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장,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깨어난 지 얼마 안 됐잖아요. 찾는 건 제가 할 테니까…….”
“지금 쉬어 봤자 편하게 있을 수도 없을 거야.”
“이대로 밤을 새울 작정이세요?”
“하룻밤 안 잔다고 죽진 않잖아.”
어두운 시야는 불덩이를 띄워 밝혔다. 카델은 에르고가 남긴 흔적을 찾기 위해 적막한 숲속을 바삐 나아가는 중이었다.
그런 그의 옆에서, 반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족에게 잡힌 부하를 구해야 한다는 카델의 의무감은 충분히 이해했으나, 그럼에도 역시 그의 몸 상태가 걱정됐다. 쓰러져 있던 모습을 두 눈으로 목격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카델의 고집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았다. 그 때문에 반은 설득하길 멈추고 대신 어떻게든 마족의 흔적을 발견해 카델의 노고를 덜어 보는 편을 택했다.
“날이 너무 어두워. 구름이 많아서 달빛도 약하고. 이 이상의 수색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데, 대장.”
반면 루멘은 생각이 달랐다. 그는 빈약한 불덩이 몇 개만 믿고 한밤중에 잘 알지도 못하는 지역을 탐색하는 데에 회의적이었다. 그가 보기에 카델은 부하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무의미한 짓을 감행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굳이 카델의 고집에 어울려 줄 필요는 없다.
“시간 낭비 말고 돌아가지.”
각자의 결론은 달랐으나, 반과 루멘은 서로 비슷한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지금은 수색보단 재정비가 우선이라고.
그러나 카델은.
“지금 여기서 시간 낭비를 가장 싫어하는 건 나일 거다, 루멘.”
“그럼…….”
“그래도 해야 해. 선택지가 없다고.”
이것이 소득 없이 몸을 혹사하는 일일 뿐임을 알고 있음에도, 멈출 수 없었다.
「남은 시간 13 : 41 : 48」
여기서 후퇴를 결정하고 휴식을 취한다면, 체력은 비축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남은 시간이 대폭 줄어든다. 최대한 짧게 쉬어 봤자 6시간 정도가 남겠지.
그 안에 수색을 재개하고, 흔적 하나 남기지 않은 마족을 찾아야 한다. 발견한다고 해도 시간 안에 토벌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미지수였다. 녀석이 라이돈을 인질로 삼아 시간을 끌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그렇게 허무하게 카운트다운이 종료된다면.
“주민들의 마물화가 진행되고 있어.”
아직 반과 루멘에게는 알리지 않은 정보였다. 둘에게는 각각 부탁할 일이 있었고, 어차피 마족을 없애야 한다는 최종 목적은 같았으니 말하는 타이밍은 언제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카델은 당황한 얼굴을 한 두 부하를 돌아보았다.
“어젯밤 라이돈이 알려 준 정보야. 그 마족이 세력을 불리기 위해 주민들을 중독시켰어. 인간의 치유술로는 해독할 수 없고, 마물화를 마치기 전까지 놈을 죽이는 게 유일한 해결법이래.”
짧은 침묵이 흘렀다. 갑작스러운 정보를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듯, 둘 다 쉽사리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루멘이었다.
“왜 그런 중요한 얘기를 지금 하는 거지? 어젯밤에 바로 알려 줬다면 더 많은 지원군을 요청할 수 있었어. 처음부터 수색 범위를 대폭 넓혔다면 시간도 단축됐을 거고.”
그는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카델이 이제야 얘기를 꺼낸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날카로운 말투였다.
“정보의 출처가 라이돈이야. 인간의 마물화라는 건 밝혀진 적도 없는 현상이고. 설명하려면 필연적으로 요정족을 끄집어내야 할 텐데, 아직 라이돈은 세간에 알려져선 안 돼. 어차피 마족 소탕이 목적이었잖아. 먼저 알렸다가 일이 꼬일 수도 있으니까 차라리…….”
“그래서 대장을 믿고 따르는 사람에게까지 정보를 숨겼다? 대단한 현자시군. 그 독자적인 판단으로 라이돈과 둘이 마족을 상대하다 패배한 건가? 그것도 다 대장의 계산이었어?”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텨 볼 생각이었어. 그 전에 쓰러진 건 분명 계산 밖이었지만, 끝까지 숨길 생각도 없었―”
“중요한 정보였어. 라이돈의 정체 때문에 숨겨야 했다면, 이미 라이돈의 정체를 알고 있는 대장의 단원에게만큼은 알려줘야 할 정보였다고.”
루멘의 눈빛이 점차 거칠어졌다. 생각보다 격한 반응에 카델이 주춤하자, 반이 그의 앞을 막고 섰다. 루멘을 향하는 시선이 험악했다.
“말조심해, 루멘.”
“비켜.”
“더 이상 단장에게 접근하지 마라.”
반이 다가오는 루멘의 어깨를 사납게 밀치자, 루멘이 그 손길을 신경질적으로 뿌리쳤다. 푸른 눈동자에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마구잡이로 뒤섞여 있었다.
“넌 비위도 좋군. 그렇게 지겹도록 옆에 붙어 있어 놓곤 정작 중요한 정보는 공유받지도 못했잖아. 신뢰 없는 관계가 익숙한가 봐?”
“함부로 지껄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앞을 가로막은 널찍한 등을 응시하며, 카델은 가만히 입술을 달싹였다.
‘……실수했다.’
자신을 향한 루멘의 서늘한 눈빛을 마주한 순간, 그는 이 명백한 실수를 뒤늦게 인지했다.
루멘이 화를 내기 전까진 뭐가 잘못됐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들에게 알려 주었어야 할 이 정보가, 퀘스트의 ‘페널티’였기 때문에.
