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42/521)

카델은 완전히 정신이 나가 있었다. 루멘은 난생처음 보는 카델의 살벌한 모습에 잠시 주춤했으나, 빠르게 이성을 되찾았다. 카델을 그곳으로 되돌아가게 해서는 안 된다. 상황을 이해하긴 힘들었으나 지금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만큼은 명확했다.

루멘은 잔뜩 날을 세운 카델을 향해 차분한 목소리를 냈다.

“대장. 정신 차려.”

“돕지 않겠다면 당장 눈앞에서 꺼져 버려.”

“그곳에 반은 없었어.”

“……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거기 있던 거라곤 비처럼 쏟아지는 얼음 마법뿐이었고, 대장은 그 범위 안으로 뛰어들고 있었다고.”

“마법……? 그게 무슨…….”

카델은 환각을 보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그러니 지금 그가 해야 할 일은, 자신의 대장을 환각 속에서 끌어내는 것.

“눈을 떠, 카델.”

루멘은 천천히 카델을 향해 다가갔다. 얼빠진 표정을 한 카델이 코피를 닦아 낸 손등을 천천히 늘어뜨렸다. 그는 혼란스러워 보였고,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으나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여긴 ‘환혹의 숲’이야, 대장. 대장이 보고 있던 건 전부 환영이었겠지. 그러니까 진정하고, 도망치지 마.”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지금의 카델은 조금만 잘못 다뤄도 곧장 부서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반이 죽었다니. 그 녀석이 죽은 환각을 본 것일까? 그 녀석이 죽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쉽게 침착함을 잃지 않던 카델이 이렇게까지 망가졌단 말인가?

기묘한 감정이 들어찼다.

분노 같기도 했고, 그보다 더 질척거리는 감정 같기도 했다. 쉽게 정의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느끼는 감정은 그리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카델이 한시라도 빨리 이성을 되찾는 것.

루멘이 바로 앞까지 다가가자, 그제야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카델의 시선이 움직였다.

“환영…이었다고? 전부……?”

“그래. 대장은 덫에 걸린 것뿐이야.”

“그럼…….”

카델이 천천히 손을 뻗어, 루멘의 옷깃을 꾹 움켜쥐었다. 손끝을 타고 가냘픈 떨림이 느껴졌다. 카델은 머뭇거리며 루멘을 올려다보았다. 적의와 혼란으로 가득했던 눈빛이 처연하게 젖어 들고 있었다. 그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반은, 반은 죽지 않은 거야……?”

불안과 초조, 한 점의 희망이 섞인 아슬아슬한 시선. 루멘은 부드러운 손길로 카델의 뺨을 감싸 쥐었다.

“죽지 않았어.”

그 짧은 대답 하나로 여태껏 간신히 유지하던 긴장이 풀린 것인지, 카델의 표정이 슬프게 일그러졌다. 떨리는 눈동자 위로 투명한 눈물이 고여 들었다.

울음을 참기 위해 필사적으로 악문 입술이 하얗게 질렸다. 루멘은 고개를 숙이려 하는 카델의 얼굴을 가볍게 당겨, 그대로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 엉망이 된 머리를 쓰다듬고, 잔뜩 힘이 들어간 어깨를 쓸어내렸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카델을 위로했다.

더 이상 우는 소리도, 흐느낌이 만들어 낸 떨림도 없었지만. 카델은 루멘의 품 안에 꽤 오랫동안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점은 많았어.”

숲의 초입과 외부의 경계선.

카델과 루멘은 숲을 빠져나가지도, 들어가지도 않은 애매한 위치를 차지한 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루멘은 평소대로 돌아온 카델의 침착한 눈빛을 마주하며 물었다.

“예를 들면?”

“첫 번째로 신호탄. 난 반이 신호탄을 쏘는 걸 보고 그쪽으로 이동한 거야. 하지만 넌 보지 못했다고 했잖아?”

“응. 계속 대장의 신호만 기다리다가 찾으러 갔던 거야.”

그렇다. 거기서부터 잘못된 것이었다.

‘신호탄을 확인한 타이밍과 시스템 창이 떠오른 타이밍이 똑같았어. 그때 내 주위에 그 찢어 죽일 날파리들이 있었던 거라면, 그곳에서부터 환각 마법을 걸었겠지.’

영입 가능한 기사를 알려 주는 시스템 창은 해당 기사가 가까이 있을 때만 알림을 준다. 그러니 결국 자신이 보았던 신호탄부터가 환각의 시작이었던 거다.

