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45/521)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으로는 라이돈을 상대할 수 없다. 격한 싸움 속에서 간신히 반을 확보하더라도, 숲을 빠져나가는 데까지 셀 수 없이 많은 장애물이 생겨나겠지.

그러니 이쪽도 생각의 수준을 라이돈에게 맞춰 주는 수밖에.

“야, 라이돈.”

카델은 시선을 끌기 위해 모아 두었던 전류를 회수했다. 그리고 감옥에 갇힌 에이든을 자신의 앞으로 이동시켰다.

라이돈의 시선이 갇혀 있는 에이든을 향하자, 카델은 그를 가둔 바람을 어루만지듯 쓰다듬으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게임 하나 하자.”

“게임?”

“지금 네 친구를 놓아줄게.”

라이돈이 고개를 갸웃했다. 딱히 그럴 필요도, 이유도 없다는 표정이었다.

“대신 놓아준 네 친구는 한쪽 잘린 날개로 열심히 날아서 너희 동족에게 도움을 청해야 해. 강한 침입자가 날 해쳤으니 죽여 주세요, 하고.”

“……음?”

그건 게임이 아니라 그냥 목숨을 포기한 거 아니야? 라이돈의 의아한 얼굴은 그리 묻는 듯했다.

당연하게도, 그럴 생각은 없었다.

카델은 고개를 삐딱하게 세운 채 라이돈을 마주 보았다.

“그게 게임의 제한 시간이야. 네 친구가 무사히 도움을 요청하고, 원군이 찾아오는 시간까지. 제한 시간이 끝나면…… 뭐, 높은 확률로 난 죽겠지.”

“그 시간 동안 해야 하는 건?”

“난 도망쳐. 저기 뒤에 있는 내 귀여운 부하 둘을 데리고.”

라이돈의 눈빛에 흥미가 떠올랐다. 그는 카델을 향해 완전히 몸을 돌렸다.

“호오. 그걸 쫓는 역할은? 당연히 나?”

“당연히 너. 대신 규칙이 있어. 쫓는 동안 넌 절대 우릴 죽이면 안 돼. 우리도 마찬가지야. 도망가는 에이든은 절대 건들지 않아.”

“죽이면 안 된다고?”

“어차피 제한 시간이 끝나면 그쪽 원군이 올 테니 우린 다 죽게 돼 있어. 넌 그 시간이 끝날 때까지 우릴 잡아 두거나, 숲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면 돼. 이쪽은 제한 시간이 끝나기 전까지 널 피해서 숲을 빠져나가면 되는 거고. 아, 그리고 환영 마법도 금지야. 정직하게 공격 마법으로만 대결하자고. 어때. 재밌겠지?”

피해는 최소한으로, 생존 확률은 최대한으로.

이 정신 나간 요정을 상대로 그런 효율을 뽑아내려면, 이 정도 정신 나간 도박쯤은 감행해 줘야 했다. 재미에 대한 광적인 집착과 선천적인 변덕을 이용한 제안. 만약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정면충돌을 피할 수 없으리라.

그리 판단한 카델이 긴장감을 숨긴 채 라이돈을 응시했다. 라이돈은 게임의 룰에 대해 생각하는 듯 잠시 눈을 굴리더니, 이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재밌겠는데!”

“그래? 그럼―”

“대신, 나도 규칙 하나 추가할래.”

“……뭔데?”

라이돈의 기다란 손가락이 반이 묶인 나무를 가리켰다.

“도망치는 동안 저 인간은 계속 잠들어 있을 거야. 그래야 더 필사적이지 않겠어?”

변태 같은 새끼. 카델은 이를 갈며 슬쩍 [바람 감옥]의 범위를 줄였다. 그러고는 압박감에 비명을 지르는 에이든을 하늘 위로 올렸다.

“좋아, 받아들이지. 10초 뒤에 시작한다. 넌 1분 뒤에 추격을 시작해.”

“좋아!”

라이돈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루멘이 반을 묶은 넝쿨을 베어 냈다. 단숨에 그를 둘러업은 루멘이 카델의 옆으로 이동했다.

“대장. 괜찮겠어?”

미묘한 표정이었다. 카델의 제안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따르지 않을 생각은 없다는, 그런 표정.

카델은 루멘의 팔을 잡고 라이돈으로부터 조금씩 물러섰다.

