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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멘과 반이 격전지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15분이 흐른 뒤였다.
흙바닥을 물들인 녹색 점액과 짙은 핏물. 푹 파인 구덩이마다 피어오르는 뿌연 연기. 전투의 흔적을 따라 나아가자, 곧 엉망이 된 황야 위에 덩그러니 남겨진 한 인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카델.
단숨에 그의 정체를 파악한 두 남자가 다급하게 말에서 내렸다.
“대장!”
먼저 도착한 루멘이 카델의 상태를 살폈다. 혹시라도 심한 상처가 있다면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됐다.
뒤이어 도착한 반은 힘없이 고꾸라진 카델의 머리를 받쳐 들었다. 완전히 의식을 잃은 듯 두 눈은 미동도 없이 감겨 있고, 얼굴은 흙먼지로 엉망이었으며, 입 주위로 찐득한 점액이 얼룩져 있었다.
“숨은…숨은 쉬고 있어.”
코 밑에 손을 대 본 반이 겨우 목소리를 끌어냈다. 쓰러진 카델을 발견하자마자 덜컥 내려앉아 미동도 않던 심장이 그제야 제 기능을 하는 기분이었다. 떨리는 손을 움직인 그가 카델의 입가를 문질러 닦았다. 점액에서부터 지독한 냄새가 났으나, 그것보다 카델의 창백한 낯이 더 신경 쓰였다.
한편, 심각한 외상은 없다는 판단을 내린 루멘은 그대로 카델을 안아 들었다.
“마족을 찾은 모양이야. 그쯤 되는 놈과의 전투가 있었으니 대장이 이 모양이 됐겠지. 라이돈은…….”
대충 둘러보아도 라이돈은 보이지 않는다. 여기저기 남은 흔적은 많으니 수색이 어렵진 않겠지만, 당장 추적하기에는 카델의 상태가 좋지 못하다. 일단은 살아 있기를 바라는 수밖에.
루멘은 카델을 말에 태우기 위해 걸음을 뗐다. 그러자 마침 타이밍 좋게도, 후발 주자인 모들렌이 그들의 앞에 나타났다.
“루멘 경! 여긴 대체……. 마족은 어디 있습니까? 놓쳤나요?”
부하들에게 대기 명령을 내린 모들렌이 말에서 내렸다. 루멘은 그의 의문을 해소해 주는 대신, 안고 있던 카델을 내보였다.
“이분은…….”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치유술을 사용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치유술이라면 마을에 대기하고 있는 다른 부하들에게 부탁하면 된다. 애초에 이쪽은 마족의 추적을 위해 일부러 전력을 나눈 것이니.
하지만 그렇게 말하며 거절하기에는, 루멘의 표정이 너무도 절실해 보였다.
무려 도미닉가의 차남이다. 타국의 귀족이라고 무시할 수 있는 세력이 아니었다. 그다지 어렵지도 않은 일을 거절해 불필요한 마찰을 빚을 필요는 없겠지.
모들렌이 고개를 끄덕이자 루멘은 곧바로 카델을 바닥에 모로 눕혔다.
장갑을 벗은 모들렌이 의식을 잃은 카델의 가슴을 짚었다. 마력을 불어 넣는 그의 손 아래로 새하얀 빛이 은은하게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약 1분간 이어진 치유술. 눈을 감고 치유에 집중하던 모들렌의 미간이 작게 구겨지고. 천천히 마력을 거둔 그가 손을 떼어 냈다.
들어 올린 눈꺼풀 아래 드러난 곤란한 눈빛이 루멘을 향했다.
“죄송합니다만…… 이건 제 능력 밖의 일이군요.”
붉은 노을이 이글거리는 저녁.
내달리는 말의 움직임을 따라 담요에 싸인 카델의 몸이 들썩거렸다. 루멘은 카델이 불편하지 않도록 더욱 꽉 끌어안은 채 고삐를 내리쳤다.
