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과 루멘에게 설명을 미뤘던 데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요정 왕 하이론을 설득할 수 있었던 것도, 핀하이족의 봉인을 들먹이며 라이돈을 꼬드길 수 있었던 것도. 전부 카델이 가진 ‘게임 정보’ 덕분이었다. 탈출 과정이 하나부터 열까지 빙의자의 특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곧이곧대로 나열했다간 일이 복잡해지는 것을 넘어 위험해진다. 이 세계에서의 입지든, 부하들과의 관계든.
그 때문에 카델은 적당한 거짓과 얼버무림을 섞어 그럴싸한 이유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라이토스가에서 핀하이족의 역사를 저술한 고서를 읽은 적이 있다고?”
“그래. 워낙 예전에 읽은 내용이라 떠올리느라 애 좀 먹었지. 하지만 분명해. 과거 핀하이족은 인간들에게 박해를 받았고, 지금의 폐쇄된 숲은 인간들로부터 동족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거야. 그런 숲에 멋대로 발을 들였으니, 그쪽에서 오랜 숙적을 처단하고 싶어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지.”
“그래서. 대장은 숲을 탈출하기 위해 핀하이족의 해방을 공약으로 내걸었고?”
“그런 셈이야.”
공약이라고 하니 입만 산 정치인이 된 기분이었으나, 뭐가 됐든 대충 납득만 하면 됐다. 라이돈의 봉인에 관한 정보도 고서에서 읽었다고 둘러대면 되고, 마계에 대한 건 라이돈조차 듣지 못한 이야기이니 자신만 입 다물면 모를 일이다.
“단장이 그 요정 꼬맹이의 활약에 도움을 줘야 한다니…….”
“사실 도움을 준다는 것도 거창한 소리지. 우리는 하던 대로 의뢰를 처리하면서 성장하면 돼. 라이돈은 전력을 보태면서 덤으로 명성을 쌓을 뿐이고. 그러니 당장 동료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더라도, 너무 그렇게 괴롭히진 말아 줘. 평생을 숲에 갇혀 살던 애니까. 어떻게 보면 내 생존을 위해 막무가내로 끌고 왔다고 볼 수도 있고.”
이 정도면 이해가 되었을까. 카델은 주문한 술을 들이켜며 눈을 굴렸다. 루멘은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턱을 쓸어내렸고, 반은 영 받아들이기 힘든 모양인지 표정이 좋지 못했다.
‘슬슬 마무리 지었으면 좋겠는데. 라이돈 쪽이 걱정돼. 혼자 오래 뒀다간 무슨 사고를 칠지 몰라.’
처음으로 숲이 아닌 세계를 경험하게 된 라이돈이었다. 물가에 아이를 내놓은 심정이 이런 것일까. 카델은 한시바삐 라이돈이 있는 방으로 돌아가 그가 얌전히 침대에 누워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
급한 마음에 엉덩이만 들썩거리며 뛰쳐나갈 각을 재는데. 그런 그의 뒤에서부터, 명랑한 목소리가 다가왔다.
“이게 인간들이 마시는 술이야?”
이어지는 익숙한 웃음소리에 카델의 고개가 빠르게 돌아갔다.
라이돈!
예고 없이 등장한 그가 생긋 웃으며 카델과 눈을 맞췄다. 놀란 그가 이렇다 할 반응을 하지 못하자, 라이돈은 자연스럽게 카델의 옆자리를 꿰차고 앉았다.
카델은 라이돈이 자신의 술잔을 낚아채 거리낌 없이 맛보는 모습을 멀뚱히 지켜보다 뒤늦게 인상을 구겼다. 분명 방 안에 얌전히 있으라고 일러두었건만.
‘잠깐. 나오기 전에 혹시 급한 일이 생기면 이 주점으로 찾아오라고 했었지. 혹시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 아닐지. 짧은 걱정은 이어지는 라이돈의 해맑은 목소리를 따라 산산이 부서졌다.
“심심해서 못 버티겠더라고! 이 무료함의 해소가 급해서 찾아왔어, 카델. 하하! 그런데 인간들 술은 진짜 맛없다. 왜 단맛이 하나도 안 나지? 과실주가 아닌가?”
