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시간 16 : 22 : 12」
채 하루도 남지 않았다. 만약 신성기사단 쪽에서 이렇다 할 수색의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면, 너무도 촉박한 시간이다. 고대하던 가르엘을 만났다는 흥분을 가라앉히자 계획에 대한 불안감이 피어났다.
가르엘은 뭐가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석에 자리한 테이블로 다가간 그가 그 위에 있던 새 술병을 들고 뚜껑을 열었다.
“글쎄요. 알아서 잘들 하고 있겠죠.”
“보고받은 게 없는 겁니까?”
“급한 일이 있으면 어련히 오지 않겠어요? 그건 그렇고, 아직 서로 이름도 모르네요. 전 가르엘 몬자시라고 합니다.”
“……카델이라고 합니다.”
이쪽에선 이름은 물론 그의 비밀까지 꿰고 있었기에 통성명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머쓱하게 이름을 밝힌 카델이 늘어지는 몸에 애써 힘을 불어 넣었다.
‘가르엘은 처음부터 수색에 참여를 안 한 모양이군. 그렇겠지. 게임 속에서도 주인공이 영입하기 전까진 얼굴 반반한 망나니에 불과했으니까. ……도움을 바라는 건 무리인가. 어차피 지금의 가르엘은 남들 앞에서 힘을 쓰지도 않을 테니까. 빨리 부하들을 보러 가는 편이 낫겠어.’
침대 아래로 다리를 뻗은 카델이 작게 움찔했다. 바닥을 딛는 것만으로도 전신에 찌르르 전류가 흘렀다. 생각보다 후유증이 크게 남은 듯했다.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거라니까요.”
“그런 것 같네요. 하지만 상황이 급해서 말입니다.”
마을 주민이 전부 마물이 되기까지 고작 16시간이 남았으며, 부하 한 명은 마족에게 잡혀갔다. 가르엘에게 얻어 낼 정보가 없다면 더 이상 미적거릴 이유는 없었다.
단호하게 일어난 카델이 잠시 숨을 멈췄다. 지독한 두통과 함께 현기증이 일었다. 비틀거리는 카델을 발견한 가르엘이 빠르게 다가와 어깨를 감쌌다. 안대에 가려지지 않은 오른쪽 눈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생긴 거랑 달리 터프하시네. 한 발 떼기도 힘들 텐데, 정말 지금 가 봐야겠어요?”
“대신 마족을 찾아봐 줄 사람이 있다면 가 보지 않아도 되겠죠. 하지만 당장 제 옆에 있는 사람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이니, 직접 움직여야지 않겠습니까.”
망나니 모드인 가르엘에겐 다 마신 술병을 쓰레기통에 똑바로 버리는 것조차 바라서는 안 됐다. 일탈의 즐거움에 빠진 사람을 굳이 끌고 갈 생각도 없었고.
가볍게 가르엘의 손길을 떨쳐 낸 카델이 절그럭거리는 걸음을 옮겼다. 문과의 거리가 멀지 않음에도 몸이 천근만근이라 가는 데만 한 세월이었다.
그렇게 카델이 겨우겨우 문손잡이에 손을 얹었을 때. 가르엘이 불쑥 말했다.
“제가 마족을 찾아보겠다고 한다면, 함께 휴식 시간을 보낼 의향이 있는 건가요?”
“……예?”
“혼자 있으려니 외로워서 말입니다.”
등을 보인 채 가르엘의 말을 곱씹던 카델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드러난 얼굴엔 그야말로 ‘뭔 개소리야?’를 새겨 넣은 황당한 기색이 만연했기에, 가르엘은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대신 마족을 찾아봐 줄 사람이 있으면 당장 움직이진 않을 거라면서요.”
“그게 그쪽이랑 단란하게 담소를 나누면서 시간을 때울 거란 얘기는 아니었는데요.”
“흠, 내가 취향이 아닌가.”
카델의 떨떠름한 표정에 가르엘이 의외라는 듯 뺨을 문질렀다. 그러고는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저도 모르게 물러난 카델이 문 위에 등을 부딪치고. 훌쩍 가까워진 가르엘이 카델의 몸을 감싸듯 덮어 왔다.
“뭐 하는…….”
졸지에 가르엘의 목에 고개를 처박게 된 카델의 눈이 더 커질 수도 없을 만큼 크게 벌어졌다. 반사적으로 숨을 들이쉬자, 그의 분위기만큼이나 은근한 체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그렇게 이대로 비명을 질러야 하는지, 급소를 가격해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할 무렵.
달칵.
문손잡이가 돌아갔다. 가르엘은 열린 문을 따라 기울어지는 카델에게로 나른한 시선을 두었다.
“카델 씨 얼굴은 제 취향이니까요. 나중에라도 함께 단란한 시간을 보낼 수 있길 바라죠.”