머리가 띵할 정도로 서늘한 바람이 루멘의 정돈된 머리칼과 단정한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언제나 우아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푸른 눈동자 안에 감도는 것은 사나운 불안감, 그리고 숨통을 옥죄는 다급함뿐이었다.
‘죄송합니다만…… 이건 제 능력 밖의 일이군요.’
‘치유할 수 없다는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다만 지금 제 능력으론 몸에 퍼진 극독의 분해가 불가능해요. 단장님의 힘이 필요해 보이는군요.’
이름난 신성기사단의 부단장도 치유할 수 없는 부상이다. 그것을 어중간한 치유사가 고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루멘은 망설임 없이 황혼 기사단의 단장, 가르엘 몬자시를 찾아가기로 했다.
반은 모들렌의 마족 추적조에 투입됐다. 물론 순순히 받아들인 건 아니었다. 카델이 치료받는 모습을 봐야겠다며 날뛰던 그였으나, 기사단의 도움만 받고 수색 작업에선 용병단 전체가 쏙 빠지겠다는 건 도리에 맞지 않았다. 게다가 가르엘이 있는 곳을 알고 있는 이 또한 반이 아닌 루멘이었으니.
결국 반은 수색 작업을 마치는 대로 카델을 찾아가는 것으로 타협을 볼 수밖에 없었다.
‘양보할 생각도 없었지만.’
카델의 힘없는 머리통을 끌어안으며, 루멘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이미 한 번 눈앞에서 무력하게 카델을 잃은 경험이 있었다. 두 번 다신 그런 더러운 경험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도 또다시 일이 터져 버리다니.
지원군을 요청하라 보내 놓곤 따로 움직일 계획을 세우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심지어 능력이 봉인된 요정 하나만을 데리고서.
화가 났다. 그것이 무모한 카델을 향한 것인지, 이번에도 그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신을 향한 것인지. 제대로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적당히 좀 해, 대장. 사람 애태우는 게 취미야?”
나지막이 속삭인 그가 카델의 머리 위로 코를 박았다. 헝클어진 머리칼에서는 텁텁한 모래와 차가운 바람의 냄새가 풍겼다. 그 냄새가 마음을 안정시켜 주기라도 하는 듯, 머리 위에 지그시 입을 맞춘 루멘이 다시금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조금만 더 달리면 하첼란 마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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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을 이 잡듯 뒤졌다. 몇 없는 술집을 들쑤시고, 생전 발도 들인 적 없는 집창촌까지 깡그리 뒤엎었다.
그리고 마침내, 가르엘 몬자시의 위치를 알아낼 수 있었다.
“여기군.”
축 늘어진 카델을 고쳐 안은 루멘이 눈앞의 문을 거의 부술 기세로 노크했다. 가르엘이 묵고 있는 여관이었다. 조금 전까지 술집에서 놀아나다, 여자 한 명을 데리고 들어갔다지. 추잡한 짓 한다고 카델의 치료를 맡아 주지 않는다면 곤란하다.
신경질적인 노크가 몇 차례 이어지자, 뒤늦게 방문이 열렸다.
반쯤 열린 문틈으로 땀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는 가르엘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대충 걸친 가운의 허리끈을 조이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
“어떤 잡배가 경우도 없이 남의 잠자리를 방해하나 했는데. 루멘 경이었군요?”
“급한 환자가 있습니다.”
“치유라면 우리 모들렌이 참 뛰어나죠. 추천서라도 써 드릴까요? 물론 내일 아침에 말입니다.”
무슨 일을 하다 왔는지 빤히 드러났다. 말 사이사이 섞인 가쁜 숨소리가 루멘의 심기를 거슬렀다.
그 짓을 하는 와중에도 벗지 않은 안대가 가르엘의 같잖음에 힘을 더했다. 그래도 카델을 고칠 사람은 저자뿐이다. 루멘은 잠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는 서늘한 눈빛으로 방 너머의 광경을 훑으며 말했다.
