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랑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싶은 모양이네.”
“하하, 말투가 새침하네, 대장.”
“고상한 귀족 말투에는 재주가 없어서.”
뚱하게 대답하는 카델을 보는 눈빛이 오묘했다. 루멘은 잠시 입을 다물고 앞을 응시하다, 평소처럼 여유로운 미소를 띤 채 말했다.
“라이토스는 제국의 이름난 명문가인데. 화법도 가르쳐 주지 않던가?”
“……내 풀 네임을 알려 준 기억은 없는데.”
“대답을 고민하던 이틀 동안, 대장의 뒤를 좀 밟았거든. 우연히 알게 됐지.”
기분 나빠? 루멘이 물었지만 카델은 별다른 반응 없이 고개를 저었다.
딱히 불쾌하진 않았다. 자신은 기사의 능력치와 호감도에 따른 과거 사정까지 살펴볼 수 있는데. 실제 본인도 아닌 인물의 정체를 들켰다고 화가 날 리가.
다만, 조금 걱정은 되었다.
루멘은 귀족의 프라이드가 넘치는 인물. 자신이 몰락한 마법 명가의 서자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은연중에 무시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루멘의 영입이나 통제가 더욱 힘들어질 텐데.
그런 고민을 하며 묵묵히 걷고 있는데, 루멘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정체를 알고 나니 그제야 납득이 가더군.”
“……납득?”
“그날, 대장이 보여 줬던 마법. 날 살렸던 판단력. 그리고 야망까지……. 그 ‘라이토스’의 핏줄이라면, 그럴 만도 해.”
“평가가 높네. 반쪽짜리한테.”
카델은 일부러 루멘을 떠보았다. 언제가 됐든 서자라는 게 알려지는 것은 시간문제일 테니. 지금은 반응을 보는 것이 우선이었다.
하지만 루멘은 생각보다 무난하게 카델의 말을 받아넘겼다.
“순혈이든 아니든 상관없어. 내가 본 능력만큼은 반쪽이 아니었으니까.”
그의 대답에 이렇다 할 조롱의 느낌은 담겨 있지 않았다. 마녀를 해치웠던 마법이 사실은 뻥튀기된 눈속임이었다는 걸 알아챈다면 무슨 반응일까. 실없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쨌든 다행이었다. 그가 조금이나마 자신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 긍정적인 부분이다.
카델은 남몰래 안도하며 덤덤한 표정을 꾸며 냈다. 더 이상 가문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 갔다간 밑천이 드러날 것이었다. 적당히 끊어 내자.
“미안하지만 과대평가야. 난 아직 가문의 이름을 짊어질 만큼 강해지지 못했거든. 그런 의미로, 드라키움에서 마법사가 좋아할 만한 장소 좀 알려 줘 봐.”
“질문의 맥락을 못 잡겠는데.”
“시끄럽고, 계속 붙어 다니고 싶으면 대답이나 해.”
까칠한 대답의 어디가 재미있던 건지, 소리 내어 웃은 루멘이 부드럽게 움직여 카델의 앞을 막고 섰다. 그러고는 멀뚱히 자신을 올려다보는 카델의 어깨를 잡고 뒤로 돌렸다.
“뭐 하는 거야?”
“마법사가 좋아할 만한 장소는 몰라도, 사람이 많이 몰리는 장소는 알지. 이쪽이야.”
카델은 등 뒤에서 밀어 내는 힘을 버티지 못한 채 얼떨결에 루멘의 의지를 따라 나아가기 시작했다. 맥없는 걸음을 따라 간지러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루멘이 그를 데려간 곳은 드라키움 광장의 중심부인 ‘보석 분수대’ 앞이었다. 일반 분수대의 배는 넘을 크기의 보석 분수대에는 이름대로 형형색색의 보석들이 박혀 있었는데, 그 잔잔한 빛을 따라 치솟는 물줄기 또한 아름답게 반짝였다.
분수대의 근처는 인파가 상당했다. 광장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몰려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카델은 인파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갖은 애를 썼고, 루멘은 그런 카델의 뒤에서 사람들을 막아 주었다.
카델이 부루퉁한 얼굴로 자신의 뒤에 바짝 붙은 루멘을 올려다보았다.
“아무리 보석 분수대라지만 이런 시간까지 와서 구경해야 할 정도야?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잖아.”
“곧 연주회가 시작되거든.”
“연주회?”
“매일 밤 열리는 길거리 연주회인데, 날마다 쓰이는 악기와 곡, 연주자가 달라지지. 운이 좋으면 환상적인 노래를 들을 수도 있어.”
