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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고의 육신을 뒤덮은 얼음 가시에 이상이 생긴 것은 그로부터 고작 1분 남짓이 흐른 뒤였다.
주륵. 투두둑.
가시 위에 걸쳐진 내장과 살점이 녹아내렸다. 흘러내린 살점은 진녹색 점액이 되었고, 곧이어 꿈틀꿈틀 이동하며 저들끼리 뭉치기 시작했다. 가시 위의 모든 살점이 녹아내리자, 빼곡하던 얼음 가시 또한 수증기를 내뿜으며 서서히 증발했다. 그 안에 갇혀 있던 육편이 또다시 녹아내리며 바닥에 뭉친 점액 덩어리의 수는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물론 카델이 그 느릿한 복구 작업을 가만히 지켜보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점액은 화염구를 정통으로 맞고도 잠시 퍼졌다 다시금 뭉칠 뿐이었다.
‘재생 중엔 공격이 불통이라는 건가. 사기네.’
짧게 혀를 찬 그가 재생에 박차를 가하는 점액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점액 덩어리들은 한데 모이지 않았다. 대신 여러 갈래로 흩어져 각자의 영역을 확보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점액이 모이자.
꾸룩. 꾸루룩.
그것은 빠른 속도로 변형되기 시작했다. 불어나는 몸집과 함께 기포가 차오르며 울룩불룩하게 부풀고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6개의 덩어리. 곳곳에 분포된 덩어리는 주변의 작은 점액 방울을 빨아들이며 각각의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마치 종양의 성장을 보는 듯했던 역겨운 장면은 오래 가지 않았다. 점액은 점차 인간의 형상을 띠었다.
빠르게 자라난 팔다리와 목을 따라 이목구비가 새겨졌다. 그렇게, 카델과 라이돈의 앞으로 6명의 에르고가 나타났다.
‘분신술인가……. 실제로 보니 배는 어이없네.’
“아하하! 분신이다, 분신! 재밌네! 카델도 배워 보는 게 어때? 카델이 10명이면 세상이 재밌어질 텐데!”
카델은 잔뜩 들뜬 라이돈을 뒤로한 채 에르고의 분신을 살폈다. 겉으로 보기에 두드러지는 차이점은 없다. 어느 쪽이 본체인지도 판별할 수 없었다.
‘이렇게 많아서야, 환혹술을 거는 라이돈도 힘들어지겠군.’
아니, 환혹술을 거는 게 가능하긴 할까? 마력을 포함한 많은 것들이 봉인된 상태다. 만약 명확한 목표물을 추리지 못한다면 계획이 물거품이 될 가능성이 컸다.
그런 카델의 걱정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라이돈이 장난스럽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뛸 준비 해야지, 카델.”
“벌써 본체가 뭔지 알아냈어?”
“아니! 몰라도 돼.”
감은 눈꺼풀 아래로 굴러가는 눈동자의 움직임이 도드라졌다. 몇 차례 눈을 비빈 그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붉은 눈동자 위에 새겨진 선명한 마법진이 드러났다.
“본체든 분신이든, 싹 다 환혹시키면 되지.”
라이돈다운 결론이었다. 그는 망설이는 카델의 등을 가볍게 밀치며, 눈동자 위로 마력을 불어 넣었다.
아무리 환혹술이라도 기척까지 숨길 수는 없다. 라이돈은 그저 카델이 자리에 멈춰 있는 ‘환영’을 보여 줄 뿐. 그러니 곳곳에 분포한 6개의 분신을 무사히 돌파하기 위해서는, 기척이 묻힐 만한 요란한 마법이 필요했다.
[화접몽]
마침 카델에게는 아주 적절한 마법이 있었다.
‘폭발에 숨어 단숨에 늪까지 달려간다. 환혹술이 유지되는 동안 늪을 파괴하겠어.’
넘실대는 불나비들이 단숨에 황야를 가득 메웠다. 분신 사이를 넘나드는 부드러운 날갯짓. 6개의 시선이 각자의 앞에 날아든 불나비를 따라 움직이고.
“지금이야, 라이돈!”
