렌. 이미 다 들켰다고. 이왕 들킨 김에 편하게 마시면 좋지. 그렇죠, 카델 경?”

“아……! 카, 카델 경! 단장님이 원래 이런 분은 아니시거든요. 그냥 요새 힘든 일이 많아서……. 그, 그래! 이건 술이 아니라 특수한 힘이 깃든 영약이에요!”

모들렌의 애처로운 변명을 한 귀로 흘리며, 카델은 손안에 들린 결정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분명해. 루멘이 에르고의 분신에서 발견한 파편은 여기서 떨어져 나온 거다.’

그렇다면 이것 또한 마력석의 일종일까? 에르고는 몸 안에 마력석을 품고 있었던 건가?

하지만 아무리 마력석이라도 과한 충격과 열기에 지속해서 노출된다면 망가지는 것이 당연했다. 카델은 매끄러운 결정의 겉면을 문질렀다.

‘흠집 하나 남지 않았어.’

설명할 수 없는 찜찜함이 느껴졌다. 가르엘의 말대로 범상치 않은 물건임은 확실한데.

품을 뒤져 루멘에게 받은 파편을 찾아낸 카델이 둘을 나란히 두고 비교해 보았다. 예상대로, 색과 촉감은 물론 깎여 나간 형태 또한 비슷했다. 다른 것은 크기뿐이었다.

양손에 결정과 파편을 든 채 한참을 생각하던 카델. 일순 그의 신중한 눈빛에 이채가 스쳤다.

‘……그러고 보니, 게임 속에서 에르고 토벌에 성공했을 때 조금 독특한 연출이 있었던 것 같은데.’

클리어에 꽤 애를 먹었던 보스였다. 그만큼 승리의 쾌감은 상당했고, 평소라면 곧바로 스킵을 눌러 보상부터 확인했을 그가 아주 잠시나마 이어지는 영상을 감상했었다.

물론 감상은 찰나였고, 얼마 가지 않아 스킵 버튼을 눌렀기에 상세한 내용은 알 수 없었으나.

‘보석 같은 게 산산조각 나는 연출. 분명 그런 연출을 본 기억이 있어.’

최후의 포효를 내지른 에르고와, 공중에 떠오른 보석. 깨진 보석의 틈에서 검은 연기가 새어 나오더니 곧 조각난 파편들은 가루가 되어 허공에 흩날렸다.

보석의 색까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지만, 대충 이런 어두운 색감이었던 것 같다.

‘이게 그 보석인가? 그럼 뭐야. 똑같이 에르고를 죽였는데 왜 게임 속에선 보석이 부서지고 여기선 그대로지?’

짜증스럽게 머리칼을 쓸어 올린 카델이 입 안을 짓씹었다.

‘분신도 본체도 품고 있던 결정이야. ……생각하자. 에르고의 스킬을 떠올려 보는 거야.’

이 돌이 에르고의 죽음과 연관이 있다는 건 확실했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연관이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미간을 구긴 채 열심히 머리를 굴리던 카델의 눈가가 일순 짧게 경련했다.

[심핵 보호]

에르고의 체력을 1%까지 깎았을 때 발동되는 재생 스킬.

‘제한 시간 안에 보호막을 부수지 못하면 에르고의 피통이 70% 회복되는 스킬이었지. ……설마.’

결정을 내려다보는 카델의 눈빛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이게 심핵이라고……?”

절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등 뒤를 타고 차가운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뭔가 알아냈나요? 표정이 안 좋은 걸 보니 짐작대로 심상찮은 물건인가 본데.”

느긋하게 다가온 가르엘이 술병의 바닥으로 결정을 툭 건드렸다. 카델의 굳은 시선이 그의 태평한 얼굴을 향했다.

“놈의 심장입니다.”

“네?”

“이걸 시간 안에 부수지 못하면, 마족은 부활할 거예요.”

조용한 단언에 가르엘은 물론 모들렌까지 입을 벌렸다. 심핵을 쥔 카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최대 출력으로 뽑아낸 화염 마법 속에서도 흠집 하나 남지 않은 심핵이다. 이걸…… 대체 무슨 수로 부수지?’

부지런히 나아갈수록 출구는 멀어지기만 했다. 초 단위로 줄어드는 시간의 압박. 승리의 확신에 차 있던 카델의 눈빛이 흐려졌다.

분신을 해치웠다, 는 성취감을 얻기도 전.

분신의 몸체가 마치 열에 노출된 얼음 조각처럼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반은 거친 숨결을 토해 내며 한쪽 눈을 찌푸렸다. 카델의 충고를 따라 대부분의 공격을 검기로 해결했음에도 몸 곳곳에 점액을 맞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단장이 본체를 처리한 건가…….”

빠르게 분신을 처리하고 합류하지 못했다는 것은 분했으나, 카델이 편하게 전투에 임할 수 있도록 발목을 붙들었다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다면 확실하게 죽일 수 있었을 텐데. 아쉽군.”

짧게 혀를 찬 반이 전신을 휘감은 붉은 오라를 갈무리했다. 사그라지는 오라를 따라 불길하게 번뜩이던 붉은 눈동자도 본래의 색을 되찾았다.

묵묵히 대검을 등 뒤에 고정한 반. 곧장 카델에게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던 그의 시야 속으로, 증발한 점액이 만들어 낸 연기 속에 덩그러니 남은 보라색 파편 하나가 들어찼다.

“……저건 뭐지?”

허리를 숙인 그가 파편을 집어 들었다. 손톱만 한 파편을 들여다보는 그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묘하게 기분 나쁜 기운이 느껴지는데.’

정확한 정체는 알 수 없었으나, 그의 동물적인 직감이 어렴풋이 파편의 본질을 파악했다. 그대로 파편을 부숴 버릴까, 고민하던 반이 이내 주머니 안으로 그것을 쑤셔 넣었다.

“일단 단장에게 보여 드려야지.”

의외로 좋은 물건이라 단장이 필요로 할 수도 있지 않은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반이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카델에게로 돌아간 그는, 얼마 안 가 자신의 판단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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