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3/521)

“넌 왜 가끔 그렇게 급발진을 하는 거야? 그냥 대충 무시하고 넘어가면 되잖아.”

“죄송해요, 단장. 하지만 그 멀대 새끼가 감히 단장을 무시하잖아요.”

“멀대 새끼라니……. 그냥 참아. 앞으로 큰 의뢰를 맡게 되면 저런 무시 정도야 점잖은 축에 속할 텐데, 그때마다 성질내게? 그 뒷감당은 다 내 차지라는 걸 몰라?”

신성 기사단과 찢어져 함정을 탐색하러 가는 길. 카델은 기죽은 똥개처럼 축 처진 반을 꾸짖고 있었다. 물론 자신이 무시당할 때마다 불같이 나서는 반이 기특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든든하기도 했으나. 그래도 이쯤에서 버릇을 들이지 않으면 더 피곤한 일이 생길 것 같았다.

“앞으론 화내기 전에 속으로 열을 세. 화를 내도 괜찮은 상황인지 잘 생각하라고.”

하지만 자신을 두둔하고도 꾸지람이나 듣는 반의 불쌍한 표정에 동정심이 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래서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걸까. 카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푹 한숨을 쉬며 시무룩한 반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용병단의 규모가 커지면 방금처럼 대놓고 무시받는 일도 적어질 거야. 그때까지만 참자. 응?”

“……네.”

카델의 손길이 닿자 울상이던 반의 표정도 슬금슬금 풀어졌다. 그러더니 아예 머리를 숙여 카델이 쓰다듬기 좋은 각도를 찾아내기까지 했다. 그 모습이 꼭 손 타는 강아지 같아서, 카델은 잔소리하던 것도 잊고 피식 웃어 버렸다. 여러모로 참 똥강아지 같은 놈이었다.

‘그나저나, 당당하게 떠나왔으니 체면을 위해서라도 무조건 기사단보다 많은 함정을 해제해야 할 텐데. 마력이 남아날까 모르겠네.’

어차피 협력은 물 건너간 것 같아 독립을 선언하긴 했으나, 함정의 탐색과 해제에는 생각보다 많은 힘이 들어간다. 게임 내에서는 일정 공간에 마력을 풀어 제 것이 아닌 마력을 감지하는 식으로 함정을 탐색했고, 플레이어의 마력으로 마법진의 흐름을 망가뜨려 함정을 해제시켰다. 플레이할 때는 터치 몇 번으로 끝나는 간단한 작업이었다.

물론,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안다. 벌써부터 피로가 몰려오는 듯해, 카델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나마 바람 속성을 뚫어 둔 게 다행인가. 탐색엔 바람 마법이 제격이니까.’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린 그가 적당한 자리를 찾고는 멈춰 섰다.

“탐색을 시작할 거야. 주위를 경계해 줘, 반.”

카델이 정면을 향해 팔을 뻗자, 그를 중심으로 비단처럼 부드러운 바람결이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우와, 장난 아니네.’

함정 해제 4개째. 카델은 비처럼 쏟아지는 땀을 닦아 내며 혀를 내둘렀다.

미리 마음의 준비는 해 두고 있었지만, 함정 해제에 들어가는 마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뭐랄까. 마법진 위에서 플랭크 자세 30분을 유지하며 노래까지 완창하는 기분이랄까. 한마디로 더럽게 힘들었다. 마력의 양도 양이지만, 마녀가 남긴 마력의 흐름을 끊어 내는 것 또한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었다.

“여기 물이요.”

“고맙다…….”

카델은 반이 건네준 물통을 받아 벌컥벌컥 들이켰다. 물통을 쥔 손이 벌벌 떨리는 것이, 이쯤에서 쉬고 가지 않으면 쓰러질 것 같았다.

반은 그런 카델의 상태를 살피며 옆에서 손부채질을 해 주었다. 손이 크고 힘도 좋아서 그런지 보통의 손부채질보다 훨씬 시원했다. 카델은 얌전히 그의 배려를 받아들이며 숨을 몰아쉬었다.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니에요?”

