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7화 (67/521)

생존자는 총 24명. 절반 이상이 의식 불명이며 의식이 있는 나머지 인원 또한 아직 완전히 정신이 돌아왔다고는 볼 수 없었다. 그나마 상태가 괜찮은 이는 가장 처음 발견해 기력단을 섭취한 어린아이, 피넷 정도였다.

긴 망설임 끝에, 카델은 아이의 입을 통해 이 비극의 전말을 밝혀내기로 결정했다.

“마을 사람들이 병든 건 우물 때문이었어요.”

바스킨 마을의 주민들은 하나의 우물을 공유하며 식수를 해결했다. 모두가 이용하는 우물이니 이상한 짓을 할 사람도 없고, 오랫동안 문제없이 물을 마셔 왔기에 처음에는 아무도 우물의 이상을 의심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제가 괜한 투정을 부리는 거라고 했지만, 그 물에서 정말 이상한 냄새가 났거든요. 시큼한 냄새요. 그래서 전 목이 말라도 물을 마시지 않았어요.”

피넷을 포함한 현재의 생존자들은 모두 그런 식으로 우물의 물을 마시는 걸 기피했다. 올바른 선택이었다. 우물의 물을 마신 주민들은, 바로 다음 날부터 이상 현상을 호소했으니.

“초록색 토를 했어요.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는데 계속, 계속요. 그 토에서 엄청나게 더러운 냄새가 났어요. 어른들이 약을 먹여 봐도 멈추지 않았어요. 너무 무서웠는데…… 그때 처음 보는 형이 마을을 찾아왔어요.”

남자는 본인을 여행 중 우연히 방문한 치유사라고 소개했다. 그는 무상으로 병든 주민들을 치료해 주었다. 치유사라는 것이 거짓말은 아니었는지, 간단한 치유술 한 번에 다 죽어 가던 주민들의 병세가 잠잠해졌다.

하지만 그것이 건강을 되찾았다는 말은 아니었다.

“더 이상 토를 하진 않았지만,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어요. 그 형은 이 병이 낫기 위해선 모두의 힘이 필요하다고 했고, 모두에게 알약을 하나씩 나눠 줬어요. 아주 작은…… 새끼손톱만 한 알약을요.”

병의 전염을 예방하는 약. 듣도 보도 못한 병세를 한순간에 잠잠하게 만든 치유사의 말이었다. 듣지 않을 이유가 없다.

병세가 없던 주민들은 순순히 약을 삼켰고, 다음 날부터 본격적인 치료에 들어가겠다는 그의 말을 믿고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몸에 아무런 힘도 들어가지 않았어요. 머리가 아프고, 배도 엄청나게 욱신거렸죠. 겨우겨우 일어나서 엄마랑 아빠를 찾아갔는데…….”

피넷이 부모를 발견했을 때, 그들의 부패는 이미 상당 부분 진행된 상태였다. 끔찍한 모습이었으나 피넷에겐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남지 않았다. 복통이 너무 심해 큰 소리로 도움을 요청해 볼 수도 없었다.

결국 몇 번이고 기절했다 깨어나기를 반복하며, 눈을 뜰 때마다 조금씩 썩어 가는 부모의 모습을 지켜보는 수밖엔 없었다고. 피넷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모든 이야기를 전해 들은 카델이 입을 앙다물었다. 아이의 대략적인 설명으로도 금세 알아챌 수 있을 만큼, 이 사태의 주모자는 명확했다.

‘치유사 행세를 했군. 마족 놈.’

마을 하나를 초토화하기 위해 갖은 정성을 들였다. 그 지능적인 행적에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피넷이 먹었다는 약은 수면제인가? 단순 수면제라기엔 깨어났을 때 몸에 힘이 없었다는 말이 신경 쓰이는데.’

카델은 신중하게 마족의 저의를 파악했다. 사건의 주모자는 더없이 분명했으나, 아직 의문이 드는 점은 많았다.

주민의 몰살이 목표였다면 뭣 하러 애매하게 기력만 빼앗는 알약을 주었던 건지. 그런 주제에 왜 문을 봉쇄해 외부의 도움을 차단했던 건지. 앞뒤가 맞지 않았다.

그리고 고민하는 카델의 옆에서, 무료하게 쭈그려 앉아 흔들거리던 라이돈이 불쑥 손을 뻗었다. 노리는 것은 피넷. 거침없는 손길이 힘없이 드러누운 피넷의 상의를 훅 들쳐 올렸다. 놀란 카델이 라이돈의 행동을 저지하려 했으나.

