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화 (53/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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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라이돈은 카델의 부재를 들켰다.

“인간을 어디로 빼돌린 거냐, 라이돈!”

“아하하! 글쎄요?”

환혹술을 5초 유지한 것치곤 꽤 오랜 시간을 끌었다. 멜피스 원로가 자신이 환혹술에 걸렸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더라면 더 많은 시간을 벌 수 있었겠지만, 그래도 해야 할 일은 전부 마친 셈이다.

카델의 신선한 계획이 원로의 혈압 상승에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진 라이돈. 여섯 마리가 된 얼음 거인과 요정족 전사들이 그를 포위하고 있었으나, 라이돈은 전혀 주눅 든 기색이 아니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분노의 한계치에 다다른 멜피스를 향해 어깨를 으쓱했다.

“다들 왜 나만 보면 이렇게 화를 내는지 모르겠어. 인간을 놓친 건 내가 아니라 그쪽의 무능한 전력 탓이잖아요? 만약 나였다면 코앞에서 목표물을 놓치는 일 따윈 없었을 텐데! 하하!”

“어차피 그 인간은 숲을 빠져나갈 수 없다! 쓸데없는 곳에 힘 빼게 하지 말고 장난은 이쯤에서―”

“아아, 몰라요, 몰라. 재미없어졌어.”

멜피스의 말을 무시한 라이돈이 휙 뒤를 돌아 그대로 걸어 나갔다. 앞을 막고 있던 요정족 전사들이 라이돈을 따라 주춤주춤 물러났다. 덕분에 생겨난 길을 거침없이 나아가며, 라이돈이 설렁설렁 손을 흔들어 보였다.

“난 이제부터 낮잠이나 자러 갈래. 방해하면 에이든처럼 짝날개로 만들어 버릴 거니까, 다들 접근 금지야. 안녕!”

멜피스의 찢어지는 고함과 함께, 라이돈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숲을 울렸다.

느리게 움직이는 눈꺼풀을 따라 요동치는 황금빛 눈동자가 사라지고 드러나기를 반복했다. 숲을 가로막은 장막을 응시하던 반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였다.

“단장이…….”

호칭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힘에 겹다는 듯, 다문 입술 아래로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반은 깊게 숨을 골랐다. 그의 눈 안으로 장막 아래 힘없이 주저앉은 루멘이 들어찼다.

“단장이 저 숲에 남겨진 건…… 나 때문이지?”

카델의 환상을 봤다. 그가 평소와는 다른,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말과 행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어렴풋이 인지하고 있었다.

‘요즘 루멘 때문에 둘만 있는 시간이 줄었잖아. 어차피 숲 초입만 조금 돌아다니는 거니까, 같이 움직일래?’

뭔가 이상하다는 자각은 있었다. 하지만 굳이 그 의심을 들춰내진 않았다.

‘네 옆에 있으면 안심이 돼, 반.’

좋았으니까. 카델이 하는 말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부드럽게 닿아 오는 손길이 좋았으니까.

즐겼다. 멍청하게도.

‘계속 이렇게 걷고 싶다. 넌 어때?’

카델의 시선은 무언가를 갈구하는 듯했고, 그가 갈구하는 것이 어쩌면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한 순간. 풀어선 안 될 긴장을 풀고 카델의 위로 제 욕망을 드리웠던 그 순간.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꿈도 꾸지 않고 새까만 어둠 속을 방황하다 간신히 눈을 떴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그리도 자신을 애태우던 카델이 아닌. 세상이라도 잃은 듯 공허한 눈을 한 루멘.

“내가 지키지 못한 거야. 내가…… 대장을 데리고 나왔어야 하는 건데. 그러지 못했다. 미안하게 됐군.”

그답지 않게 자조적인 목소리였다. 하지만 반은 그의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의 잘못을 인정할 생각도 없었다. 카델은 멍청하게 의식을 잃은 부하를 구하기 위해 이 위험한 숲에 다시금 몸을 던졌고, 이것이 그 결과였다.

카델이 숲에 갇힌 건 전부 자신의 탓이었다. 전부 자신의 책임이었다. 지금 저 안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카델은 뭘 하고 있을까?

카델은, 카델은 살아 있을까?

둔탁한 심장의 고동이 불길했다. 할 수만 있다면 이대로 심장을 꺼내 바닥에 던져 버리고 싶었다. 살아 있을까, 라니. 그딴 생각 따위 하고 싶지 않았고, 그딴 생각으로 불안해하는 것조차 불쾌했다.

자신은 멍청하고 나약했으나, 카델은 그렇지 않다. 희생적이고 돌발적인 면이 있기는 해도, 본인의 목숨을 쉽게 내다 버리는 인간은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할 수 있는 최선을 행한다. 카델이 루멘과 자신을 장막 밖으로 도망 보낸 뒤 홀로 남았다면,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살아남을 자신이 있다는 것. 그의 자신감은 언제나 정확했다.

“나한테 사과할 시간에 장막부터 부숴 보지 그래. 멀쩡히 살아 있는 단장 초상 치르는 짓은 그만두고.”

“……내 검이 안 보이나 봐.”

루멘이 땅바닥에 꽂힌 검을 턱짓했다. 검집 밖으로 빠져나온 꼴을 본 적이 없는 검이었다. 얼마나 귀한 검인가 싶었는데. 처음으로 본 루멘의 검은 듬성듬성 이가 빠져 볼품없이 무뎌진 모습이었다.

그러나 반은 그것을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대검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대검을 휘감은 붕대를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최대한 덤덤하게 말했다.

“부러지지도 않았잖아. 부러질 때까지 쳐보지도 않고 벌써 포기한 거냐? 곱게 자란 귀족이라 그런지 단념이 빠르군. 단장의 목숨을 판매 종료된 한정판 디저트 정도로 여겨 주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정말 미안하다면 좀 더 필사적으로 매달려 보라고.”

반은 숨 쉬듯 자연스럽게 루멘을 도발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고, 단장의 관심을 나눠 받는 것도 마뜩잖았지만, 루멘의 능력만큼은 인정하고 있다. 그러니 저렇게 실 끊어진 꼭두각시처럼 널브러진 쪽보다 카델을 구하는 데 힘을 보태 주는 쪽이 낫다.

그런 그의 속내를 알아채기라도 한 듯, 내내 죽은 것처럼 표정 하나 없던 루멘이 헛웃음을 뱉었다. 잠시 막연한 표정으로 바닥에 꽂힌 검을 바라보던 그가, 이내 손잡이를 움켜쥐며 평소처럼 빈정거렸다.

“내 검이 부러지면 요정족은 누가 죽여? 희생은 저렴해 보이는 네 검이 해라. 큰소리쳤으니 장막은 확실하게 부숴 주겠지. 마녀 때처럼 목 하나 베어 내지 못할 위력은 아닐 거라 믿는다.”

“내 검은 단장이 선물해 준 귀한 대검이야. 네 얄팍한 장검과는 비교도 안 되는 퀄리티라고.”

무의미한 말싸움을 이어 가며, 반은 풀어낸 붕대를 오른팔에 감아 고정시켰다. 묵직한 대검을 한 손으로 움켜쥔 그가 깊게 숨을 고르고.

전신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붉은 오라와 함께, 그의 눈동자 또한 붉게 물들었다.

세상에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탑은 없고, 영원히 마모되지 않는 바위는 없으며, 마찬가지로 영원히 유지되는 마법 따위도 없다. 반은 눈앞의 건방진 장막을 향해 살벌한 눈빛을 번뜩였다.

“다치기 싫으면 비켜라, 루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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