“안 그래도 좀 쉬려고 했어. 한…… 15분 정도만 쉬었다가 마저 해제하러 가자.”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은 정말 없는 건가요? 단장 혼자서 이렇게 고생하는데 제가 하는 거라곤 이런 잔심부름뿐이라니…….”

“없어, 없어.”

이번에는 정말이었다. 하나뿐인 부하를 위한 하얀 거짓말 따위가 아니다. 마법 해제를 위해 반이 해 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조금이라도 마력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뼛속까지 무인인 반은 오라밖에 다루지 못했다. 오라는 마력의 흐름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그러니 무식하게 마법진을 때려 부술 생각이 아니라면, 그가 함정을 해제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하지만 반은 무력한 현실을 받아들이기 싫은 기색이었다. 뚱한 얼굴로 바닥을 내려다보던 그가 이내 결심한 듯 눈을 빛냈다.

“그럼 함정으로 이동하는 길만이라도 제가 단장을 업고 갈게요.”

“뭐? 됐거든, 필요 없어.”

“함정끼리 거리가 가까운 것도 아니고, 그것도 다 체력 소모라고요! 효율적인 일 처리를 위해서예요, 단장. 네?”

카델이 떨떠름한 시선으로 반을 훑었다. 평소라면 헛소리 말라며 몇 번이고 거절했겠으나.

‘업혀 가면 편하긴 하겠지. ……아니, 생각해 보면 친구끼리도 업힐 수는 있는 거잖아? 심지어 나는 지금 매우, 몹시, 상당히 지친 상태고. 쓸데없는 고집만큼 분명한 고생길은 없어.’

현재의 카델은 휴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정당화할 수 있을 만큼 고된 상태였다. 결국 그는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고, 반은 활짝 핀 꽃처럼 해사하게 웃어 보였다.

“편안하게 운반해 드릴 테니까요!”

허울만 좋은 장담이 아니었다.

반은 짧은 휴식 뒤에 카델을 업은 상태로 함정을 찾아 이동하기 시작했는데, 그에게 업힌 카델은 처음의 쑥스러움도 잊은 채 거의 젖은 빨래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등판 무슨 일이냐. 너무 편하잖아.’

진작 업어 달라고 할걸. 흔들림 없는 편안함이 여느 고급 침대 못지않았다. 덕분에 조금이나마 체력도 비축할 수 있어서, 카델은 딱 죽기 직전의 상태를 유지한 채 함정을 해제할 수 있었다.

‘신성 기사단은 몇 개나 해제했을까? 두 배까진 아니더라도 이쪽이 3개 정도는 앞섰으면 좋을 텐데. 그 정도면 면전에서 뻗댈 수 있잖아? 인원수 차이가 있는데.’

6개째의 함정 해제. 마법진 앞에 쭈그려 앉은 카델이 퀭해진 눈가를 문지르며 그리 생각했다.

신전에게 받는 보상도 보상이지만, 아무래도 자신을 무시한 신전 기사단 앞에서 보란 듯이 뻗대 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겉으로는 덤덤한 척, 별 타격도 없는 척 굴긴 했지만 그도 자존심이라는 게 있으니까. 반처럼 대놓고 으르렁거리진 못해도 상대방의 기분을 잡치게 만들고는 싶었다.

그러한 일념으로 똘똘 뭉친 묵직한 몸을 일으킨 카델. 흐려지는 시야에 슬슬 두 번째 휴식이 필요하다고 느끼던 바로 그때였다.

“빠르네. 아무리 마법사라지만 신성 기사단보다 두 배는 좋은 능률이라니……. 콧대 높으신 분들 자존심이 꽤나 상하겠어.”

마법진을 둘러싸고 있던 나무 위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놈은……!”

카델보다 먼저 목소리의 주인공을 발견한 반이 곧장 대검을 꺼내 들었다. 흉흉한 살기에도 목소리의 주인은 실없는 웃음소리를 냈다.

“예상을 조금도 안 벗어나는 반응이잖아.”

“……루만.”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 카델이 차가운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루멘 도미닉. 그가 보란 듯이 가지 위에 걸터앉아 이쪽을 구경하고 있었다.