페널티는 언제나 그 혼자 떠안아야 할 최악의 예언이었다. 이 세계의 유일무이한 이방인인 자신만이 알고 있는, 특별한 비밀. 그 비밀에 도취되어 으스대고 있던 것은 당연히 아니다. 다만, 페널티의 부담은 온전히 자신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라이돈처럼 이미 알고 있는 경우라면 몰라도, 다른 부하들은. 그들은 알지 못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페널티를 피해 계획을 세우고, 투쟁하는 것은 자신의 몫이라고. 한 집단을 이끄는 리더가 가져서는 안 될, 가장 위험한 자만심을 품었다.
‘주인공에 빙의됐다고 진짜 주인공 행세를 하고 있었던 건가. 지금껏 지겹도록 도움받아 왔으면서.’
마음속 어딘가에선 아직도 이 세계를 ‘만들어진 스토리’에 불과하다 여기고 있던 걸지 모른다. 그러니 어떻게든 기사를 모아 호감도를 쌓고, 그들의 전력을 이용하면 된다고. 그렇게 결말만 보면 된다고. 자신을 믿고 따르는 부하를 그저 도구로만 여겼던 거다.
자괴감이 들 정도로 끔찍한 결론이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왜 홀로 정보를 독점한 채 실패할 계획을 짜는 데에 급급하기만 했을까?
‘최악이다.’
그의 앞에 자리한 두 남자는 또 다른 현실이 되어 버린 이 세계에서 카델이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존재였다. 그들에게 실망감을 안겼다는 사실이 괴로웠다.
“바보 되는 건 한순간이군. 당장 주민들이 마물로 변할지도 모르는데, 후퇴하고 잠이나 자러 가자는 놈들이 얼마나 한심해 보였겠나?”
“한 대 쳐 맞아야 닥치겠군.”
살벌하게 일갈한 반이 대검 위로 손을 올렸다. 둘 사이에 당장이라도 칼부림이 나도 이상하지 않을 흉흉한 분위기가 흘렀다.
그리고 카델은, 조심스럽게 반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만해, 반. 이건 내가 실수한 게 맞으니까.”
“……단장.”
엷게 미소 짓자 반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물러섰다. 카델은 두 부하의 사이에 서서 작게 숨을 골랐다. 닿아 오는 루멘의 시선이 따가웠다.
“미안하다. 네 말대로 먼저 말해 줬어야 했어. 정신이 없었다느니, 나중에 말하려 했다느니…… 그런 구질구질한 변명은 안 할게. 하지만…….”
카델은 루멘과 반에게 번갈아 시선을 두었다.
“너흴 신뢰하지 않아서 말하지 않은 게 아니야. 이건 그냥…… 내 문제야. 내가 잘못한 거다.”
“단장,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끝까지 감출 것도 아니었고―”
“사과하게 해 줘. 널 믿기 때문에 주민들의 간호를 맡긴다고 했으면서, 그 주민들이 마물로 변할지도 모른다는 얘기는 하지 않은 거잖아. 화내도 돼, 반.”
반은 진지하게 사과하는 카델의 앞에서 안절부절못했다. 카델에게 닿지 못한 손길이 허공을 맴돌았다.
“미안하다, 루멘. 황혼 기사단을 불러오느라 애먹었을 텐데. 네 말대로 미리 알렸다면 더 나은 수를 쓸 수 있었겠지.”
“사과받으려고 한 일은 아니야. 오히려…….”
말끝을 흐린 루멘이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잠시 열을 식히려는 듯 허공을 응시하던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그렇게 의지할 만한 사람이 못 되는 건가.”
“아니라는 거 알잖아.”
“몰라.”
다시 돌아온 시선은 처음과는 달리 뜨겁기만 했다. 무감하기만 하던 표정에 일순 떠오른 격렬한 감정의 소용돌이.
들끓는 용암 같던 감정이 사라지는 것은 찰나였다. 빠르게 눈빛을 가라앉힌 루멘이 말했다.
“시간이 없다는 건 충분히 알았으니, 둘은 수색을 계속해. 난 기사단에게 이 정보를 전하도록 하지. 주민들이 마물이 된다는데 가만히 있진 않을 거야.”
“기사단에게 말하겠다고?”
“걱정 마. 라이돈 얘기는 안 꺼낼 테니까. 대장이 마족과 싸울 때 들은 정보고, 뒤늦게 기억이 돌아왔다고 둘러대면 되겠지.”
루멘은 단호히 등을 돌렸다. 망설임 없이 나아가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응시하던 중,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단정한 그림자에 퍼뜩 두려움을 느낀 카델이 루멘을 쫓아 달려 나갔다.
“루멘!”
다급한 부름에 루멘의 걸음이 멈추고. 카델이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뭐지?”
품 안을 뒤적인 카델이 루멘의 손위로 무언가를 올려 두었다.
반지였다. 그는 물끄러미 반지를 내려다보는 루멘의 손목을 꾹 움켜쥐었다.
“다시 돌아오려면 필요하잖아.”
“…….”
“루멘.”
대답이 없었다. 무겁게 흐르는 침묵 속에서 카델은 갑갑한 불안감을 느꼈다. 무어라고 다시 입술을 떼려던 찰나. 그에게 잡힌 손목을 빼낸 루멘이 중지에 반지를 끼웠다.
감정을 숨긴 차가운 얼굴이 천천히 돌아가고. 우뚝 선 카델의 귓가로, 조용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안 떠나니까 그런 표정 지을 거 없어.”
루멘은 그대로 바스킨 마을을 향해 되돌아갔다. 그가 사라진 자리를 응시하며, 카델은 한숨과 함께 얼굴을 쓸어내렸다.
“……한심한 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