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루멘을 찾아 이동하던 카델 일행의 앞에도 예상치 못한 적이 모습을 드러났다.
“용케도 살아 있구나. 운 좋게 살아남은 주제에 남의 먹잇감을 도둑질해……. 역시 인간이란 족속은 역겹기 짝이 없어.”
“에르고…….”
“끌끌, 이 몸이 이름을 알려 준 적이 있던가?”
갑작스레 등장한 점액 웅덩이. 에르고는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한결같이 불쾌한 낯짝을 자랑하며 반에게 업힌 라이돈을 바라보았다.
“그새를 못 참고 동료를 불러냈구나, 요정이여.”
“넌 그새를 못 참고 손가락을 재생시켰네? 다시 뜯어 줄까?”
“끌끌…….”
에르고는 라이돈의 도발을 인자하게 웃어넘기며 시선을 돌린…… 줄 알았으나.
퍼버벅!
가차 없이 날아든 점액 덩어리가 라이돈을 노렸다. 재빨리 공격을 피한 반이 자신의 등 위에서 시끄럽게 웃어 대는 라이돈을 짧게 노려보았다.
“쓸데없는 도발 하지 마. 움직이지도 못하는 게.”
“나한테 명령할 수 있는 건 카델뿐이야!”
“그럼 명령할게. 조용히 하고 있어, 라이돈.”
카델이 말하자 라이돈이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무어라 투덜거렸다. 하지만 카델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붉은 실은 아직도 떨리고 있어. 루멘은 황혼 기사단과 함께 있지 않은 건가? 아니면 황혼 기사단과 루멘 전부 이 녀석에게 당한 건가?’
그들을 모두 처리하고 라이돈을 확인하기 위해 되돌아온 것일까.
‘……에르고는 강해. 하지만 실력 있는 기사들을 단번에 해치우고 유린할 정도는 아니다. 완전한 상태도 아닌 지금이라면 더더욱.’
그렇다면 낼 수 있는 결론은 한 가지.
“에르고의 분신이야.”
작게 속삭인 카델이 반을 흘겼다.
“내가 시간을 벌 테니 라이돈을 임시 주둔지로 데려다줘.”
분신 하나라면 상대해 볼 만하다. 에르고의 특성상 근접전은 불리하니, 같은 마법사인 이쪽이 상대하는 편이 나았다.
그리 판단한 카델이었으나.
“아뇨. 제가 상대할게요.”
반은 그의 명령을 따르는 대신 결연한 눈빛을 빛냈다. 한쪽 팔로 라이돈을 업고 있던 그가 남은 손에 들린 대검을 땅 위로 찍어 누르며 카델을 돌아보았다.
“여긴 제가 맡겠습니다.”
“상대는 마법사야. 게다가 살짝 스치기만 해도 살이 타들어 가는 산성 점액질을—”
“할 수 있어요.”
단호하게 말을 끊어 낸 반이 라이돈을 패대기치듯 바닥에 내렸다. 반사적으로 라이돈을 부축한 카델이 미간을 좁혔다.
“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직접 싸워 본 내가 더 잘 알아. 넌 저놈이랑 상성이 안 맞는다고.”
“좋은 상성만 골라서 싸울 순 없죠. 게다가 단장의 말대로 저 마족이 분신이라면, 다른 무리는 본체를 상대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잖아요? 단장보다 저 마족을 잘 아는 사람은 없어요. 도움이 필요할 겁니다.”
그 사실은 반박할 수 없었다. 카델 또한 최대한 빠르게 분신을 처치한 뒤 본체 토벌에 가담할 생각이었으니까.
카델의 망설임을 알아챈 듯, 반이 평소 같은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단장의 파트너잖아요. 믿어 주세요.”
그러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비록 한심한 실수로 부하들에게 실망감을 안겨 주긴 했으나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의 기사를 믿지 않은 적이 없었다.
“……무리하지 마라. 어느 정도 시간을 벌었다 싶으면 더 상대하지 말고 도망가.”
결국 반의 의지를 받아들인 카델이 자신의 어깨 위로 라이돈의 팔을 둘렀다.
“라이돈. 뛸 수 있겠어?”
“흐응, 업어 주지 않는 거야?”
“과한 걸 바라지 마.”
오래 걷기만 해도 후들거리는 몸이다. 괜히 업었다가 고꾸라져 얼굴이 갈리는 것보단 조금 느리더라도 부축하는 편이 나았다.
“이 몸을 피해 달아날 생각일랑 접어 두지 그러나. 나였다면…… 차라리 순순히 요정을 넘기고 항복을 선언했겠네만.”
“그딴 나약한 생각을 하니 네놈이 마족인 거다. 그만 떠들어 대고 덤벼.”
반은 카델과 라이돈의 앞을 가리며 대검을 치켜들었다. 단숨에 끌어 올린 붉은 오라를 따라 그의 눈동자 위로 붉은 물결이 회오리쳤다.
카델은 반의 보호 아래 조금씩 이동하며, 일행의 몸에 바람의 장막을 둘렀다.
“오래 유지해 주진 못할 거야. 근접전은 최대한 피해야 한다.”
“명심할게요.”
라이돈을 부축한 카델이 그대로 뜀박질을 시작했다. 동시에 날아드는 점액 덩어리. 그러나 에르고의 공격은 카델의 장막에 닿기도 전, 매섭게 쇄도하는 붉은 검기를 따라 양단되었다.
맥없이 추락한 점액이 땅 위에 스며들고. 에르고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네놈 하나 붙들어 두지 못한다고는 상상조차 하기 싫군. 내 실력을 증명해 줘야겠다, 역겨운 마족 놈.”
대검을 고쳐 든 반의 눈빛이 형형했다. 그는 에르고의 분신을 적당히 상대하다 도망갈 생각 따윈 전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