“그리고 반의 상처. 확실히 심각한 상처였지만, 평소의 반이었다면 발목이 한쪽 잘렸더라도 절대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을걸. 걘 그런 놈이거든.”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을 테니까. 어떻게든 혼자서 숲을 빠져나왔겠지.”

그 당시에는 상처 입은 반을 가짜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충분히 지원을 부를 만큼 끔찍한 상처였으니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평소의 반을 잘 생각해 본다면, 녀석은 자신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온몸을 베어 낸 전적이 있는 인물이었다. 탐색 시간이 10분을 채 넘기지 않았음에도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는 부분은 의심해 볼 만했다.

‘그리고 퀸의 붕대도 그래. 제대로 된 아이템이라면 분명 출혈 정도는 멈췄어야 했는데, 일반 붕대처럼 금세 피로 젖어 버렸지. 그 날파리들이 퀸의 붕대의 효능까지는 알 리 없으니까, 구현을 못 한 거야.’

생각하면 할수록 왜 알아채지 못했나 스스로를 꾸짖게 될 만큼 허점투성이였다.

‘씨발! 멍청한 것도 정도가 있지!’

주먹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만약 그때 루멘이 구하러 오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쏟아지는 얼음 창 속에 뛰어들어 처참한 최후를 맞게 됐을 것이다. 스스로의 멍청함에 치가 떨렸다.

하지만 계속 과거를 한탄하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자신과 함께 있던 반이 진짜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지만, 그럼에도 ‘진짜 반’은 여전히 나타나지 않고 있으니.

“반은 아직 숲 안쪽에 있는 거겠지?”

“그렇겠지. 그 녀석도 요정족에게 당했거나, 나처럼 대장을 찾아서 돌아다니고 있거나. 일단 화염구는 쏘아 올렸으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괴로운 기다림이었다. 카델은 주어진 시간 동안 최대한 많은 정보를 조합해 보기로 했다. 숲에 다시 들어간다면, 그들은 또 한 번 필연적으로 요정족을 상대해야 할 테니.

‘그 날파리.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분명 라이돈이었어.’

라이돈. ‘환혹의 숲’ 출신 요정족 중 가장 성능이 뛰어나다고 평가되는 태생 S급 기사.

……환영으로 만들어 낸 반을 죽였던 놈.

그 녀석에게 놀아났던 상황을 되새기기만 해도 열이 바짝 올랐다. 카델은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환혹 마법에 걸리지 않을 방법이 있을까?”

“보통 무인들은 본인의 몸에 직접 상처를 내. 고통을 느낌으로써 현실로 돌아오는 거지.”

“나쁘지 않네. 하지만 그것도 자기가 환각을 보고 있다는 판단이 들어야 할 수 있는 거잖아. 만약 좀 전의 나처럼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글쎄…….”

만약 [퀸의 붕대]처럼 이쪽만 알고 있는 특수한 효과를 가진 아이템이 있다면 비교적 쉽게 현실과 환각을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재의 카델에겐 그런 물건이 없었다. 굳이 찾아보자면 마밀이 준 [인연의 종이] 정도? 하지만 그건 값이 비쌀 뿐이지 충분히 흔한 아이템이었다. 요정족이 모르리란 보장이 없다.

초조함에 다리를 떨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루멘이 가볍게 대꾸했다.

“그래도 이쪽은 둘이니까. 둘 중 한 명 정도는 구분할 수 있지 않겠어?”

“……그런가.”

“계속 고민해 봤자 이 짧은 시간 안에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둘 순 없어. 무리하지 말고 지금은 단순한 목표만 생각하자. 반 헤르도스를 구하고 싶잖아, 대장.”

“응.”

“그럼 그것만 생각해. 이상한 기운을 감지하는 건 내가 자신 있으니까, 그쪽은 맡겨 두고.”

카델은 맞은편에 앉은 루멘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좀 전까지 그 난리를 피우며 죽일 기세로 공격을 날려 댔음에도 루멘의 태도는 한결같았다. 오히려 불안해하는 자신을 달래 주기까지 하고 있으니.

‘멋진 모습 보여 주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호감도가 10은 깎였겠네.’

실없는 생각을 하자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다. 카델은 고개를 끄덕이며 현실 구분은 루멘에게 맡겨 두기로 했다.

지금 자신이 할 일은, 가장 껄끄러운 존재인 ‘라이돈’을 공략할 만한 방법을 찾아내는 것. 그리고 반을 찾아낼 계획을 세우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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