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화 (5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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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계가 닫혔다.

카델은 뻗었던 팔을 천천히 내렸다. 장막의 바깥은 흐릿하게 일그러져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자신이 날려 보낸 루멘과 반이 안전하게 탈출했다는 것은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다.

그걸로 됐다. 충분하다. 그 둘만 살릴 수 있다면, 자신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

‘와. 이제 어떡하지?’

—없을 리가 없다.

결계는 닫혔으나 카델은 뜀박질을 멈추지 않았다. 혹시 모르잖은가. 결계가 겉만 번지르르하고 실속이 없어서, 조금만 힘을 주어도 쉽게 무너질지.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런 행복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애초에 카델은 남은 마력이 없을뿐더러 몸 상태 또한 최악이었다. 제대로 된 주먹질도 할 수 없는데 장막에 손상을 입힐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는 골이 울릴 정도로 시린 한기가 끼쳐 오는 장막의 앞에서 마른세수를 했다. 그렇게 착잡한 심정을 갈무리하며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려던 찰나.

“아하하! 바로 공격해 올 줄 알았는데 결계라니! 이건 예상 못 했네. 좀 과한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요정족이 곧장 공격하리라 예상하여 공중에서 그들을 엄호하고 있던 라이돈이 카델의 곁으로 내려왔다. 요정치곤 과하게 큰 신장이 만들어 낸 그림자가 카델의 몸통을 모조리 먹어 치우며 다가왔다.

“꼼짝없이 원로들이랑 대면하게 생겼잖아. 어떡하지? 어떡한담. 어떡할까, 카델?”

라이돈의 입꼬리가 시원스럽게 올라갔다.

“원로들한테 변명해 볼래? 에이든의 날개를 자른 건 네 일행이고, 그 일행은 이미 도망쳤다고. 난 아무 죄도 없이 남겨진 것뿐이니 못되게 굴지 마세요…… 해 볼래? 카델은 귀여우니까 먹혀들지도 몰라.”

카델은 실실 웃는 라이돈의 낯짝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집요한 시선을 따라 라이돈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나가고 싶어. 죽도록 나가고 싶다. 이 정도로 간절하다면…… 그 방법을 써먹어 봐도 괜찮은 거 아닐까?’

그 방법이란, 라이돈에게 게임을 제안하기 전, 카델이 생각해 두었던 무수한 계획 중 하나였다. 우선순위가 가장 낮았던 계획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우선순위 따위를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현재, 자신의 목숨은 순전히 라이돈에게 달려 있다. 억울해도 어쩔 수 없었다. 이 숲에서 자신을 요정족으로부터 지켜 줄 만한 인물은 라이돈뿐이었고, 라이돈의 가벼운 변덕이 치명적인 죽음이 되어 되돌아올 수도 있었다.

그러니 이곳에서 확실하게 목숨을 붙들고 싶다면, 이 방법밖엔 없지 않겠냐고. 스스로를 설득시킨 카델이 마른침을 삼켰다.

“뭐, 어찌 됐든 일단 내 옆에만 붙어 있으면 죽는 일은 없…….”

그리고 냅다 라이돈의 멱살을 잡아 끌어당겼다. 거의 없다시피 한 악력임에도 라이돈은 꽤 순순히 끌려와 주었다.

붉은 눈동자 위로 호기심과 흥미가 스쳤다. 딱 그 정도의 감정. 카델은 그 감정을 마주하며, 비장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나랑 나가자.”

“응?”

“나랑 같이, 이 지긋지긋한 숲을 빠져나가자고.”

막상 입 밖으로 뱉으니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미친 소리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최선이었다.

확실한 아군이 없는 한 이 숲을 무사히 빠져나간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에게는 요정족과 맞서 싸울 힘도, 그들을 설득해 볼 카드도 없었으니. 유일한 가능성이라곤 오로지 라이돈, 태생 S급의 능력을 갖춘 그가 영입 가능한 기사라는 사실 하나뿐.

그러니 카델은 그를 영입시켜야 했다. 그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어야 했다. 라이돈은 이곳을 빠져나갈 최선의 패이자 최고의 장기 말. 살기 위해선, 손에 넣어야만 하는 존재였다.

“……카델은 정말 재밌네. 하는 행동도, 하는 짓도. 너무 내 취향이라 무서울 정도야.”

“여길 나가고 싶지 않아? 지루하잖아. 재밌어지고 싶잖아. 평생 여기 갇혀서는 영원히 즐거워질 수 없어. 그건 누구보다 네가 제일 잘 알지 않아?”

“으음, 안됐지만 그게 그렇게 쉬운 얘기가 아니라서…….”

“알아. 봉인이 걸려 있잖아? 그 봉인, 내가 풀어 줄게. 풀어 줄 수 있어.”

