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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는 반의 시점도, 카델의 시점도 아닌 관찰자의 시점이었다. 카델은 둘을 비추는 카메라가 된 것처럼 자유롭게 움직이며 그들의 모습을 담아낼 수 있었다.
“우리 서로의 목숨을 구했네!”
그들은 산 아래로 보이는 민가를 향해 하산하는 중이었다. 둘 모두 상태는 끔찍하다 못해 처참할 정도였으나, 카델은 반에게 부축받는 와중에도 목청만큼은 팔팔했다.
“난 구한 기억 없어.”
“난 있는데? 두 번이나.”
“……시끄러워.”
얼버무리는 반의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카델은 그의 어깨에 올라간 팔을 움직여 반의 뺨을 꼬집었다. 반의 신경질적인 반응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살아나면 말 예쁘게 하기로 했잖아! 빨리 살갑게 굴어 봐, 반.”
“…….”
“오, 아예 말을 말겠다?”
“쓸데없이 기운 빼지 마.”
상처로 엉망이 된 얼굴이었으나 반의 얼굴이 새빨개졌음은 금세 알아챌 수 있었다. 카델의 웃음소리가 커질수록 표정 또한 불퉁해졌다. 그렇게 눈치도 없이 한참을 웃어 대던 카델은, 욱신거리는 복부를 감싸 안은 채 불쑥 말했다.
“너, 나랑 같이 여행할래?”
“……여행?”
“여행하자! 응?”
예고도 없이 막무가내로 들이받는 제안. 그는 반의 황당한 얼굴에 대고 아이처럼 눈을 빛냈다.
“나랑 여행하면 분명 좋은 일이 생길 거야.”
“피곤한 일이 생기겠지.”
“아니! 난 언젠가 천하를 내 검 아래에 둘 천재 마법사거든! 농담 아니야, 무조건 그렇게 될 거라고. 그러니까…… 넌 그 영광스러운 첫걸음을 함께하게 될 소중한 동반자인 거지.”
확실히, 저 말은 농담은 아니었다. 먼 미래의 카델 라이토스는 정말 천하가 떠받드는 유명한 영웅이 될 테니까.
‘그래도 동반자니 뭐니 하는 건 좀 과하지 않나 싶긴 하지만.’
저러니까 반의 호감도가 초반부터 70이었지.
입 가벼운 주인공을 보며 혀를 찬 카델이 반의 반응에 주목했다. 그는 좀처럼 속내를 알 수 없는 오묘한 표정으로 카델을 마주 보고 있었다.
걸음도 멈춘 채 우뚝 선 그와 카델 사이로 짧은 침묵이 흘렀다. 살짝 벌어진 입술을 달싹이던 반이 이내 심드렁하게 말했다.
“마법사가 검이 어디 있다고 천하를 검 아래에 둔대? 차라리 지팡이라고 하지 그래.”
“지팡이는 멋이 없잖아! 그리고 너 말 예쁘게 안 해? 같이 여행하게 되면 내가 대장이니까, 꼬박꼬박 존칭 쓰라고.”
“언제는 동반자라며.”
“동반자 사이에도 서열이라는 게 있어.”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으며 투닥거리는 둘. 카델은 어느샌가 자신의 시야가 그들과 함께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자리에 못 박힌 채 점점 멀어져 가는 둘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었다. 자의는 아니었다.
작아지는 뒷모습을 따라 희미해진 대화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같이 갈 거지? 응?”
“……생각해 보고.”
“알겠어, 그럼 1분 뒤에 말해. 기대하고 있을 테니까.”
“생각을 하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하지 말고 그냥 와. 잘해 준다니까?”
1분을 생각한 반은 결국 카델과의 여행을 택할 것이다. 함께 많은 일을 헤쳐 갔을 것이고, 그러는 동안 말을 예쁘게 하는 법도 배웠겠지.
그렇게 오랜 시간을 보낸 그는 지금의 반 헤르도스가 되었다.
카델은 점점 하얗게 변하는 시야를 보며, 크게 숨을 골랐다. 이제부터 볼 반 헤르도스는 자신의 사람이었다. 그가 봐 왔던 단장이 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충성을 후회할 사람은 되지 않겠노라.