환혹술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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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에서 연속적인 폭음이 울렸다. 후끈한 열기가 끼쳐 오며 살갗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카델은 쏟아지는 점액을 피해 달려 나갔다.
‘분신까지 전부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 줄이야……. 빨리 늪을 처리하지 않으면 시간 벌기가 더 힘들어지겠어.’
총 6개의 분신. 6명의 에르고는 화접몽의 화력에 맞서 닥치는 대로 점액을 난사하고 있었다. 그 바람에 바닥은 발 디디기 무섭게 타들어 가는 생지옥이 되었고, 단순한 달리기마저 장막 없이는 불가능한 상황이 형성됐다.
연기를 뚫고 질주하며, 카델은 조급한 눈빛을 번뜩였다. 에르고가 눈치채기 전에 모든 일을 처리해야 한다. 갓 재생한 그가 라이돈에게 정신이 팔려 있는 지금!
목적지에 도착한 카델이 빠르게 몸을 숙였다. 검은색에 가까운 늪에서는 반사적으로 헛구역질이 튀어나올 만큼 지독한 악취가 풍겼다. 카델은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잠시 입을 틀어막은 채 숨을 참았다.
‘냄새 더럽게 심하네!’
어찌나 냄새가 심한지 노출된 살과 눈이 따끔거릴 지경이었다. 간신히 구역질을 삼켜 낸 카델이 맞은편을 살폈다.
‘어중간하게 마력을 흩뿌려서는 절대 에르고의 마법진을 파괴할 수 없어. 내 마력을 직접 흘려 넣는다.’
분신들은 전부 늪을 등지고 있다. 확실하게 치고 빠지려면, 기회는 지금뿐.
화르륵.
카델의 오른손이 불꽃에 휩싸였다. 손에 장막을 두른 그가 그대로 늪 속에 오른손을 처박았다.
‘마녀의 마법진을 해제했을 때처럼. 집중해서 에르고의 마력을 탐지하는 거야.’
빠르게 순환하는 마력의 줄기를 낚아채고, 자신의 마력을 불어 넣어 흐름을 망가뜨린다.
끝을 알 수 없는 늪 속에선 빼곡하고 촘촘하게 드리운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다. 그만큼 마력의 역순환을 끌어내기는 힘들겠으나.
‘마력 감지 자체는 힘들지 않아. 제대로 망가뜨려 주지.’
손을 뻗는 곳마다 전부 마력이다. 그렇다면, 잡히는 대로 부숴 주면 된다.
오른손에 응축된 불꽃에 닿은 마력 줄기가 우수수 끊어져 나갔다. 술식의 붕괴가 시작된 늪이 부글거리며 끓어오르고 있었다. 카델은 아낌없이 마력을 쏟아부으며 늪을 헤집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포인트는 속전속결. 에르고가 붕괴하는 술식을 눈치채기 전, 최대한 빠르고 완벽하게 늪을 파괴하는 것.
비 오듯 흐르는 땀이 늪 위로 뚝뚝 떨어졌다. 그러나 닦아 낼 여력은 없었다.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온전한 집중력은 작은 눈 깜빡임, 가쁜 호흡 하나조차 허락지 않았다.
코앞으로 다가온 고지. 카델은 늪의 절반을 뒤덮은 자신의 마력을 느끼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대로 흐름을 뒤틀기만 한다면.
‘좋아, 다 됐어!’
확실하게 늪을 파괴할 수 있다. 그리 생각한 카델이었으나.
“끌끌……. 사랑스러운 요정이여…… 귀한 눈을 그리 함부로 쓰면 안 되지. 금이 가 버리잖나.”
에르고의 불쾌한 목소리와 함께, 라이돈의 짧은 비명이 들렸다. 집중력이 깨진 것은 한순간이었다.
반사적으로 돌아간 시선. 그곳에는.
‘라이돈……?’
양손으로 눈을 가린 채 무릎 꿇은 라이돈이 있었다. 라이돈은 괴로운 듯 눈을 문지르며 몸을 웅크렸다. 구부러진 손가락을 타고 선명한 핏물이 흘렀다.
그 모습을 발견한 카델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왜 피가…….’
