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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카델과 반, 루멘, 라이돈 일행은 ‘화이트 왕국’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이번 목적지 또한 카델의 선택이었고, 모두의 동의를 구한 그는 말 두 필을 구해 두 명씩 짝을 지어 이동하기로 했다.
카델은 루멘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머리칼을 헝클이는 새벽바람을 느꼈다. 차가운 바람이 머릿속을 헤집자 복잡하기만 했던 계획도 조금씩 정리가 되어 가는 듯했다.
‘라이돈까지 합류한 이상, 1순위는 무조건 코스트 증가야.’
S급 기사의 합류로 넉넉했던 코스트가 단숨에 8까지 차올랐다. 어차피 라이돈은 이미 최대 등급이니 각성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문제는 루멘. 고작 2 남은 여분 코스트로는 A급 기사인 루멘을 데려올 수 없다.
‘가장 좋은 방법은 오스마 제국에서 기사단 승격 퀘스트를 완료하는 거겠지. 기사단이 되면 코스트가 확 증가하니까. 하지만…….’
기사단 승격 퀘스트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높은 명성과 스펙이 필요했다. 승격 퀘스트를 진행하다 몇 번이고 나가떨어져 수도 없이 리트라이했던 기억이 있으니. 하나뿐인 목숨을 날리고 싶지 않다면,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 했다.
‘우선 화이트 왕국의 메인 퀘스트를 진행해야겠어. 그게 끝나면 서브 퀘스트로 명성을 높이고. 라이돈의 봉인을 해제하는 건 그다음이야. 루멘은 기사단 승격 전까지 임시 단원으로 최대한 오래 붙잡아 보는 수밖에.’
루멘을 놓칠 수는 없다. 그의 중요성은 ‘환혹의 숲’의 비극을 겪으며 뼈저리게 느꼈다. 루멘의 뛰어난 공력과 속도, 예민한 감각은 전장의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빛을 발할 테다.
앞으로의 스토리 진행에 있어 루멘의 존재는 필수 불가결했다.
‘어떻게든 구슬려서 옆에 붙어 있게 만들어야지. ……역시 선물을 주는 게 좋으려나. 지금 호감도가 몇인지는 몰라도 선물받고 호감도가 떨어지진 않을 거 아니야.’
정식 기사가 아니었기에 그의 능력치는 열람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호감도 또한 어림짐작으로 셈하는 수밖에 없었고. 카델이 막연히 귀족들이 좋아할 법한 선물에 대해 고민하는데, 루멘이 가볍게 그를 돌아보았다.
“잠든 거 아니지? 떨어지면 다친다.”
“이렇게 들썩거리는데 잠이 오겠냐.”
“그럼 좀 더 꽉 잡아.”
숲을 나온 이후, 루멘은 카델의 상태를 주기적으로 살폈다. 전에는 내키는 대로 나돌아다니며 자유롭게 행동하는 편이었다면, 지금은 카델의 옆에서 잘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전 같으면 정말 떨어질 뻔한 다음에나 카델을 잡아 주면서 놀려 댔을 인물이, 먼저 상태를 살피며 걱정해 준다. 새삼 그 변화를 실감한 카델이 문득 한 가지 가정을 떠올렸다
‘혹시 이미 호감도가 충분히 차 있는 상태면 어쩌지?’
환혹의 숲이라는 극악한 환경 속에서 서로를 의지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는 하나, 자신은 루멘을 위해 홀로 장막 안에 남는 선택을 하기도 했다.
이런 동료애, 협력, 희생까지. 호감을 사기에 딱 적절한 키워드가 아니던가?
‘만약 루멘이 먼저 기사단 입단을 요청해 온다면…….’
자신은 거절할 수밖에 없다. 그야, 시스템이 용납하지 않을 테니까! 코스트 초과에 대한 페널티를 부여할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이런 사정을 설명할 수도 없으니. 콧대 높은 루멘은 자신이 거절당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2차 탈주를 감행할지도 모른다.
점점 하얗게 질려 가는 카델의 안색이 보일 리도 없건만, 묵묵히 말을 몰던 루멘이 묘한 분위기가 감도는 목소리를 냈다.
“대장.”
“……응?”
“이런 얘기는 얼굴 맞대고 하는 편이 좋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역시 지금밖에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무, 뭔데?”
“우리 관계에 대한 내 생각.”
우리 관계에 대한 생각? 카델의 본능이 재빠르게 적신호를 울렸다.
현재 루멘과 자신의 관계라 해봤자 ‘임시 단원’과 ‘임시 단장’이 전부다. 그 관계에 대한 고찰이라니?
답은 두 가지였다. 이 관계를 끝장내고 싶거나, 앞에 달린 ‘임시’를 떼어 내고 싶거나.
불안에 찌든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러갔다. 루멘은 그런 카델의 속마음 따위 알 바 없다는 듯, 자연스럽게 얘기를 늘어놓았다.
“솔직히 내가 대장과의 ‘임시’ 관계를 받아들인 건, 대장을 향한 흥미 때문이었어. 뭔가의 발전을 기대했다기보다, 그냥 대장이라는 인물이 흥미로워서. 함께 어울려 보는 게 나쁘지 않을 것 같았거든.”
“그, 그러냐…….”
“하지만 한 번 그렇게 대장을 눈앞에서 잃고 나니까, 더 이상 흥미만으로 이 관계를 이어 갈 수 없다는 걸 깨달았어. 뭘 택하든 난 포기해야 했던 거야. 지금껏 내 인생을 지탱해왔던 과거, 날 강렬하게 이끄는 미래. 둘 중 무언가를.”
