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폭음.
찢어지고 무너지는 경쾌한 폭음에 집중력이 흐트러질 법도 하건만. 검을 쥔 루멘의 자세엔 한 치의 어긋남도 없었다. 루멘의 검기는 반처럼 넓게 휘몰아치며 화려하게 날뛰지 않았다. 대신 언제나 고요하게, 고요하고 차분하게 기척을 숨겼다.
한 면, 한 선, 그리고 한 점.
그의 검이 꿈꾸는 것은 삼라만상이 가리키는 궁극의 일섬. 단조롭고 명확한 하나의 점이었다.
‘월광쾌검.’
감았던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푸른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 안에 새겨진 것은 얼음벽을 양단하는 한 줄기의 기다란 섬광.
채재쟁!
빛의 잔상을 따라 한 박자 늦게 들려오는 날카로운 파열음. 그 거대한 파열음과 함께 얼음을 조각내는 균열이 번지기 시작했다.
‘아직 깔끔하게 양단하는 건 무리인가 보군.’
아쉽긴 했으나 최초의 목적은 달성했다. 한숨과 함께 납검한 루멘이 땅바닥에 버려두었던 반을 둘러업으며 카델을 불렀다.
“대장.”
“아악! 왜 안 죽냐고!”
“그만하고 가자.”
신경질적으로 소리치는 카델을 끌어내기 위해 고개를 돌리자, 기술을 준비하는 내내 정신 사납게 울려 퍼졌던 폭음의 정체가 드러났다.
공중을 가득 메운 불나비. 나풀거리며 모여든 수십 마리의 불나비가 라이돈의 뒤를 집요하게 쫓고 있었다. 기어코 그의 몸을 건드린 나비는 그 즉시 폭발했고, 그 폭발에 휩쓸린 또 다른 나비가 폭발. 질릴 정도로 끈질긴 연쇄 폭발의 현장이었다.
심지어 폭발을 일으킨 나비는 떨어진 불씨로부터 재생되어 날갯짓을 재개하기까지 했다. 언제 이런 마법을 익혀 온 것인지.
감탄이 나올 정도였으나, 그것은 그 폭발을 끊임없이 막아 내고 있는 라이돈의 실력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유롭게 공중을 비행하며 별 어려움 없이 얼음 장막을 펼쳐 공격을 방어했다. 원거리 공격을 퍼부어 나비를 일망타진하기도 했다.
웬만해선 죽도 밥도 못 되고 폭발에 휩쓸리는 것이 전부일 공격이었다. 그런데 그걸 저토록 현란하게 막아 내고 있으니. 카델이 발을 구르며 억울해할 만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공격이 먹힐 때까지 라이돈을 상대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루멘은 카델의 옷자락을 잡아끌며 재촉했다.
“포기해, 대장. 빨리 가자니까.”
“아오, 열받아 죽겠네.”
카델 또한 지금은 라이돈을 해치우는 것보다 그의 발을 묶어 시간을 버는 쪽이 훨씬 낫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당장 저 녀석을 찢어 죽이고 싶은 것도 사실이라서, 그는 불나비를 피하기 바쁜 라이돈을 향해 중지를 치켜올렸다. 욕이라도 해 줘야 속이 편해질 것 같았다.
“후, 됐어. 내가 저 마법으로 시간을 벌어 볼게. 마법을 유지하는 동안 숨 돌릴 만한 거리 정돈 벌릴 수 있을 거야.”
“마력은? 괜찮겠어?”
“말했잖아. 괜찮지 않으면 죽는다고.”
[화접몽]은 마력이 끊기지 않는 한 계속해서 재생하는 연쇄 폭발 마법이다. 사정거리 밖으로만 벗어나지 않는다면 마력은 계속해서 공급해 줄 수 있으니, 지금은 [화접몽]의 유지를 통해 최대한 도주 시간을 벌어 두어야 했다.
그들은 공격에 묶인 라이돈을 뒤로한 채 달아나기 시작했다. 루멘의 공격으로 완벽하게 파괴된 얼음벽의 파편이 잘그락 소리를 내며 밟혀 왔다.
‘그나저나, 해낼 거라고 믿긴 했지만 그 두꺼운 벽을 진짜 베어 버리다니. 역시 내가 아끼던 성능캐 답네. 비록 성격이…… 아니, 라이돈에 비하면 천사지.’
공감 능력 떨어지는 요정족을 상대하고 있자니 루멘의 재수 없음조차 귀여운 투정 정도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순기능이라고 해야 할까?
카델은 속으로나마 기특한 루멘을 칭찬하며 그의 어깨를 밀쳤다.
“네 원래 속도로 뛰어. 내 속도에 맞춰 줄 필요 없으니까.”
“이게 내 원래 속도야. 다 이 쓸모없이 무게만 나가는 놈 덕분이지.”