카델은 환혹술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다. 어떤 원리로 사용할 수 있는 건지, 시전자가 가지는 부담은 무엇인지. 그렇기에 라이돈의 상태를 한 번에 이해할 수 없었다.
‘너무 무리해서 사용한 건가? 봉인이 걸린 상태라 그래? 대체 뭐야. 뭐가 어떻게 된 거냐고!’
술식의 붕괴는 아직 진행 중이었으나, 저 상태라면 환혹술은 이어 갈 수 없다. 무방비한 라이돈을 혼자 둘 수도 없었다. 늪에서 손을 빼낸 카델이 라이돈을 감싼 장막을 강화하며 후퇴를 시도했다.
하지만.
“멍청하구나, 멍청해.”
지금껏 마력을 불어 넣었던 늪 속에서, 기다란 팔이 튀어나왔다. 불시에 붙들린 발목. 소스라치게 놀란 카델이 곧장 화염구를 날렸으나, 즉시 떠오른 점액이 공격을 방어했다.
‘에르고의 본체……? 어느 틈에!’
에르고가 천천히 늪 위로 떠올랐다. 필사적으로 발목을 비트는 카델의 눈빛이 떨렸다. 언제부터 있었던 걸까? 분신을 생성하는 동안 본체를 늪 속에 숨겨 두었던 거라면, 에르고는 자신이 늪의 술식을 끊어 내는 내내 안에 숨어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왜 막지 않았지?’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늪은 꼼짝없이 파괴되었을 것이다. 그걸 모르진 않았을 텐데. 그럼에도 계속 버티고 있던 이유가 뭐란 말인가.
혼란한 고동색 눈동자 위로, 퍼뜩 한 가지 깨달음이 스쳤다.
‘라이돈이 무너지길 기다렸나!’
에르고는 마족이다. 요정족과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을 넘어 그들을 먹기까지 해 본 모양이니, 그런 놈이 ‘환혹술’의 존재를 모를 리 없었다. 놈은 환혹술이 요정의 몸에 끼치는 부담을 알고 있다. 그랬기에 라이돈이 한계에 다다를 때까지 기다린 것이다.
‘언제 환혹술을 알아차린 거야? 내가 늪으로 달려갔을 때? 아니면 환혹술에 걸린 분신의 이상을 눈치챘나? 어떻게 이런…….’
절망적인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모든 계획이 탄로 난 셈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에르고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었다.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눈 안으로 분신에게 둘러싸인 라이돈의 모습이 비쳤다.
“라이돈! 도망가!”
카델은 분신의 위로 낙뢰를 떨어뜨리며 소리쳤다. 하지만 라이돈은 자리에 웅크린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눈을 가린 손바닥을 흠뻑 적신 핏물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눈에 얼마나 큰 상처를 입은 걸까. 만약 자신이 조금만 더 침착하게 상황을 살폈다면. 환혹술을 요청할 때 느꼈던 라이돈의 망설임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봉인이 걸린 라이돈은 모든 능력이 반감된 상태다. 그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었다면, 무모한 라이돈의 선택을 받아들이는 대신 조금 느려도 확실하게 본체부터 찾아보았을 것이다.
몇 번이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이 싸움의 승기는, 더 오래 평정을 유지하는 이가 쥐게 될 것이라고. 조급하게 늪을 파괴하기 위해 달려간 순간부터 승기는 이미 에르고에게 넘어갔던 것이다.
“덜떨어진 인간을 상대하는 건 역시 지루하군.”
온전히 빠져나온 에르고의 본체가 카델을 뒤에서부터 덥석 끌어안았다. 다행스럽게도 에르고의 피부를 덮은 점액에 산성은 없었으나, 그에게서 나온 점액이 몸을 타고 흐르는 감각은 끔찍하기만 했다. 카델은 이를 악물며 마력을 응축했다.
‘이렇게 순순히 붙잡힐 순 없어.’
근접한 거리에서 시전하는 마법은 자살 시도나 다름없다는 걸 안다. 하지만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이대로 에르고에게 붙잡힌다면, 라이돈을 보호해 줄 사람이 없어진다.