“이 자식이……. 멋대로 돌아다니지 말라고 했잖아! 힘도 없는 게 여기저기 쏘다니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그리고 술 내놔! 너 지금 겉모습은 많아 봤자 열다섯 살 정도니까, 이런 데서 마음대로 음주하면 안 된다고.”
“아하하! 카델, 내 진짜 나이가 몇인 줄은 알고 그러는 거야? 애 취급이라니, 완전 웃겨!”
“잔말 말고 내놔.”
단호하게 술잔을 빼앗자 라이돈이 실실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정말이지, 더럽게 다루기 까다로운 놈이다. 한숨을 쉬며 맞은편의 루멘과 반을 돌아보자, 기다렸다는 듯 싸늘한 시선이 내리꽂혔다.
‘쟤넨 왜 눈을 저렇게 뜨고 있어?’
당장 팔다리 한쪽이라도 잘라 낼 법한 살기등등한 눈빛이었다. 다행이라면 그 시선이 향하는 곳이 자신이 아니라는 것 정도일까.
둘은 뻔뻔하게 테이블의 안주를 주워 먹는 라이돈을 노려보고 있었다. 카델이 흉흉한 분위기 속에서 눈치를 살피고 있으니, 루멘이 먼저 입을 열었다.
“대장의 뜻은 잘 알겠어. 라이토스가가 보관하고 있던 고서이니 그 내용이 잘못됐을 확률도 낮고. 요정들이 그런 부당한 핍박을 받고 있었던 거라면, 무리가 되지 않는 한에서 도와주는 건 좋은 일이지. 하지만…….”
잠시 뜸을 들이던 루멘이 이내 평소의 여유로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 부담을 대장이 전부 짊어질 필요는 없어. 나도 돕도록 할게.”
“응? 아니, 짊어진다고 표현할 만큼 거창한 일도 아니고. 아까도 말했다시피 우리는 평소처럼 의뢰를 처리하면 되는―”
“대장이 받는 부담감을 덜어 주겠다는 얘기야. 그런 의미에서, 라이돈은 내가 데리고 자겠어.”
왜 말이 그렇게 되는 거야? 어처구니가 없어진 카델이 뭐라 말을 얹기도 전. 이번에는 반의 차례가 돌아왔다.
“아니. 넌 숲에서 충분히 고생했다, 루멘. 라이돈은 내가 데리고 자도록 하지.”
“무슨 소리지? 마음고생이라면 나보다 네가 더 심했을 거다. 혼자 푹 쉬어. 라이돈은 내가 데려간다.”
“웃기지 마. 그렇게 혼자 저 녀석을 괴롭…… 아니, 관리하겠다는 말이냐? 그렇게 둘 순 없지.”
난데없는 라이돈 쟁탈전이었다.
카델이 영문 모를 둘의 말싸움 속에서 점점 넋을 잃고 있을 동안, 열심히 안주를 집어 먹던 라이돈이 동그래진 눈으로 카델의 팔을 찔렀다.
“카델! 이건 무슨 음식이야?”
“어엉? 아, 그건 꿀닭튀김이야. 맜있지?”
초롱초롱해진 눈이 꿀닭튀김을 요리조리 살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떠오르는 시스템 창.
「기사 ‘라이돈’의 호감도가 2 상승했습니다.」
「현재 호감도 : 42/100」
……맛있는 걸 먹으면 호감도가 오르는 거야?
얼마나 단순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꿀닭튀김을 우물거리는 야무진 입술을 보고 있자니, 아무려면 어떠냐는 태평한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까지 귀여운데. 괴롭혀도 꿀밤 정도겠지. 역시, 내가 했지만 라이돈을 어리게 만든 건 정말 신의 한 수였어. 아주 칭찬해.’
라이돈의 바뀐 외형이 본인 눈에만 신의 한 수 였음을 알 리 없는 카델이었다.
⚔️
바스킨 마을.