“그런 건 상관없어. 못 하면 죽으니까.”

실패 시의 페널티 따위야 한결같았다. 처음 빙의했을 때의 튜토리얼도, 마녀와의 싸움도 전부 똑같았다.

해내지 못하면 죽는다. 죽고 싶지 않다면, 무조건 해내야 했다.

카델의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한번 뛰어 보자고.”

확률은 50대 50. 그 누구도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

‘반을 업은 루멘과 내가 따로 움직인다면 타깃이 분산되니 한쪽은 안전하게 도망칠 수 있을지도 몰라. 하는 거로 봐선 라이돈은 내 쪽을 노릴 테니, 반과 루멘만큼은 안전을 보장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라이돈의 성격은 예측 불허다. 환각에 빠졌을 때도 싸우는 대신 괴로워하는 얼굴을 보겠다며 반을 죽였던 놈이었으니. 이번에도 자신이 곤란해하는 꼴을 보겠다며 굳이 루멘과 반을 공격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게다가 이곳은 환혹의 숲 안이야. 녀석의 말대로 이곳에 있는 한 요정족의 마법은 무영창 즉시 시전. 공격 범위가 얼마나 될지도 모르는 데다 덫을 놓았을지도 모르니까. 섣불리 흩어졌다간 각개격파 당할 수도 있어.’

짧은 시간 동안 카델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나란히 달리고 있는 루멘을 향해 말했다.

“피치 못할 상황이 벌어지기 전까진 같이 움직이는 게 낫겠어. 떨어지지 마.”

루멘은 여전히 정신을 잃은 반을 업고 있었다. 빠른 뜀박질을 따라 반의 몸이 들썩였으나, 여전히 깨어날 기미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수면 마법이라도 걸어 둔 모양이었다.

“피치 못할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같이 움직여야지. 둘 중 하나라도 이 숲에 발이 묶이면 살아 나갈 수 없어.”

“그래도 만약…….”

“웃기지 마, 대장. 혹시라도 희생할 생각은 말라고. 내가 대장 대신 이 짜증 나는 놈을 선택해서 도망갈 거라는 말도 안 되는 기대도 하지 말고.”

루멘의 대답은 단호했다. 목소리만큼이나 단호한 눈빛에 카델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반대 상황이었대도 카델은 루멘의 희생을 원치 않았을 것이다. 받아들이지도 않았을 것이고.

‘지금은 무조건 일행 전원이 살아 나가는 걸 목표로 해야 해.’

슬슬 라이돈의 행동이 제약된 1분이 지났을 것이다. 이곳은 놈의 영역. 자칫 어설프게 대처했다간 늪에 빠진 사냥감처럼 그럴듯한 반항 한 번 못 하고 죽게 되리라.

“기척을 감지하는 건 네가 더 뛰어나니까 힘들더라도 계속 주변을 경계해 줘. 미안하지만 남은 마력이 얼마 없어서, 도망치는 내내 장막을 쳐 줄 힘은 없다.”

“난 그 자식이 뭘 날려도 피할 수 있어. 장막은 대장 몸에나 두르라고.”

참, 재수 없지만 믿음직한 놈이다.

카델은 양옆에 우거진 나무의 가지를 살폈다. 스쳐 가는 나무 사이로 듬성듬성 간격을 두고 묶인 검은색 천이 보였다. 저것은 카델이 반을 찾기 위해 다시 숲으로 진입했을 때, 로브를 찢어 일일이 남겨 둔 표식이었다. 저 표식만 따라간다면 출구를 찾는 일은 힘들지 않다.

‘환영 마법을 금지했으니 계속 똑같은 곳을 헤맬 위험도 없어. 방어만 제대로 한다면, 이곳을 벗어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며 언제든 방어할 수 있도록 마력을 끌어모으던 바로 그때였다.

쿠구구구—

그들의 앞으로, 맞은편 길을 완전히 차단하는 거대한 ‘얼음벽’이 솟아올랐다.

‘왔군!’

카델이 벽을 향해 곧장 화염구를 날렸다. 힘 있는 공격에도 얼음벽은 벽면이 움푹 팼을 뿐 무너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급히 속력을 늦춘 둘의 몸이 기울어졌다. 가로막힌 동선에 혀를 찬 카델이 빠르게 뒤를 돌았다.

그리고 그곳에는.

“찾아 버렸네!”