‘보호자 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런 추태를 부려.’
장막과 공격의 동시 시전. 최대한 몸을 방어하며 마법을 날리는 수밖에.
눈을 부릅뜬 카델이 화염구를 생성시키고. 몸을 틀어 뒤편의 에르고를 향해 공격을 날리려던 그 순간.
“우웁……!”
축축한 에르고의 손바닥이 카델의 입을 틀어막았다. 벌어진 입새로 흘러드는 정체불명의 액체. 찐득하고 역겨운 액체가 순식간에 입 안 가득 들어찼다.
뱉을 틈도 주지 않고 그대로 에르고가 코를 틀어막았다. 카델이 어쩔 수 없이 액체를 삼키자, 그제야 카델을 풀어 준 에르고가 스산한 웃음소리를 냈다.
“우윽…… 우웨엑……!”
곧장 목을 움켜쥐며 헛구역질을 하던 카델이 신경질적으로 화염구를 날렸다. 가볍게 공격을 피한 에르고가 비스듬히 입꼬리를 올렸다.
“나한테 뭘 먹인 거야!”
“알면 기분이 좋아지겠나?”
연달아 날아드는 화염구가 에르고를 노렸으나, 그는 꿈쩍도 않은 채 점액으로 모든 공격을 방어했다.
“끌끌……. 그만 날뛰지 그러나. 효과도 없을뿐더러, 네놈만 힘들어질 텐데.”
에르고의 탐욕스러운 눈빛이 번들거렸다. 카델은 그 뱀 같은 시선을 마주하며, 아직도 끔찍한 맛이 느껴지는 입 안을 훑어 침을 뱉었다.
“뭔 짓을 했는진 몰라도, 라이돈은 절대 못 넘겨. 이제 곧 지원군이 올 거다. 몸도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은데, 여기서 물러나면 일단 목숨은 건질 수 있지 않겠어?”
이렇게 된 이상 시간 끌기보단 라이돈의 안전을 택해야 했다. 카델은 일부러 지원 병력의 존재를 알리며 에르고가 후퇴하기를 바랐다. 신중한 성격이니 여기선 욕심부리지 않고 물러나기를 선택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에르고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눈을 휘었다. 길게 빼낸 혓바닥으로 입술을 축인 그가 카델을 가리켰다.
“인간인 네가 이 몸의 건강을 걱정하는 건가? 우습기가 광대 못지않군. 잘 느껴 보거라, 애송이. 네 몸에 흐르는…… 그 지독한 죽음을.”
……죽음이라고?
설마, 자신에게 먹인 그 정체불명의 액체가 독극물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순간 멈칫했으나, 카델은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독이라고 해도 상관없어. 해독제는 미리 준비해 뒀다. 독이 퍼지기 전까지만 약을 먹으면 돼. 먹자마자 죽는 극독이었다면 당장 쓰러졌겠지. 아직 몸에 이상은 없어.’
불안에 휩싸여 우선순위를 혼동해선 곤란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에르고를 라이돈에게서 떨어뜨리는 것.
그렇게 생각한 카델이었으나. 일순 찌릿한 격통이 그의 전신을 덮쳤다. 온 내장이 비틀리는 기묘한 감각과 함께 참을 수 없는 구토감이 몰아쳤다. 반사적으로 입을 틀어막은 카델의 눈빛이 딱딱하게 굳었다.
“자아……. 그럼 이제 움직여 보실까….”
에르고가 천천히 카델의 옆을 스쳐 지났다. 점점 멀어지는 에르고가 라이돈을 노리고 있음을 알고 있음에도, 카델은 움직일 수 없었다.
힘 빠진 몸에 균형이 흔들렸다. 픽 구부러진 무릎을 따라 바닥을 짚고 엎드린 카델이 가쁜 숨을 내뱉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구역감이 끊임없이 몰려오고 있었다. 카델의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내장까지 뱉을 기세로 몸을 들썩거리던 그가 기어코 속을 게워 냈다.
그리고.
‘이런 씨발…….’
바닥을 질펀하게 적신 녹색 점액을 발견한 카델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