랜덤 길거리 연주회라니. 흥미가 돋긴 하다만, 느긋하게 음악이나 감상하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교환원을 찾아내야 한시라도 빨리 강해질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며 광장을 벗어나려 했지만, 어딜 가도 사람들이 가득해 한 발짝을 내딛기가 힘들었다. 루멘은 자신의 품 안에서 꼼지락거리는 카델의 어깨를 가볍게 움켜쥐곤 말했다.
“안됐지만 칼부림이라도 할 거 아니면 저 인파를 헤치고 가는 건 무리야. 포기하고 얌전히 들어 보지 그래, 대장.”
“마법사가 좋아할 만한 곳을 알려 달랬지 누가 관광 명소에 데려다 달랬어? 덕분에 시간 낭비만 하게 됐네!”
“이렇게나 풍류를 몰라서야. 실망이 큰걸.”
실망의 기색이 전혀 없는 즐거운 얼굴을 노려보던 카델이 결국 한숨과 함께 시선을 돌렸다.
‘오늘은 텄군. 하루 날린 셈 치는 수밖에.’
어차피 루멘이 따라붙은 시점에서 제대로 된 수색이 이루어지리란 기대도 안 했다. 욕심을 내려 두자 그제야 분수대 앞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악단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악단은 열 명 남짓 되는 인원이었는데, 각각 첼로와 플루트, 호른, 트럼펫 등의 악기를 들고 있었다.
사람들은 악단의 등장에 웅성거리며 조금이라도 그들과 가까워지고자 앞으로 나아갔다. 그 숨 막히는 파도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다리에 바짝 힘을 주었는데, 어째 시간이 흘러도 타인이 부딪혀 오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루멘 덕분이었다.
뒤돌아보니 그가 카델을 감싸다시피 하며 버티고 있었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카델이 머쓱하게 코끝을 문질렀다.
남자로 태어나 같은 남자에게 이런 식으로 보호를 받아 본 적은 처음이었다. 상당히 부끄럽긴 했지만, 그렇다고 몸서리치며 뿌리칠 정도로 불쾌하진 않았다.
……설마 이런 스킨십에 익숙해지고 있는 걸까?
상상만으로도 경악스러운 변화에 카델의 낯빛이 창백해질 무렵.
“시작하는군.”
속삭이는 루멘의 부드러운 목소리와 함께, 악단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과연, 카델은 운이 좋았다.
여러 악기가 어우러진 연주는 구름 낀 밤하늘과 어울리는 서정적인 분위기를 띠었고, 절로 몸의 긴장이 풀릴 만큼 편안한 흐름이 있었다. 악단의 연주는 근래 진행되었던 연주회 중 가장 뛰어났다. 카델은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루멘의 가슴팍에 기대었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한 채 음악을 감상했다.
‘원래 세계에서는 이런 연주회를 찾아갈 기회도, 여유도 없었지.’
괴물과 유혈이 낭자한 게임 속 세계에서 이런 기분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이런 느긋함이라니. 카델이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더니, 이런 낯선 세계에서조차 기어코 스며들어 버리는구나.
점점 묘해지는 기분을 털어 내기 위해 가볍게 머리를 흔들자, 내내 조용하던 루멘이 그를 불렀다.
“대장, 저기 좀 봐.”
“……?”
“내 경험상 대체로 저렇게 생긴 노인들은 마법사일 확률이 높던데. 어때?”
본인이 관상가라도 된단 말인가? 터무니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루멘이 가리킨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인파 속에 갇혀 우두커니 선 한 노인이 보였다.
너저분하게 늘어뜨린 백금발의 머리와 주름이 선명한 거친 피부, 고집이 담긴 딱딱한 눈빛과 연주 소리를 따라 움찔거리는 얇은 입술. 잠시 홀린 듯 노인의 모습을 눈에 담아내던 카델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저 사람…… 보기만 해도 50년 묵은 피로가 느껴지는 듯한 저 얼굴은……!’
저 권태로운 인상, 귀여운 꼬마가 사탕 하나 달래도 무시하고 제 입에 넣어 버릴 듯한 건조한 표정, 세상의 무심함이란 무심함은 전부 담아낸 흐리멍덩한 눈동자!
틀림없었다. 저자가 바로 마밀 키파. 카델이 찾고 있던 ‘아이템 교환원’이었다.
뜻밖의 횡재에 흥분한 카델이 몸을 뒤틀었다. 오늘이 지나기 전에 어떤 식으로든 마밀과 관계를 맺어 두고 싶어 안달이 났다. 적어도 그와 통성명이라도 해 두어야 앞으로의 출현 장소를 가늠할 수 있게 되지 않겠는가.
한편 그의 계획을 전혀 알지 못하는 루멘은 카델의 반응이 당황스럽기만 했다. 자신의 품 안에서 요리조리 몸을 비틀어 대는 임시 대장이라니.