커다란 몸집만큼이나 길고 화려한 두 쌍의 날개를 펄럭이며, 이쪽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날아오는 라이돈이 있었다. 움직임을 따라 붉은 잔상을 남기는 안광. 그것을 발견한 카델이 작게 몸을 떨었다.

“소름 끼치는 새끼.”

예상보다 발견이 빠르다. 라이돈을 향해 양손을 쫙 펼친 카델이 새로운 속성, 번개의 마법을 시전했다.

손끝에서부터 흘러나온 수십 가닥의 전류가 전방으로 퍼져 나갔다. 얇은 전류가 순식간에 얽혀들며 그물처럼 변화했다. 적의 움직임을 제한하며 마비, 화상 따위의 디버프를 선사하는 성가신 스킬. [감전 그물].

라이돈은 공격을 피해 상승했고, 카델은 그를 따라 그물의 면적을 늘리며 외쳤다.

“샛길로 움직일 시간은 없어. 벽을 부숴!”

화염구로도 뚫리지 않는 두께다. 얼마 남지 않은 마력을 벽 하나 부수겠다고 낭비하는 짓은 할 수 없었다.

카델의 명령에 반을 아무렇게나 팽개친 루멘이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준비하는 것은 [월광쾌검(月光快劍)]. 아직 충분한 경지에 오르지 못해 완벽하게 기척을 죽이는 것까진 할 수 없었지만.

‘벽 부수는 데 기척을 숨길 필요는 없지.’

위력만으로 충분하다. 루멘은 카델에게 등을 맡긴 채, 발도술의 시동을 걸었다.

“다속성 마법사라는 거, 진짜 재밌구나!”

라이돈의 움직임을 쫓기 위해 [감전 그물]에 바람의 힘을 더했다. 자신의 비행 속도와 맞먹는 공속에 감탄한 라이돈이 호탕하게 웃으며 그물을 향해 거대한 얼음 구체를 날려 보냈다.

폭발력도, 파괴력도 없는 그저 거대하고 무거울 뿐인 얼음덩이. 하지만 전류로 엮은 그물을 추락시키기에는 더없이 적절했다.

얼음덩이의 무게를 버티지 못한 그물이 바닥으로 쑥 꺼졌다. 카델은 인상을 쓰며 마법을 해제했다.

“더럽게 짜증 나네, S급!”

하필이면 마법사라 더 성가셨다.

‘적어도 루멘이 벽을 부술 때까지는 시간을 벌어야 해.’

못 부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카델은 루멘을 믿고, 다시 이쪽을 향해 하강하는 라이돈을 노린 두 번째 마법을 준비했다.

‘제일 자신 있는 공격으로 간다. 제일 자신 있는…… 내 오리지널 스킬로.’

마밀과 함께했던 보름간의 수업 중, 가장 뜻깊은 수확이라고 할 수 있는 스킬. 그 기술을 터득했을 당시엔 너무나 기뻐서, 몇 날 며칠을 고민해 가며 새로운 이름도 붙였다. 물론 마밀은 겉멋만 든 실없는 이름이라고 비난했지만. 용병단 이름도 적린(赤鱗)인 판에 뭘 바라겠는가.

“실전에선 처음인데……. 떨리는군.”

마른침을 삼킨 카델의 입꼬리가 설핏 올라갔다. 그 은은한 미소에 화답하듯, 광적인 미소를 머금은 라이돈이 근접한 거리까지 날아들었다.

그리고 그의 커다란 손아귀가 카델의 얼굴을 집어삼킬 듯 우악스럽게 뻗쳐 오던 바로 그때.

“……음? 이건 또 뭐야?”

나비의 형상을 한 수십 개의 불덩이가 라이돈의 주변을 둘러쌌다. 반 뼘도 되지 않는 크기의 앙증맞은 나비. 잠시 당황하던 라이돈이 아무 생각 없이 살랑거리는 나비 한 마리를 건드리고. 그 모습을 확인한 카델은, 숲에 들어온 이래 가장 행복한 표정으로 라이돈을 비웃었다.

“어디 한번 시원하게 터져 봐!”

스킬의 이름은 [화접몽(火蝶夢)].

대외적으로 불릴 이름은 그랬고, 개인적으로 카델은 이 스킬을 ‘일단 예쁘게 만들어 본 연쇄 폭발 장치’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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