“역시. 이곳 인간들한테서 계속 기분 나쁜 기운이 느껴진다 했어.”

피넷의 납작한 배 위에 도드라진 검은색 핏줄. 그 흉측한 모습을 발견한 카델이 주춤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가슴께에서부터 툭 불거진 핏줄은 뿌리처럼 여러 가닥으로 갈라져 하복부까지 거무죽죽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이건…… 설마 이것도 그 마족 짓인가?”

“약으로 재운 뒤에 찾아왔었나 봐. 마족 놈이 세력을 불리고 싶었나 본데?”

“세력을 불려?”

“이거, 빨리 없애지 않으면 이곳 인간들 전부 마물로 변할 거야.”

“……뭐?”

태연하게 대꾸한 라이돈이 들쳤던 상의를 내리자, 옷자락에 가려져 있던 피넷의 겁먹은 얼굴이 드러났다. 거의 반사적으로 표정을 푼 카델이 아이의 배를 쓸어내렸다. 손바닥 위로 우둘투둘한 기분 나쁜 감촉이 느껴졌다.

“무서워할 필요 없어. 여기 있는 형은 헛소리하는 게 취미거든. 방금 한 말도 농담일 뿐이야.”

“응? 농담 아닌―”

“라이돈도 참! 그런 농담은 때를 가려 가면서 해야지! 심심하면 이리 나와. 놀아 줄게.”

급히 라이돈의 입을 틀어막은 카델이 아이를 향해 산뜻한 미소를 날린 뒤, 빠른 걸음으로 라이돈을 끌고 나갔다. 집 밖으로 나와 손을 떼어 내자 라이돈이 막혀 있던 숨을 뱉으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카델? 나랑 데이트하고 싶었어?”

“데이트 같은 소리 하네.”

자신이 왜 끌려 나왔는지 조금도 모르는 눈치다. 카델은 한숨을 집어삼키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방금 했던 얘기, 자세히 말해 봐. 그 징그러운 자국은 뭐고, 인간들이 마물로 변할 거라는 얘기는 또 뭐야?”

“말 그대론데. 가끔 인간을 감염시켜서 전력을 충당하는 마족이 있거든. 나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배웠던 증상 중 하나가 아까 인간 꼬마의 배에 돋은 ‘검은 핏줄’이었어. 꽤 많이 번졌으니까, 마물이 되는 건 시간문제일걸.”

“인간이 마물이 된다는 게 말이…….”

되는 일인가.

그리 말하려던 카델의 머릿속으로, 문득 한 가지 기억이 스쳐 지났다. 「히어로 오브 나이츠」를 플레이했을 당시, 한 마족을 공략하던 때의 기억.

‘아니, 이 새끼는 뭔데 스킬 구성이 이따위야? [아군 증식] 같은 사기 스킬을 달아 놨으면 턴이라도 늘리든지, 아니면 다른 스킬 밸런스를 맞추든지! 깨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내가 생각하고 게임 만들라고 몇 번을 말해. 어!’

[아군 증식]

스킬 쿨타임이 돌아오는 턴마다 아군을 증식 시켜 자신의 몸을 방어하고, 늘어난 아군의 일제 사격으로 대량의 대미지를 입히는 스킬.

‘설마 이게 [아군 증식]이라는 거야?’

게임 내에서는 그 마물이 어디서 나온 건지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스토리를 꼼꼼히 읽었다면 짐작 정돈 해 봤을지 몰라도, 카델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

‘내가 아는 거라곤 그 보스가 [아군 증식]을 사용하기 전에 때려잡는다는 공략법 정도였지.’

만약 이 현상이 [아군 증식]의 준비 과정이라면. 카델이 아는 공략법조차 무용지물이 된다.

“……그 감염의 진행을 막을 방법은 없는 거야? 치유사가 정화 작업을 해 준다든지.”

“글쎄? 내가 알기론 치유술로도 해독이 불가능해. 알고 있는 해결법은 한 가지뿐이야.”

검지를 들어 올린 라이돈이 카델을 올려다보았다. 진지한 얼굴로 자신의 말을 경청하는 카델이 귀엽다는 듯, 그가 가볍게 눈을 휘며 명쾌하게 말했다.

“그 마족 놈을 죽이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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