“모들렌 경에게도 벅찬 상태라더군요. 가르엘 경에게 도움을 청하라 하셨습니다. 나머지 인원은 마족 수색에 한창이니, 경만큼 시간과 능력이 남아나는 인물이 없죠.”
널찍한 침대 위에서 이불로 몸을 가린 여성이 이쪽을 힐끔거리며 키득거리고 있었다. 루멘은 그런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려, 귀찮다는 듯 얼굴을 문지르는 가르엘을 바라보았다.
치유를 귀찮아해선 곤란하다. 문틈에 발을 끼워 힘껏 열어젖히자, 문손잡이가 쾅 소리를 내며 벽에 처박혔다. 흔들거리는 문짝을 응시하던 가르엘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본래라면 화이트 왕국이 처리해야 했을 마족을 상대한 사람입니다.”
“아아, 참 고마운 분이네요.”
“그런 사람을 치유하지도 않고 여자와 놀아나기 바쁜 황혼 기사단장이라니. 여러모로 입에 오르내리기 쉬운 가십거리군요.”
“이런, 루멘 경…….”
가르엘은 한참이나 말없이 루멘을 바라보았다. 이내 속 모를 미소를 지어낸 그가 손을 뻗었다.
가리키는 것은 루멘의 품에 안긴 한 남자. 담요에 꽁꽁 둘러싸여 얼굴도 잘 보이지 않는 그를 쿡 찌른 가르엘이 눈을 휘었다.
“꽤나 소중한 분인가 봐요? 도미닉가의 차남께서 이렇게 물불 안 가리고 달려드시다니.”
“예. 아셨으면 이쯤 놀리고 도와주시죠, 가르엘 경. 슬슬 머리에 열이 오르는군요.”
루멘과 가르엘 모두 입가엔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으나. 서로를 향한 눈빛에선 귀찮음과 거부감, 얕게나마 살의까지 느껴졌다.
그리고 한참의 대치 끝에.
“……좋습니다. 루멘 경과 대화하는 동안 이미 식을 대로 식었네요. 이리 주시죠.”
가르엘이 백기를 들었다. 그는 카델을 데려가기 위해 팔을 뻗었다. 거리낌 없는 행동에 루멘의 표정이 희미하게 일그러졌다.
“제가 안고 가죠. 치료는 방 안에서 할 겁니까?”
“네, 뭐……. 그리고 루멘 경. 미리 말씀해 두겠는데, 치유술을 사용하는 동안엔 저와 그 부상자 말고는 아무도 방 안에 들이지 않을 거예요. 경도 예외는 아니니, 어서 넘겨주시죠.”
방 안에 아무도 들이지 않을 거라니? 카델을 이 미친 색마와 단둘이 남겨 두란 말인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용납할 수 없는 불경함에 루멘이 단호히 입을 열려던 순간.
“따르지 않겠다면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가르엘이 더욱 단호한 태도로 말을 가로챘다. 내밀었던 팔까지 거둔 채 삐딱한 시선을 보내는 모습에선 농담의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왜 지켜보면 안 된다는 겁니까? 이상한 짓이라도 하는 것 같게.”
“뭘요. 손 하나 잘못 놀렸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것 같은 표정을 하시고서. 걱정 마시죠. 루멘 경의 소중한 분께 해를 끼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더 실랑이를 벌여 봐야 얻는 것도 없다. 가르엘은 치유에 관해선 조금도 양보하지 않을 듯했고, 내내 가느다란 호흡만 이어 가는 카델의 상태가 신경 쓰여 더 몰아붙일 여유도 없었다.
결국 루멘은 가르엘에게 카델을 넘겨주었다. 뒤이어 난데없는 불청객에게 즐거운 시간을 방해받은 여자가 짜증스레 방을 빠져나왔다. 그녀는 다음에 보자는 가르엘에게 ‘재수 없는 짝눈이’라는 욕을 지껄인 뒤 떠났다.
그렇게 완전히 닫힌 문 앞에서, 루멘이 참았던 한숨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