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47/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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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정족은 대체로 스펙이 낮고, 스펙이 높다고 해도 ‘봉인 해제’ 따위의 껄끄러운 개별 각성 단계가 존재해 사용하기 번거롭다. 하지만 그 부분을 제외하고도 카델이 요정족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가장 큰 이유가 있었는데, 바로 그들의 포지션이었다.

요정족 기사의 포지션은 대부분 ‘디버퍼(Debuffer)’였다. 적에게 성가신 디버프를 거는 데 특화된 캐릭터. 그것이 카델의 전략 스타일과 맞지 않았다. 그는 최강의 기사들이 가진 최강의 공격 스킬로 적을 섬멸하는 플레이 스타일을 추구했다.

자고로 싸움은 시원시원한 게 좋지. 적의 성질이나 긁어 대는 디버프 스킬 따위, PVP도 아닌데 필요 없지 않겠냐고.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씨발! 개씨발놈! 어떻게 이런 개빡치는 스킬을! 죽어 버려!’

카델은 하얗게 얼어붙은 땅 위에 화염 마법을 그야말로 쏟아붓고 있었다.

[대동토]. 딱히 스킬에 대한 정보가 없어도, 보이는 모든 땅이 새하얗게 얼어붙은 빙판이 된 참상을 맞닥뜨리면 대충 어떤 능력인지는 알아챌 수 있다.

‘대체 어디까지 얼려 버린 거야? 화접몽을 상대하고 온 뒤에 곧바로 이 정도 얼음 마법을 전개한다고? 태생 S급이 뭔데? 이렇게까지 사기여도 돼?’

상대할수록 버거운 놈이라는 게 실감 났다. 카델은 미끄러지지 않는 도주로를 확보하기 위해 계속해서 불길을 끌어내 얼음을 녹였고, 루멘은 양옆의 나무를 베어 넘어뜨리며 라이돈의 동선을 방해했다.

하지만 여전히 상황은 카델 쪽이 불리했다. 라이돈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이쪽을 잡아챌 수 있는 반면, 카델은 한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화접몽]의 술식을 해제했다고는 하나 빙판을 녹이기 위한 화염 마법과 속도를 증가시키는 바람 마법, 이 두 가지를 계속해서 유지하고 있으니.

심지어 이런 종류의 간단한 마법은 술식을 복잡하게 맺어 힘을 효율적으로 운용하기도 힘들다. 순전히 마력 싸움이었다.

“계속 도망만 칠 거야? 아까처럼 재미있는 마법을 보여 줘야지! 그 예쁜 나비들을 가두느라 얼마나 애썼는지 알아? 최고였다니까?”

라이돈은 제 앞길을 막고 쓰러지는 나무를 사뿐하게 회피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뒤도 안 돌아보고 길을 녹이기에만 급급한 카델의 모습이 섭섭하기라도 한 것인지, 관심을 받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었다.

물론 카델은 라이돈에게 관심을 줄 생각이 없었다.

“대장! 바깥이 보여!”

루멘의 외침에 땅에 고개를 처박다시피 하던 카델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움직이는 시선 너머로 환한 바깥 풍경이 드러나고 있었다.

‘정말이다. 얼마 남지 않았어!’

라이돈과의 거리는 아슬아슬하다. 녀석이 또다시 이상한 마법을 구사한다면 붙잡힐 확률이 높았으나, 바깥과의 거리 또한 육안으로 가늠할 수 있는 정도였다.

승산이 있다!

카델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머릿속으로 이곳을 탈출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 남은 마력, 라이돈의 반격을 포함한 여러 가지 변수 등이 쉴 틈 없이 휘몰아쳤다.

그리고 마침내, 카델은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딱 한 번. 이곳에서 딱 한 번만 더 라이돈의 발을 묶어 둘 수만 있다면.’

전원 무사 탈출도 꿈이 아니다. 카델의 눈빛이 비장하게 번뜩였다.

그는 사용하던 모든 마력을 회수한 뒤, 등을 돌려 라이돈을 마주했다.

‘가진 모든 마력을 짜내서라도 막아 내겠어.’

이곳이 바로 승패의 갈림길. 수단과 방법을 가릴 여유는 없었다.

또 어떤 재미있는 기술을 보여 줄까? 짧게 입맛을 다신 라이돈이 기대감이 어린 눈을 빛냈다.

아직 이름도 모르는 눈앞의 작은 인간에게는 자신을 향한 독기와 적의가 가득했다. 그 부정적인 감정은 필사적인 생존 욕구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 그저 ‘저 요정을 당장 찢어 죽이고 싶지만, 여건이 좋지 못하니 일단 참는다’는 느낌에 가까웠다. 그래서 더 재미있었다.

‘실컷 놀다 보니 출구가 가까워져 버렸네. 뭐…… 충분히 잡을 수 있지만. 조금만 더 가지고 놀아 볼까.’

바깥이라면 몰라도 이곳은 핀하이족의 영역이었다. 전설의 대정령 ‘핀하이’의 가호를 받는 숲.

이곳에 있는 한 라이돈은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 오만이 아니라 진실이었다.