화이트 왕국의 국경선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간 작은 마을에 도착하기까지, 꼬박 열흘이 걸렸다. 그동안 여러 가지 사건이 있었지만―대체로 라이돈의 호기심에서 비롯된 사고였다―, 어찌 됐든 별 탈 없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기억대로라면 화이트 왕국 국경선 근처에서 메인 퀘스트가 발생했던 것 같은데.’
마을의 초입에 들어서며, 카델은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빨리 이곳의 메인 퀘스트를 처리해야 서브 퀘스트를 진행할 수 있어. 화이트 왕국부터는 서브 퀘스트에서도 조금씩 명성을 주니까. 일단 탐색을 해 볼까.’
당연하게도, 메인 퀘스트가 어떤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내용이든 일단 적과 싸우지 않겠는가? 그 적의 정체만 알아낼 수 있다면, 공략법을 구축하는 건 어렵지 않다.
걱정은 환혹의 숲에서 질리도록 했다. 이번에는 마음을 편히 먹고 침착하게 일을 처리하리라. 그리 다짐한 카델이었으나.
그의 여유로움은 바스킨 마을에 진입함과 동시에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윽…….”
마을에 발을 들여놓기가 무섭게 코를 찌르는 악취가 진동했다. 인간이 사는 곳이라곤 믿기지 않는 역겨운 냄새였다.
카델은 소매를 뻗어 시큰거리는 코를 가린 채 미간을 좁혔다. 반과 루멘 또한 악취에 반응하며 인상을 구겼다.
“냄새가 심하군요.”
“딱히 거리가 더러운 것도 아닌데. 이상하군.”
외관만큼은 어딜 가나 쉽게 볼 수 있는 평범한 마을 중 하나였다. 하지만 주의 깊게 살펴본다면, 심각한 악취를 제외하고도 이상한 점은 많았다.
첫째로, 루멘의 말처럼 거리에 악취를 풍길 만한 오물이나 사체가 전혀 없다. 오히려 깨끗한 편에 속했기에 악취의 존재가 더욱 이상했다.
둘째로, 마을을 돌아다니는 주민이 보이지 않았다.
물론 이 마을은 ‘화이트 왕국’의 관문과 애매하게 떨어져 있다. 일부러 찾아오지 않는 한 굳이 들를 필요가 없는 곳이니, 발전과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다. 일행이 바스킨 마을을 찾은 것 또한 메인 퀘스트를 위한 카델의 노림수였을 뿐.
하지만 아무리 사람의 발길이 적은 마을이라도 마을은 마을. 민가도 밭도 멀쩡히 있는데, 돌아다니는 주민이 한 명도 없다는 건 이상했다. 지금이 대낮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더더욱 그랬다.
‘밭에 있는 농작물도 묘하게 시들시들하고. 방치됐나?’
모종의 이유로 마을이 버려졌다거나? 그렇다면 이 적막함도 이해가 간다.
‘정말 아무도 없는 거라면 메인 스토리를 진행할 수 없어. NPC 없이 퀘스트를 받아 본 기억은 없으니까. 설마 여기가 아닌가?’
스토리가 기억나지 않으니 이런 점이 답답했다. 대충 비슷한 장소에서 무언가 사건이 발생했다는 건 알겠는데, 그 장소가 이곳이 맞는지, 어떤 경위로 사건이 발생하는지는 모르니.
그렇게 흐릿한 기억을 되짚으며 꾸역꾸역 거리를 가로지르던 중. 카델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라이돈이 무료하게 중얼거렸다.
“흐응, 역겹네.”
단순한 감상만큼이나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표정이었다. 심지어 그는 카델처럼 코를 막지도, 루멘과 반처럼 인상을 구기지도 않았다. 사실 얼음 마법으로 후각을 마비시켜 둔 건 아닐까. 터무니없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는 무심하게 카델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카델은 이 냄새가 안 나?”
“무슨 소리야. 누구보다 잘 맡고 있거든.”
“인간들 냄새 말고.”
라이돈은 어리둥절한 표정의 카델로부터 시선을 돌리곤, 마을을 성의 없이 둘러보며 입맛을 다셨다.
“마족 냄새 말이야. 아주 진동을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