떠오르는 시스템 창과 함께 카델은 다짐했다.
「반 헤르도스의 기억 - 스타팅 멤버 한정 스토리의 시청을 완료하였습니다.」
「피로 회복도가 50% 감소합니다. 육체 피로도에 유의하십시오.」
눈을 뜨자 침대 옆에 난 창문을 타고 어렴풋한 아침 햇살이 비쳐 들었다. 카델은 뻑뻑한 눈을 문지르며 크게 하품을 했다. 상체만 일으킨 상태로 잠시 허공을 응시하자, 새삼스럽게 실감이 났다.
“진짜 피로 회복도 50% 감소였구나……. 죽겠네…….”
잠을 잔 게 아니라 잠시 눈만 붙였다 뜬 기분이었다. 평소보다 몸이 무겁고 두뇌 회전도 느려졌다는 것이 느껴졌다.
“아…… 마밀 만나러 가야 하는데…….”
이렇게까지 피곤해질 줄 알았다면 하루 정도는 미뤄 볼 걸 그랬나. 하필 반의 처량맞은 꼴을 보고 마음이 약해져 버려서는.
짜증스레 머리를 헝클인 그가 침대 아래로 발을 뻗은 순간이었다. 누군가의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멍하게 문을 바라보던 그가 한참 뒤에야 자신이 아침 목욕물을 부탁했었다는 사실을 깨닫곤 후다닥 달려가 문을 열어 주었다. 빙의 전에도 그랬지만, 매일 아침저녁으로 씻어 주지 않으면 못 견디게 찝찝했다. 기회가 있을 때 질리도록 씻어 줘야 한다.
그렇게 시원한 수압을 그리워하며 목욕을 마친 카델. 잘 개어 둔 옷까지 멀끔하게 갈아입은 그는, 방의 정중앙에 우두커니 선 채 생각에 잠겼다. 느릿느릿 굴러가는 머리로 무언가를 더디게 고심하던 카델이, 마찬가지로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반부터 보러 가야겠다.”
별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일단 반의 과거를 생생하게 체험하고 온 직후이니, 현재의 반을 봐 주어야 다시 돌아왔다는 실감이 날 것 같았다.
그런 시답잖은 목적을 가지고 반의 방을 찾아 노크하자, 얼마 안 가 문이 열렸다. 반쯤 열린 틈새로 따끈한 열기가 흘러들며 반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 또한 갓 목욕을 마친 것인지, 타올로 하반신만 대충 가려 묶은 상태였다.
아직 물기를 닦지 않은 탄탄한 상체에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카델은 예고 없이 펼쳐진 살색의 향연에 잠시 말문을 잃었다.
여기저기 길고 짧은 흉터가 자리 잡은 몸. 움직임을 따라 도드라지는 섬세한 복부의 근육과 군살 하나 없이 매끄럽게 뻗은 허리. 호흡에 맞춰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두툼한 가슴과 살짝 기울어진 고개 아래로 선명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목 빗근. 절로 감탄이 나올 만큼 밀도 있는 근육의 굴곡을 타고 주륵, 흘러내리는 가느다란 물길까지.
마치 신이 내린 재능을 가진 장인이 열흘 밤낮을 새워 공들인 조각품을 보는 듯했다.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죄악감이 느껴질 것 같은, 장인의 영혼과 신의 의지가 담겨 있을 법한 그런…….
“단장?”
근육을 따라 천천히 올라가던 시선이 반의 의아한 눈빛과 마주치고. 카델은 그제야 어디론가 날아가던 이성의 끈을 낚아챌 수 있었다.
“……어? 아, 어. 안…녕.”
미쳤나?
방금 뭘 감상하고 있었던 거지? 손을 대? 죄악감이 느껴져? 미친 게 분명했다. 사람의 맨몸을 보고 넋을 잃다니. 그것도 같은 남자의 몸을!
여성향 게임에 물들기라도 한 것인가. 뒤늦은 자각과 함께 수치심이 몰려온 카델이 푹 시선을 내리깔자, 반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세요?”
“어…… 그, 그냥.”
“그냥?”
