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화 (83/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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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델이 루멘을 만난 것은 우연에 가까웠다. 그는 라이돈의 안전을 우선시했고, 루멘을 찾아가는 것은 그 이후라고 생각했으니까.

따라서 생존자들이 자리한 임시 주둔지로 향하던 길. 빠른 걸음을 따라 짧아지는 붉은 실은, 결코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루멘?”

요동치는 붉은 실이 길가에 선 한 남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루멘 도미닉.

그는 손안에 든 무언가를 빤히 내려다보다,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여느 때처럼 꼿꼿한 자세 탓에 얼핏 멀쩡한 상태처럼 보이기도 했으나. 실의 떨림은 그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알렸다.

“……대장. 마침 적당한 때 와 주는군.”

가까이서 본 그의 모습은 가히 처참하다고 할 수 있었다. 항상 구김 없이 반듯하던 옷은 여기저기 해져 구멍이 뚫렸고, 드러난 살갗은 부분부분 가죽이 벗겨져 시뻘건 속살을 내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상당히 괴로울 텐데도 루멘의 표정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충격받은 얼굴을 한 것은 카델뿐이었다.

“너 꼴이…….”

“대장을 찾으러 가는 길에 싸움이 좀 있었어.”

루멘은 카델의 부축을 받으며 반갑게 손을 흔드는 라이돈을 일별하고는, 자신의 뒤편을 턱짓했다.

그를 따라 시선을 옮기자 보이는 것은, 납작하게 퍼진 점액의 웅덩이였다. 빠르게 증발하는 점액을 따라 웅덩이의 면적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었다.

‘루멘도 분신을 만났나 보군. 미친놈. 대체 분신을 얼마나 뿌려 둔 거야?’

상태가 좋지 못한 와중에도 여기저기 분신을 뿌려 적을 견제하고 있다니. 녀석이 이룬 마법의 경지를 알아내기가 두려울 정도였다.

“모들렌 경이 상대하던 마족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진짜는 아닌 것 같아. 예상보다 쉽게 죽었거든.”

시행착오는 좀 있었지만. 뒷말을 얼버무린 루멘이 카델의 앞으로 무언가를 내밀었다. 계속 손에 쥐고 있던 물건이었다.

“이건……?”

“죽인 마족의 몸에서 나왔어. 해 볼 수 있는 건 다 해 봤지만…… 부서지지 않더군.”

보랏빛의 작은 결정체. 지저분한 표면을 보니, 무언가에서 떨어져 나온 파편인 듯싶었다.

“뭐지? 마력석인가?”

“그 비슷한 무언가겠지. 마법으로 없앨 수 있으면 없애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출처가 출처니까.”

분신의 원동력이 되는 마력이 담긴 돌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서라도 당장 부수는 편이 나을 테지만…… 루멘의 힘으로도 파괴할 수 없는 돌이다. 마력 조금 붓는다고 부술 수 있을 것 같진 않으니, 지금은 급한 일부터 처리해야 했다.

“날 찾으러 가던 길이라고 했지. 모들렌 경은? 그쪽에서 상대하던 마족이 본체인 거야?”

“아마도. 느껴지는 힘의 차원이 달랐어. 내가 빠져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상황이 좋지 않았으니, 빨리 이동하는 편이—”

그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 카델은 루멘의 품 안으로 라이돈을 밀어 넣었다. 반사적으로 라이돈의 어깨를 쥔 루멘이 팍 인상을 썼다.

“뭐 하는 거야?”

“넌 라이돈이랑 임시 주둔지로 이동해. 주민들을 보호하는 성기사를 따로 배치해 뒀을 테니까, 가서 그 상처부터 치료하라고.”

아무렇지 않은 척 대화를 나누며 서 있긴 했으나, 루멘은 이미 상당한 체력을 소모했다. 에르고의 정확한 능력도 모르는 상태에서 꾸역꾸역 놈을 해치웠다. 아무리 루멘이라 한들 무리가 가지 않을 리 없었다.

“……라이돈만 옮겨 두고 곧장 합류하도록 하지.”

“아니. 시간이 걸리더라도 완벽하게 치료받고 와.”

“별로 아프지도 않아. 전투에 불편함은 없다.”

그런데도 루멘은 이상한 고집을 부렸다. 카델은 치료가 필요 없다며 우겨 대는 루멘을 빤히 응시하다, 가만히 오른손을 흔들어 보였다. 반지가 끼워진 손이었다.

“네가 보고 있는 붉은 실은 잠잠할지 몰라도, 나는 아니거든. 아까부터 계속 정신 사납게 흔들거리고 있어.”

반지의 붉은 실은 착용자에게 ‘상대방의 상태’를 보여 준다. 본인의 상태는 알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그 사실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지 루멘이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끼고 있던 반지를 빼 카델의 손에 강제로 쥐여 주었다.

“내 상태는 내가 제일 잘 알아. 충분히 싸울 수 있다고.”

“누가 싸울 수 없대? 제대로 잘 싸울 수 있도록 상처 치료하고 돌아오라는 거잖아.”

“그사이에 마족이 날뛰기라도 한다면…….”

카델은 짧게 숨을 골랐다. 둘의 언쟁이 시끄럽다는 듯 짜증스럽게 눈을 굴리는 라이돈을 일별하고, 다시 루멘을 바라보았다.

문득,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가 그렇게 의지할 만한 사람이 못 되는 건가.’

대체 누가 누구더러. 아직도 이쪽을 의지하지 못하고 있는 건 본인이면서.

별수 있겠는가. 멋대로 튀어 나갔다가 픽 쓰러진 채로 발견된 단장이다. 한껏 간당간당해진 위엄을 치켜세우기 위해서는, 한층 업그레이드된 자신의 경지를 루멘의 뇌리 깊숙이 박아 주는 수밖엔 없을 듯했다.

카델은 루멘을 더 설득하는 대신, 손가락을 뻗어 그의 얼굴을 가리켰다. 그리고 주춤하는 루멘을 향해 말했다.

“데폴로 신전에서 내가 원했던 건 이성적이고 강한 루멘 도미닉이야. 지금처럼 본인 상태 하나 파악 못 하고 멍청하게 구는 남자가 아니라.”

“머, 멍청?”

“그날의 네가 원했던 사람도, 언제 쓰러질지 몰라 전전긍긍하게 되는 대장은 아닐 텐데?”

루멘을 가리키던 손가락이 불시에 뺨에 난 상처를 꾹 눌렀다. 아릿한 고통에 일그러진 표정을 눈 안에 담으며, 카델은 단호하게 일갈했다.

“가, 루멘. 네가 걱정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아.”

치료 잘 받고 멀쩡히 돌아오면, 너보다도 멀쩡한 모습으로 당당하게 맞이해 주지.

부하들 앞에서 더 이상의 추태는 사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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