카델은 자신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드는 루멘을 노려보며 주먹을 그러쥐었다. 마력이 넉넉했더라면 당장 저쪽을 향해 화염구를 날려 버렸을 것이다.

“안녕, 카델.”

하지만 카델은 여유분의 마력이 없었고, 루멘을 저 위에서 끌어 내릴 근력도 없었다. 따라서 그는 비교적 멀쩡한 입을 움직였다.

“안타깝지만 이번 의뢰에선 네가 훔쳐 갈 증거가 없는데. 왜, 우리보다 먼저 복귀해서 보상부터 달라고 조르기라도 할 셈인가?”

“딱히. 저번에 받은 사례금도 넉넉해서.”

“그럼 그 돈으로 좋은 술이나 마시러 가시지. 괜히 알짱거려서 사람 기분 더럽게 만들지 말고.”

진이 다 빠진 상태임에도 카델의 목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싸늘했다. 기운이 없어 절로 무미건조해진 말투도 한몫했다. 그에 루멘은 잠시 입맛을 다시더니, 나무 위에서 뛰어내렸다. 상당한 높이임에도 별 타격 없이 부드럽게 착지한 그가 여유롭게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설마 내 배신을 예상 못 했다고는 하지 않겠지. 처음부터 정보 교환을 위해 잠시 부하를 자처했을 뿐이잖아. 그건 터무니없는 제안을 한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을 텐데.”

“단장, 저 자식의 주둥이를 썰어 버리고 오겠습니다.”

카델은 거의 눈이 돌아가기 직전인 반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러고는 잠시 숨을 골랐다. 화가 머리끝까지 차오르지만, 그럼에도 침착해야 했다.

이미 한 번 용병단을 이탈한 루멘이 다시 자신을 찾아온 이유. 찾아와서 굳이 이야기를 나눠 보겠다고 말문을 뗀 이유.

이대로 대화하느냐, 무시하느냐를 가르는 것은 루멘의 가치.

그는 생각하고 선택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배신을 예상하는 것과 당하는 것은 달라. 평범한 이탈과 보상을 훔쳐 달아난 것도 다르지.”

“변명할 생각은 없어.”

“들어 줄 생각도 없다.”

카델은 가만히 루멘을 주시했다. 그의 멀끔한 용모와 당당한 태도, 얕은 이질감이 느껴지는 묘한 눈빛을.

‘……그래. 게임에서 루멘 도미닉을 영입했을 때도 조건이 짜증 날 정도로 까다로웠던 기억은 있어. 그만한 성능이었으니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했었고.’

자존심 강하고 도도한 루멘이 이대로 떠나지 않고 다시 한번 찾아왔다는 데에는, 분명 긍정적인 의미가 담겨 있었다.

카델은 고민했다.

저 배신자 새끼를 다시 거둬, 말아.

아니, 거둔다고 해도 통제할 능력이 지금의 자신에게 있을까?

“그냥 보고 싶어서 찾아왔어.”

“보고 싶다……?”

“그쪽한테 흥미가 생겼거든. 불쾌한가?”

“솔직히, 기분 좋지는 않군.”

깔끔한 대답에 루멘이 쓰게 웃었다. 서로의 입장만 아니었다면 순간 경계가 풀릴 만큼 처연한 미소였다.

‘이래서 여성향 게임이 안 돼. 모든 걸 얼굴로 해결하려 하지 말라고! 재수 없는 미남 같으니.’

속으로나마 짜증스럽게 일갈한 카델이 팔짱을 꼈다.

“더 솔직하게 말해 보자면, 나는 네 능력이 꽤 마음에 들었었다. 내가 꾸려 나갈 용병단에 필요한 힘이라고 생각했지.”

“싸움으로는 어디 가서 꿀리지 않지.”

“인성으로는 어딜 가나 꿀릴 것 같다만.”

“너무한걸.”

“쓸데없는 대화는 이만 각설하지. 난 네가 루멘 도미닉이라는 걸 알고 있다.”