카델이 쉽사리 말을 떼지 못한 채 우물거리자, 반이 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 들어오라는 뜻이었다. 그에 카델은 주춤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반은 목욕통에 걸쳐져 있던 타올로 머리칼의 물기를 털어 내며 카델을 힐끔거렸다. 그가 보기에도 오늘의 카델은 이상한 점이 많은 듯했다. 그럼에도 먼저 입을 열지 않고 인내심 있게 기다리자, 언제나처럼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그날 기억해?”
“그날이요?”
“그, 우리가 처음 만났던…….”
카델과 처음 만났던 날?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다. 그날은 자신의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게 된 시발점이었으며, 죽는 순간까지 그 열기가 식지 않을 소중한 순간이었으니.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는 반의 얼굴 위로 유순한 미소가 떠올랐다.
“갑자기 그날은 왜요?”
“그냥…… 오늘 그때 꿈을 꿨거든. 오랜만에 옛날 네 모습을 보니까 신기하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해서.”
“아, 그때의 저는 잊어 줘요, 단장. 솔직히 재수 없었잖아요.”
부러 장난스럽게 말하자 카델 또한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얇은 눈매가 산뜻한 곡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맞아, 진짜 재수 없더라. 지금이랑 비교도 안 되던데? 너 완전 사람 됐어.”
“지금은 예쁘게 구니까 괜찮은 거 아니에요?”
“뭐, 그건 그래. 가끔 다른 사람한테 욱하는 걸 보면 아직 그때 모습이 남아 있구나, 싶긴 하지만.”
“난 단장한테만 살갑게 굴기로 한 거니까.”
타고나길 거칠었던 성격을 죽이고 카델만의 온순한 부하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던가. 그 시절을 떠올리니 절로 쓴웃음이 났다.
대충 머리를 말린 반이 타올을 다시 목욕통 위에 걸쳐 두자, 마룻바닥이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났다. 소리를 따라 움직인 시야 속으로, 불쑥 가까워진 카델의 얼굴이 들어찼다.
하얀 뺨이 보였다. 끝이 살짝 올라간 생기 있는 분홍빛 입술이 보였고,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유려하게 뻗은 콧대가 보였다. 웃을 때가 유독 예쁜 반달 모양의 눈매도, 그 위에 촘촘하고 가지런한 그림자를 드리우는 기다란 속눈썹도.
대체 어디서 그런 박력이 나오는지 도통 알 수가 없는 말간 얼굴이었다. 손에 피는커녕 물 한 방울 묻혀 본 적도 없을 것처럼 생겨 놓고선, 누구보다 궂은일을 꺼리지 않는 사람.
그의 짙은 고동색 눈동자가 담아낸 자신의 모습을 마주한 순간. 반은 순식간에 심장이 바닥끝까지 추락하는 둔탁한 고통을 느꼈다. 속이 울릴 정도로 메스꺼운 감정이 불규칙적으로 밀려왔다 쓸려 나가기를 반복했다. 평소와는 묘하게 다른 카델의 분위기 또한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런 반의 상태를 알 리 없는 카델은 가만히 주먹을 내밀어 보였다.
“……?”
가슴팍 앞에 자리 잡은 하얀 주먹. 그 야무진 주먹을 멀뚱히 내려다보던 반이 머뭇머뭇 손을 움켜쥐자, 카델이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걸 왜 쥐고 있어?”
“그, 그럼…….”
“이렇게 해야지!”
그는 직접 반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어 주먹 쥐게 만든 뒤, 그 위로 다시 자신의 주먹을 갖다 댔다. 그러고는 아주 흡족한 표정으로, 아주 당차게 말했다.
“절대 후회하지 않게 만들어 줄게.”
“네……?”
“내 여행에 함께한 걸, 내 용병단에 들어온 걸, 날 위해 싸우는 걸. 죽는 날까지 후회하지 않게 만들어 주겠다고.”
그리 말하며 웃는 얼굴은 처음 만났을 때의 카델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어서, 반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에게 있어 카델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가 후회하지 않게 해 주겠다고 한다면, 그 말이 진실이든 아니든. 반은 믿게 되어 있다.
참 불공평한 감정이라고, 카델의 올곧은 시선을 마주한 반은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