“뭐 해?”
“저 마법사한테 갈 거야.”
“진짜 마법사였어? 아니, 그보다 아직 연주회가 안 끝났어. 사람이 빠지기 전까진 얌전히 있는 편이―”
“루멘.”
그의 말을 칼같이 끊어 낸 카델이 차분하게 눈을 빛냈다. 그러고는 검지를 뻗어 루멘의 단단한 가슴팍을 지그시 눌렀다.
“날 지키라고는 안 해. 그래도 임시 단원이라는 신분을 가졌으면, 날 돕는 성의 정도는 보여 줘야 하지 않겠어?”
“……누가 들으면 대단한 싸움이라도 난 줄 알겠는데.”
“상황은 전투 중보다 급박하다고.”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가만히 있으라며 붙들어 둘 수도 없다. 결국 루멘은 목표물을 향한 카델의 진군을 돕게 되었다.
마밀 키파.
플레이어가 느끼는 그의 존재 의의는 유저의 성장을 돕는 아이템 교환원에 불과했지만, 사실상 게임 내에서 마밀의 포지션은 ‘주인공의 스승’에 가까웠다. 그를 만남으로써 마법의 성취도가 일취월장하는 데다 다양한 이론까지 터득할 수 있으니. 마밀의 괴짜스러운 성격으로 인한 초반의 트러블을 제외한다면, 주인공은 그를 꽤나 존경했다.
“대장, 이 시선들이 느껴져?”
루멘은 카델의 어깨에 팔을 얹은 채 말했다.
마밀의 근처에 도달하기 위해, 두 사람은 무식하게 인파의 벽을 뚫어 가며 전진했다. 루멘의 힘찬 악력에 고꾸라지듯 밀려 난 사람들은 평화로운 연주도 뒤로한 채 그들을 노려보기 바빴다. 하필 기사를 대동하고 온 귀족까지 있던 터라 하마터면 진짜 칼부림이 일어날 뻔했다. 루멘의 유연한 대처―그리고 언제나 결과가 확실한 미인계―가 아니었다면 분명 큰 소동이 일어났을 터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델은 어깨에 올라온 루멘의 팔을 떨쳐 내며 생각하기 바빴지만.
‘마밀은 철저히 내향적인 성격이야. 곁에 사람이 있는 걸 못 버텨 하고, 본인의 성장에만 욕심을 내지. 그 점을 노려야 해.’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과 게임 속 세상에 빙의되어 살아가는 것은 다르다. 그 사실은 질리도록 실감해 온 바였다. 그는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을 총동원해야 했고, 그렇게 해야만 간신히 빙의자로서의 우위를 선점할 수 있었다.
‘지금 놓치면 언제 어디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몰라. 기회는 한 번. 언제나처럼, 기회는 단 한 번이다.’
마음을 굳게 먹은 카델이 몸서리가 쳐질 만큼 무표정한 마밀의 옆에 가 섰다. 하지만 그가 적당한 말을 고르며 축축해진 손바닥을 바지 위에 문지르던 순간. 주변의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듯 오로지 악단만을 바라보던 마밀이 대뜸 입을 열었다.
“그거 아나? 난 오늘 아침, 풀린 신발 끈을 밟고 넘어질 뻔했다네.”
……혼잣말인가?
하지만 그렇다기엔 그 누구도 알 바 없는 내용이었고, 아니라기엔 주변에 그의 말을 들어 줄 만한 일행이 보이지 않았다. 카델이 의아함을 느끼며 주춤하자, 마밀이 다시 말을 이었다.
“점심으로 먹은 스튜는 평소보다 뜨거워 혓바닥을 데었어. 책장을 넘기다가 손가락을 베였고, 그 상처를 치료하려다 테이블에 있던 잔을 엎어 바지가 흠뻑 젖었지. 옷을 갈아입기 위해 여관으로 돌아가던 중 무례한 꼬마에게 오줌싸개라고 놀림 받은 데다, 그 꼬마를 혼내 주려다 형제라고 주장하는 놈에게 시비가 걸렸어. 그런데 알고 보니 평범한 소매치기였더군. 식비로 사용하려던 돈을 전부 빼앗겼다.”
“…….”
“그래. 아주 끔찍한 하루였지. 젊은이. 이 빌어먹을 하루의 하이라이트가 뭔지, 짐작할 수 있겠나?”
목석처럼 정면만을 바라보던 마밀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그는 정확히 자신의 옆에 선 카델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눈에 담긴 고요한 소용돌이를 마주한 순간. 카델은 이어질 마밀의 말을 예상할 수 있었다.
“바로 자네야. 젊은 마법사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