숲의 가호를 받는 그는 원하는 만큼 상대를 농락할 수 있었고, 그의 변덕은 목숨을 몇 개라도 좌지우지할 힘을 가지게 된다. 그 편애가 기나긴 무료함의 원인이긴 했으나, 지금 같은 상황 속에선 꽤나 마음에 드는 장점이기도 했다.

“아직도 빠져나갈 생각이야? 슬슬 포기하지 그래. 난 널 보내 줄 생각이 전혀 없거든.”

히죽 웃으며 말하자 작은 인간이 코웃음을 쳤다. 상태 나쁜 겉모습과는 어울리지 않게 여유 넘치는 기세였다. 언제든 이 판을 뒤집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철 좀 들어, 이 새끼야. 너 그렇게 재미만 좇다가 세상에서 제일 지루하게 생을 마감하는 수가 있어.”

작은 인간은 도주를 멈췄다. [대동토]로 얼린 땅을 열심히 녹이는 귀여운 짓도 마찬가지였다. 대신 동료를 뒤편으로 보내고, 합장하듯 양손을 마주 댔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라이돈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 자세는…….’

그가 [대동토(大凍土)]를 시전할 때 행했던 자세였다. 마력의 흐름을 극대화하기 위한 자세. 의미 없이 따라 하는 걸까?

‘음, 설마 대동토를 따라 하진 않겠지.’

아무리 다속성 마법사라지만 불, 바람, 번개에 이어 얼음까지 사용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게다가 [대동토]를 사용하는 데에는 상당한 마력이 소모된다.

라이돈은 핀하이의 가호를 받는 상태이기에 마력 수급이 원활했지만, 작은 인간은 다르다. 지금껏 써 왔던 마법을 고려했을 때, 그만한 범위 공격을 짜낼 힘은 없을 것이다. 그리 판단한 라이돈이 추격을 멈추고 흥미로운 연극을 보듯 그를 주시했다.

그리고, 환희했다.

“알아줬으면 좋겠다. 우물 안 개구리가 그렇게 거만한 척 으스대는 거…… 굉장히 꼴사납다는 점.”

작은 인간의 몸체를 타고 불과 바람, 번개의 마력이 용솟음쳤다. 3가지 속성 마법의 동시 시전. 죽는 날까지 볼 일은 없으리라 여겼던 진풍경.

라이돈의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나선의 형태로 휘어 오른 세 줄기의 마력이 작은 인간의 뜻에 따라 일시에 퍼져 나갔다. 바람의 기세를 탄 불길이 기함할 만한 속도를 자랑하며 라이돈의 주위를 감쌌다. 범위를 벗어날 시도조차 불가능한 스피드. 싸한 예감을 느낀 라이돈이 하늘 높이 날아오르려 했으나, 기다렸다는 듯 위에서부터 벼락이 내리꽂혔다.

허공의 한 점으로부터 파생된 수십 가닥의 벼락이 원형의 불길과 입을 맞추며 빼곡하게 들어찼다. 마치 철창을 연상케 하는 형상.

그것은 불과 번개로 이루어진 거대한 새장이었다.

라이돈은 눈이 시릴 정도로 번쩍이는 벼락의 화려함과 일렁이는 불길의 강렬함, 뜨거운 열풍을 몰아오는 바람의 결을 느꼈다. 그는 인간이 만들어 낸 마법 속에 완벽하게 갇혀 있었다.

“……최고다.”

상상 속에서도 본 적 없는 마법이었다. 감히 가능하리라 꿈꿔 본 적조차 없는 광경이었다. 3속성 마법의 동시 시전으로 완성된, 그 누구도 경험해 보지 못했을 구속.

“최고야, 너……!”

라이돈은 세상에 단 하나뿐일 완벽한 새장 속에서 양팔을 길게 뻗어 올렸다. 황홀했다. 피부로 느껴지는 고통이 즐거웠다. 지긋지긋했던 권태로움을 이리도 쉽게 날려 보냈다는 데에 인간을 향한 경이로움까지 느껴졌다.

이런 인간을 죽여야 한다니.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싫을 정도였다.

‘……아니. 꼭 죽일 필요가 있나?’

작은 인간의 능력에 전율하던 라이돈이 일순 멈칫했다.

애초에 게임의 룰에는 작은 인간과 일행을 나가지 못하게 붙잡는다는 내용만 있을 뿐, 잡아서 죽인다는 말은 없었다.

그들이 죽는다면, 그것은 자신이 아니라 원로들의 의지일 테지. 그렇다면 원로들이 움직이기 전에 자신이 먼저 움직이면 된다. 이 흥미로운 인간을 아무도 오지 못하는 비밀 장소에 가두고, 몇 년이고 몇십 년이고 재미를 보면 된다. 그렇게 하면 되는 것이다!

뜻밖의 깨달음에 라이돈의 붉은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좋아. 그렇게 저 인간을 독점할 수 있다면……. 음?’

일순, 새로운 계획에 즐거워하던 그의 표정이 비틀렸다. 웃음기가 가득하던 얼굴에 짜증스러운 곤혹감이 번졌다.

그는 쫙 펼쳤던 팔을 천천히 내리며, 불쾌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왔나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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