너무 기습적인 공격이었을까. 내내 여유를 보이던 루멘의 표정이 희미하게 굳었다.

뻣뻣해진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카델을 향해 말했다.

“긴가민가했는데. 그걸 알고도 입단 제의를 했다는 게 더 놀랍군. 용병단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귀족을 끌어들여 볼 생각이었던 건가?”

“네가 귀족이든 왕족이든 상관없어. 내가 원하는 건 강한 인간일 뿐이니까.”

“그럼 왜 굳이 내 정체를 알고 있다는 얘길 하는 거지? 허접한 용병단에 하루쯤 속해 있었다고 내 명예에 흠집이 가진 않아.”

“말뜻을 이해 못 하는 건 여전하네.”

빈정거리며 말하자 루멘이 눈썹을 씰룩였다. 카델은 그가 맞받아치기 전, 먼저 선수를 쳤다.

“도미닉가의 차남은 야망이 커 제 형의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형을 무너뜨릴 세력을 가지기 위해 가문을 나와 이곳저곳을 여행하고 있다……. 그런 소문을 들은 적이 있지.”

“…….”

“그래서 제안해 본 거다. 나는 그런 세력을 주지는 못해도, 내 부하를 위해 그만한 세력을 휘둘러 줄 의향은 있으니까.”

이번에는 아무리 루멘이라도 동요를 숨기지 못했다. 그는 조금도 예상 못 한 발언을 들었다는 듯, 그 발언이 적잖이 충격적이라는 듯, 눈에 힘을 주었다.

카델은 그런 루멘을 마주하며 쐐기를 박았다.

“난 거물이 될 거다, 루멘. 내 목표는 고작 가문 하나를 아래에 두는 게 아니거든.”

짧은 침묵이 흘렀다.

루멘은 평정을 되찾았으나, 처음의 미소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무감각하고 단호한 표정으로 카델을 응시했다.

“도박을 하라는 건가? 내 인생을 바쳐서 거물이 될지도 안 될지도 모르는, 평범한 마법사의 여행길 친구나 되라고?”

“웃기는군. 난 너한테 친구가 되어 달라고 한 적 없어. 한 번 배신한 사람을 순순히 부하로 받아들일 생각도 없고.”

“그럼 왜 그런 말을…….”

“하지만 여전히 네 능력이 탐나기도 하지.”

확실히 루멘은 탐나는 인재였다. 그는 카델이 애용했던 최종 덱의 단골손님이었던 만큼 실력이 확실했다. 카델은 자신이 이 세상의 누구보다 루멘의 잠재력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고 단언한다. 하지만 여전히 뭣도 없는 초보자인 제가 루멘 같은 인재를 잘 키워 낼 수 있을지 걱정과 불안감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다.

“임시 단원이 돼라.”

“……임시?”

“어차피 너도 여기저기 싸돌아다녀야 할 테고, 이름값도 올려야 할 거잖아? 그러다 쓸 만한 조직을 발견할 수도 있는 거고.”

루멘을 버리지도, 소유하지도 않은 상태. 그 어중간한 상태를 유지하며 성장할 수만 있다면. 루멘을 완벽하게 손아귀에 넣을 만한 타이밍은 분명히 온다.

“굳이 모든 의뢰에 참여하지 않아도 좋아. 널 적린 용병단원이라고 소개하지 않아도 좋고.”

“그렇다면 내가 동행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거지?”

“서로 간을 보는 것뿐이야. 나는 네가 한 번의 배신을 감수하고도 품을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를, 너는 내가 인생을 건 도박을 해 볼 정도로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를.”

루멘을 임시 단원으로 만든다면 사용할 수 있는 코스트의 폭도 넓어진다. 투자할 자금의 양도 확실하게 줄어들 것이다. 선택적인 퀘스트 참여가 불편할 수는 있지만 그 정도는 감수할 만하다고, 카델은 생각했다.

루멘은 말이 없었다. 카델의 제안에 대해 고민하는 듯 신중한 기색이었다. 카델은 입을 다문 루멘을 향해 가볍게 말했다.

“기한은 이틀이야. 그 안에 정하도록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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