루멘은 보란 듯 반을 턱짓했으나, 카델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루멘의 속도와 지구력이라면 반을 업든 쌀 포대를 업든 자신보다는 훨씬 빨라야 했다.
‘어떻게 번 기횐데. 여기서 내가 짐이 될 순 없어.’
[화접몽]을 유지하는 데에는 많은 마력이 든다. 그러니 사정거리를 최대한으로 늘려 라이돈의 발을 오래 묶어 두기 위해서는, 이외의 마법으로 마력을 낭비해서는 안 됐다. 앞으로 몇 차례나 있을지 모를 충돌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그랬다. 최대한 마력을 아껴 둬야 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카델이었지만.
“지금부터 나한테 바람 마법을 걸 거야. 속도가 빨라질 테니 혼자 남겨지고 싶은 게 아니라면 제대로 따라와.”
“혼자 그렇게 가 버리겠다고? 너무한걸, 대장.”
“긴 다리 둬서 뭐 해? 이럴 때 쓰는 거지.”
모든 것은 자신의 욕심으로부터 비롯된 비극이었다. 그 책임을 루멘과 나누고 싶지 않았다. 카델은 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본인에게 [바람의 길]을 시전했다. 일종의 속도 증가 버프였다.
두 가지 마법을 유지하려니 아랫배에 바늘에 찔리는 것처럼 따끔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마력이 동나고 있다는 증거였다.
‘참아! 이 정도 고통도 못 참을 거면 그냥 자살해, 미친놈아.’
스스로를 채찍질한 그가 훨씬 빨라진 속도로 뜀박질에 박차를 가하고. 반의 무게는 핑계였던 것이 분명한 루멘 또한 금세 스피드를 올렸다.
‘화접몽의 사정거리는 아직 더 늘릴 수 있어. 이대로 빠져나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에이든이 먼저 동족을 불러온다는 가정도 빼 두어선 안 됐다. 물론 그 가정의 끝은 몰살 엔딩이었으나, 카델에게는 그런 꿈도 희망도 없는 엔딩 속에서도 남은 부하들을 구해야 한다는 의무가 있었다.
‘한쪽 날개가 잘렸으니 빠르게 도착할 순 없을 거다. ……하지만 가는 길에 우연히 동족을 만났을 수는 있지. 그렇게 되면 최악인데.’
최고의 시나리오는 에이든이 동족을 불러오기 전, 라이돈이 [화접몽]에 시달리는 동안 숲을 빠져나가는 것.
하지만 억지로 속력을 높였음에도 출구는 멀기만 했다.
“큭…….”
[화접몽]에 마력을 쏟아 유지시키는 만큼 복통도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카델은 입술을 꽉 깨물며 간신히 신음을 참아 냈다. 힘든 티를 냈다간 루멘이 다시 속도를 늦출 것이 뻔했다.
그는 고통을 억누르며 점점 흐릿해지는 [화접몽]의 잔류 마력에 힘을 불어 넣었다. 그러나 뒤틀리는 복통을 감내하며 마력을 쏟은 보람도 없이.
핑! 핑!
가느다란 파공음과 함께, 몸을 끌어당기는 강한 악력이 느껴졌다.
“윽!”
“괴물이 따로 없군. 그걸 뚫고 왔다고?”
빠르게 카델을 잡아끈 루멘이 질린 표정으로 뒤편을 응시했다. 방금까지 카델이 서 있던 바닥에는 두 개의 얼음 창이 처박혀 있었다.
한기가 피어오르는 얼음 창을 바라보는 카델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 갔다.
설마.
아직 [화접몽]의 술식은 유지되고 있다. 그걸 뚫고 추격할 방법은 없을 텐데.
긴장하며 뒤를 돌자, 아직 보여선 안 될 거대한 인형 하나가 시야 가득 들어찼다.
라이돈이었다. 마구잡이로 헝클어진 머리칼과 하얀 뺨 곳곳에 자리 잡은 그을음과 생채기, 날개를 포함한 전신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연기. 엉망진창인 모습이기에 더욱 섬뜩하게 느껴지는, 태양처럼 밝고 환한 미소를 머금은 건방진 낯짝.
찰나에 가까운 시간 동안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 마주침을 놓치지 않고 부드럽게 눈웃음을 지은 라이돈이, 갑작스레 비행을 멈췄다.
우뚝 멈춰 선 그가 양손을 합장하듯 맞댔다. 그러자 라이돈의 전신을 타고 희뿌연 한기가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그 시린 기운에 [화접몽]의 여파로 뜨끈하게 피어오르던 열기의 기세가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아직 거리가 꽤 벌어져 있음에도 그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한기는 카델 일행에게까지 선명하게 흘러들 정도였다.
대체 무슨 기술을 꺼낼 생각인가. 질린 경계심이 자리 잡은 날 선 표정.
라이돈은 그런 카델의 예민한 얼굴을 감상하며, 조용히 읊조렸다.
“대동토(大凍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