이 발언만큼은 가볍게 넘길 수 없었는지, 내내 여유롭던 라이돈의 눈가가 움찔 떨렸다. 대체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카델은 설명해 줄 생각이 없었다. 해 봤자 이해도 못 할 테니. 그는 처음으로 당혹감을 드러낸 라이돈의 멱살을 더욱 꽉 붙들며 필사적으로 설득했다.

“바다를 본 적은 있어? 이런 어두침침한 숲에 맛있는 음식이 있기는 해? 유희라곤 가끔 오는 인간들 괴롭히는 짓뿐이지? 그딴 형편없는 사이코패스로 살다가 삶을 마감하는 게 좋아? 그런 걸 원해?”

“아니, 아무리 그래도 난 입장이…….”

“이럴 때만 순진하게 굴지 마! 너도 원하잖아.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잖아! 이 좁은 숲속에 갇혀서 일생을 보내야 한다는 운명이 불합리하다고 느끼지 않아? 바깥에는 네가 경험해 보지 못한 즐거운 것들이 가득하다고. 한 발만 뻗으면 그걸 누릴 수 있는데, 정말 그렇게 쉽게 포기해 버릴 거야?”

그답지 않게 머뭇거리는 라이돈의 태도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카델은 바로 옆에 있는 장막을 내리치며, 라이돈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네게 세계를 보여 줄게, 라이돈.”

라이돈의 눈빛이 세차게 흔들렸다. 동요하는 시선이 카델의 얼굴 위에서 어지럽게 흩어졌다.

“세계…….”

“난 할 수 있어. 널 제한하는 그 갑갑한 봉인을 풀고, 네가 바깥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만드는 거. 그거, 나만 할 수 있는 미친 짓이라고. 그러니까―”

나와 함께 이곳을 탈출하자. 그리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 성스러운 핀하이의 대지를 더럽힌 죄인이여. 축복받지 못한 피로써 그 무거운 죗값을 치르라.

카델의 머릿속을 타고,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묵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쿵. 쿵. 쿵.

동시에 땅에 닿는 규칙적인 무게감을 따라 대기가 진동했다. 카델은 낯선 목소리가 메아리치는 머리를 감싸 쥔 채 주위를 경계했고, 라이돈은 그런 카델을 당겨 자신의 뒤로 숨겼다.

“일단 물러나 있어, 카델. 원로들은 나도 상대하기 버거워서.”

드디어 원로들이 등장했단 말인가. 그렇다면 메아리치는 목소리 또한 그들의 술수일 테다.

‘그럼 이 울림은? 이것도 원로들이 만들어 낸 건가?’

그럴 리 없다. 기껏해야 인간형이 최대인 요정족이 움직인다고 이 정도 진동을 끌어낼 수는 없었다.

카델은 라이돈의 뒤에 몸을 숨긴 채 그의 어깨 위로 조심스레 고개를 빼 들었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이런 미친…….”

족히 열 마리는 되어 보이는 얼음 거인 군단. 옆에 난 고목보다 높게 솟은 얼음 거인이 질서정연하게 무리 지은 모습이었다. 거인은 골렘에 가까운 생김새였으나, 몸체를 이루고 있는 것은 돌이 아닌 얼음. 단단하게 깎인 얼음 조각이 멀리서부터 어마어마한 한기를 내뿜으며 진격하는 중이었다.

카델은 자신의 호흡을 따라 흩어지는 뿌연 입김을 발견하곤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제정신인가? 얼음 거인은 8성 마법사도 한두 마리 소환하는 게 한계야. 그걸 열 마리나……. 원로란 놈은 대체 얼마나 강한 거야?’

등허리를 타고 오르는 소름과 함께, 카델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이 건방진 요정이 아니었다면. 이 삶은 오늘로써 막을 내렸을 것이라는 걸.

“그 인간을 내놓아라, 라이돈.”

그리고 존재감 넘치는 거인 군단의 최전방. 얼음 거인만큼이나 거대한 위압감을 풍기는 핀하이족의 원로가 그곳에 있었다.

인간의 모습을 한 원로는 예쁘장한 날개와는 정반대의 외형을 가지고 있었는데, 울룩불룩 도드라진 근육과 깊은 주름이 만들어 낸 험상궂은 인상은 그를 요정족보단 어딘가의 무림 고수처럼 보이게 했다. 라이돈은 그의 등장을 환영하듯 싱긋 웃으며 말했다.

“으응, 싫어요.”

앙탈에 가까운 대답. 원로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험상궂은 인상에 험상궂은 표정이 더해지니 살벌하기까지 한 분위기가 흘렀으나, 라이돈은 개의치 않고 길게 눈을 휘었다.