소름 끼치는 가르엘과의 대면이 끝나고, 카델은 자신을 이곳까지 데려다주었다는 루멘을 만날 수 있었다. 둘은 곧장 바스킨 마을로 돌아가기 위해 마을 어귀에 묶어 둔 말을 찾으러 이동했다. 한시가 급하니 카델은 그 잠깐을 이용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를 파악해 둘 예정이었다.
……분명 그럴 예정이었는데.
“이럴 거면 왜 지원을 요청하라고 한 거지?”
루멘은 여관을 나서기 무섭게 냉랭하기 짝이 없는 태도를 보였다.
“아니…… 마족을 찾는 게 급했다니까…….”
“꼭두새벽부터 화이트 왕국으로 달려가 황혼 성기사단을 불러왔어. 대장이 급하다고 했으니, 있는 연 없는 연 다 끌어다 데려왔다고. 그런데 그 몇 시간을 못 기다리고 혼자 튀어 나가? 그래 놓곤 이기지도 못하고 쓰러져 있어?”
“호, 혼자 간 거 아니거든? 그리고 야, 그 마족 놈이 얼마나 강했는지 알아? 나 정도 되는 마법사 아니었으면 그대로―”
“죽었겠지. 그게 문제인 거야.”
루멘은 뻘쭘한 표정으로 변명을 이어 가는 카델에게 제 로브를 걸쳐 주었다. 그러면서도 그를 내려 보는 시선은 여전히 싸늘했다.
카델은 루멘의 폭풍 같은 잔소리에 주눅이 들었다. 그로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해도, 루멘의 입장에서 보았을 땐 황당할 만했다. 카델은 루멘의 손을 잡고 말 위에 올라타며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미안.”
“됐어. 정식 단원도 아닌 놈한테 일일이 사과할 필욘 없지. 부려 먹는다고 순순히 달려간 이쪽이 멍청했을 뿐이다.”
“야, 무슨 말을 그렇게…….”
“쓸데없는 대화는 그만하자고. 대장도 궁금한 게 많을 거고, 나도 물어볼 게 많아.”
정식 입단 플래그를 가차 없이 깔아뭉갠 후, 루멘이 다시 운을 떼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한동안은 평화롭게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줄 알았건만. 알게 모르게 꽁해져 있던 모양이었다.
카델은 당장 그의 마음을 풀어 줄 만한 이야기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으나, 그 말을 해 줄 수는 없었다. 그 때문에 삭막한 분위기 속에서 루멘과의 질답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라이돈이 마족에게 잡혀갔다고? 의외군. 아무리 약해졌다지만 그렇게 쉽게 납치당할 놈으로 보이진 않았는데.”
“마력을 과하게 사용했어. 내가 의식을 잃기 직전까지 꼼짝도 못 하고 있었으니까.”
“생사 불명인가.”
“살아 있을 거야.”
질주하는 말을 따라 들썩이는 몸에 힘을 빼며, 카델이 눈빛을 가라앉혔다.
라이돈은 살아 있을 것이다. 소속 기사에게 무언가 변고가 생겼는데 시스템이 알려 주지 않을 리 없다. 루멘의 이탈도 일일이 알려 주며 신경을 긁어 대지 않았는가.
‘……그렇게 믿어야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계획을 세우는 것이 카델의 지론이긴 했지만, 부하의 사망까지 가정하고 싶진 않았다.
“반은 황혼 기사단이랑 마족을 추적하고 있는 거야?”
“아직도 하고 있을진 모르겠군. 대장이 치료받는 동안 계속 움직였을 테니, 소득이 없다면 슬슬 마을로 돌아가겠지. 반지는?”
“응?”
“반한테 줬다는 반지. 착용자의 위치와 상태를 알 수 있다며. 변화는 없어?”
완전히 잊고 있었다. 카델은 그제야 뒤늦게 검지에 끼운 반지를 들여다보았다. 희미한 붉은 실이 어둠 속을 가로지르며 길게 이어져 있다. 다행히도 떨림은 느껴지지 않았다.
“마족을 찾진 못한 모양이네. 아직 수색 중이라면 바로 합류하자. 실을 따라가면 될 거야.”
“줘.”
루멘이 등 뒤로 손을 뻗었다. 카델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루멘의 뒤통수와 내민 손만 번갈아 살피자, 그가 빈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반지 주라고.”
“반지? 갑자기 왜?”
“착용자끼리만 위치가 보이는 거 아니야? 말을 모는 건 나니까, 껴도 내가 껴야지.”
“아, 그렇네. 그걸 생각 못 했다.”
깨어난 지 얼마 안 돼서인지 생각이 더뎠다. 카델은 본인의 느릿한 두뇌 회전을 질타하며 곧장 반지를 빼 루멘에게 건넸다.
반지를 받아 든 루멘은 여전히 고개를 돌리지 않았기에, 카델은 그의 얼굴 위로 떠오른 회심의 미소를 발견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