카델의 표정이 점차 뻣뻣하게 굳어 갔다. 부하의 진지한 속마음을 들어 주는 듬직한 단장과는 거리가 먼 표정이었다. 그는 점점 꼿꼿해지는 플래그에 입술을 잘근거렸다.
“지금으로선 둘 중 뭘 선택해도 후회하지 않으리란 자신이 없어. 하지만 이대로 어영부영 대장을 따라다니다 기회를 잃는 것도 원하지 않아. 그러니까…….”
이건 플래그다. 확실한 입단 플래그다!
더는 부정할 수도 없는 휘황찬란한 플래그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카델은 루멘이 그 ‘금지된 발언’을 하기 전, 다급하게 그의 등을 두드렸다. 난데없는 피격에 놀란 루멘이 입을 닫자, 카델은 다가오는 비극을 막아야 한다는 절박함을 담아 간절하게 외쳤다.
“화, 화장실! 화장실 가고 싶다!”
“허? 지금?”
“우왁! 진짜 급해! 빨리 세워! 세우라고!”
이로써 루멘의 호감도가 폭락한다 해도 상관없었다. 아니, 지금 상황에선 오히려 폭락하는 쪽이 나았다!
그런 카델의 눈치 없는 생리 현상의 호소로, 루멘의 입단 플래그는 일단락되었다.
……일단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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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단 승격 퀘스트를 위한 스펙 높이기. 루멘의 입단을 대비한 용병단 명성 높이기. 라이돈의 기사 구실을 위한 봉인 해제.
이 외에도 카델이 짊어진 과제는 수도 없었으나, 그중 가장 두각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왜 이 꼬맹이가 단장이랑 같은 방을 써야 하는 거예요? 본체는 다 큰 성인 남성이라면서요. 머리도 어려진 게 아니라면 혼자 방을 쓰면 될 것 같은데요. 돈이 아깝다면 노숙을 시키는 것도―”
“흐응? 카델은 내 인간이니까 당연히 나랑 같은 방을 쓰지.”
“내, 내 인간? 카데엘? 누구 마음대로 단장의 이름을 허물없이 부르고 있어?”
“카델을 이름으로 부르든 애칭으로 부르든 내 마음이지! 아하하!”
단장인 자신의 독단적인 판단으로 이루어진 라이돈의 입단. 그로 인해 발생한 부하들끼리의 마찰…이라기엔 어린애들 싸움 같았지만.
‘반이랑 루멘도 하루가 멀다고 투닥거렸는데, 여기서 라이돈까지 추가돼 버리다니. 루멘은 몰라도 반은 처음 보는 라이돈이 이렇게 귀여운 소년 모습인 거잖아? 좀 더 다정하게 대해 줄 줄 알았는데…… 욕심이었나.’
반 또한 환혹의 숲에서 요정에게 된통 당했으니 적대적인 감정이 있으리란 건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도 현재 라이돈의 겉모습이 놀라울 정도로 천사 같으니―순전히 어린 동생들에게 약한 카델만의 판단이었다― 조금은 경계를 풀어 주지 않으려나, 기대했던 것이 무색하다.
‘뭐, 반 정도면 양반인가. 적어도 라이돈한테 손은 안 대잖아. 루멘은 라이돈을 볼 때마다 잡아당겨서 패대기치거나 실수인 척 밀쳐 버리니.’
지금도 루멘이 여관 방값을 계산하러 가지 않았더라면 라이돈은 층계를 구르고 있었을 거다. 다행히도 라이돈은 그 수모를 겪으면서도 ‘와! 내가 이렇게 쉽게 밀려 난다고?’ 따위의 감탄사를 뱉기 바빴지만. 보는 카델은 영 찜찜했다.
마음대로 외형을 어리게 만들어 놓고는, 괴롭힘당하는 라이돈을 볼 때마다 되레 안절부절못하게 됐다. 그렇게 매번 라이돈을 감싸 왔기에 부하들의 적의가 나날이 높아진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 그는, 이번에도 눈치 없이 라이돈을 싸고돌았다.
“어쩔 수 없잖아. 라이돈은 바깥 세계가 처음인 데다, 지금은 능력의 절반이 봉인된 상태니까.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고, 멋대로 돌아다니다가 사고가 날 수도 있으니 내가 보호해야지.”
“……그럼 제가 할게요. 보호.”
“응?”
“제가 같은 방을 쓰겠다고요.”
그리 말한 반이 거칠게 라이돈을 잡아끌었다. 라이돈을 내려보는 시선에선 ‘보호’보다는 ‘척살’에 어울리는 형형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곤란하다는 듯 목덜미를 문지르던 카델과 라이돈의 눈이 마주쳤다. 광기밖에 느껴지지 않던 붉은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어 들어 처연하게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단순히 졸음이 몰려온 라이돈의 하품으로 인한 것이었으나.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카델의 마음은 썩은 과일보다 물러져 버렸다. 그는 슬쩍 라이돈의 팔을 잡아끌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너보단 나를 더 편해할 텐데…….”
그 소심한 발언에 반의 눈동자 속에서 불꽃이 튀었다.
“단장?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제가 듣기로 이 요정은 단장을 끔찍하게 괴롭혔고, 다른 요정족도 몇 번이나 단장을 죽이려 했다는데. 그런 놈을 왜 감싸죠? 어쩔 수 없이 데려왔다고는 해도, 이렇게까지 신경 써 줄 필요가 있나요? 전 전혀 이해가 안 가는데요!”
“그, 그건!”
“그건 나도 궁금하네. 슬슬 자세한 얘기를 들려줘야 하지 않겠어? 대장.”
당황한 카델의 시선이 마침 층계를 오르던 루멘을 향하고. 두 부하의 서늘한 분노 속에서 진땀을 빼던 그가 결국 항복을 외쳤다.
“……알았어. 설명해 주면 될 거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