“제 인간이에요, 멜피스 님. 아무도 건들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자는 숲의 침입자이자 동족을 해친 죄인이다. 당장 내놓지 않으면―”

“싫어요. 제 인간이라니까요? 다들 여긴 왜 온 거예요? 얜 내 건데, 소중한 남의 걸 빼앗으려고 여기까지 찾아온 거예요? 굳이? 왜? 너무 심심해서? 아니면…….”

라이돈의 시선이 전방의 원로와 그 뒤의 얼음 거인, 그리고 골고루 분포된 요정족 전사들을 훑어 내렸다. 빠르게 그들의 진형을 파악한 라이돈이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흘러내린 머리칼 사이로 번뜩이는 눈빛이 형형했다.

“내 손에 죽고 싶어서?”

일순, 원로 멜피스의 이마에 핏줄이 돋았다.

“라이돈! 건방 떨지 말거라!”

“아하하! 싫어요, 싫어. 절대 안 줄 거니까 헛수고하지 말고 돌아가지 그래요?”

“요정 왕의 후예라는 네 위치를 자각하거라!”

멜피스의 윽박에 라이돈이 지겹다는 듯 혀를 빼물었다. 명백한 무시였다. 그에 멜피스는 더욱 대로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네가 지키려는 인간은 우리의 동족을 해쳤다. 요정족의 긍지를 해쳤단 말이다! 요정 왕의 후예라면 그에 마땅한 도리를 지키거라!”

“흐응, 에이든 날개 말이에요? 그건 그렇게 쉽게 긍지를 잘린 에이든 쪽이 멍청한 거 아닌가.”

“라이돈!”

“네, 멜피스 님.”

그의 표정에선 당장 귀를 후벼 파도 이상하지 않을 따분함이 가득했다. 라이돈은 시끄러운 멜피스 대신, 그 너머의 전사들을 살폈다.

‘중급 전사가 열, 상급 전사가 다섯인가. 많기도 하지. 에이든 녀석, 대체 얘기를 얼마나 불린 거야?’

라이돈은 지금쯤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을 에이든을 향한 저주를 중얼거리며 다시 멜피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붉어진 얼굴.

“할아버지, 그냥 봐주면 안 될까? 옛날엔 내가 뭘 해도 봐줬잖아. 이번에도 그냥…… 투정 정도로 받아들여 보는 건?”

“넌 더 이상 철없는 꼬마가 아니다, 라이돈. 네겐 요정 왕의 자리를 물려받아야 한다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 있죠! 하하! 그게 이 일이랑 무슨 연관이 있다는 거야? 자꾸 그렇게 내 신분을 자각시키지 마요, 멜피스 님!”

라이돈의 눈 위로 이채가 스쳤다. 신경질적으로 웃어젖힌 그가 불시에 팔을 뻗었다.

예고 없이 날아가는 공격. 창보단 전봇대에 가까운 두께의 얼음 조각이 허공을 가르고. 누군가 막아 볼 새도 없이, 우뚝 서 있던 얼음 거인의 머리통이 꿰뚫렸다.

얼음을 꿰뚫은 얼음. 그것은 일종의 경고이자, 힘의 우위를 가려 보자는 도발이기도 했다.

정확히 미간 사이에 처박힌 라이돈의 얼음 창이 까드득 소리를 내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공격에 당한 거인이 육중한 몸을 비틀거리고, 라이돈이 쫙 펼친 손끝에 힘을 주어 구부린 그 순간.

“기분 더럽게…….”

얼음 거인의 머리가 산산이 조각났다. 유리처럼 날카롭게 부서진 머리통의 파편이 그 아래에 자리하고 있던 전사들의 위로 흩뿌려졌다.

“네 이놈!”

반짝거리며 흩날리는 얼음 파편과 사라진 머리를 따라 빠르게 붕괴하는 거인의 몸체. 차가운 얼음 파편을 피하지 못한 전사들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순식간에 거인 한 마리를 해치운 압도적인 능력 차가 그들의 전의를 짓누르고 있었다.

라이돈은 굳어 버린 전사들과 목에 핏대를 세운 멜피스를 한 번씩 훑어보았다. 그리고 미련 없이 뒤를 돌았다.

몸을 돌린 곳에는, 대립하는 내내 숨소리 한 번 내지 않던 카델이 긴장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들었지? 지금 상황이 이래. 혹시 싸울 수 있겠어?”

“못 싸워. 누구 덕분에 마력이 한 방울도 안 남아서 말이지.”

“흐음, 그럼 어쩔 수 없네.”

유감이라는 듯 눈을 내리깐 라이돈. 반쯤 가려진 은밀한 시선이 카델을 향하고. 언제 목청 높여 다퉜냐는 듯,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은 그가 조용히 속삭였다.

“도망치자.”

동의를 구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멈춰 있는 카델의 허리를 와락 감싸 안고는, 그대로 비행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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