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521)

⚔️

‘이걸 기뻐해야 해, 열받아 해야 해.’

그로부터 이틀 뒤.

주점 ‘에밀리의 두건’을 찾은 카델은 타들어 가는 속에 연거푸 술잔만 기울이고 있었다. 그의 맞은편에 앉은 반은 카델의 음주를 저지하는 것을 포기한 듯 얌전히 안주가 담긴 그릇을 밀어 주었다.

“데폴로 신전이 공식적으로 축복을 내렸다지? 엄청나군. 기사단도 아니고, 신전 측에서 일개 용병단에게 축복을 내리다니.”

“그 흉흉한 소문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지. 아무것도 안 한 용병단에게 대뜸 축복을 내려 주겠는가.”

차라리 소식이 들리지 않았다면 속이라도 잠잠했을까. 카델은 시원하게 비운 술잔을 테이블 위로 내리치듯 올려 두며 이를 갈았다.

‘보상은 혼자 다 처먹었으면서 공은 자기가 버린 용병단에 돌리는 건 대체 무슨 심보야? 네가 원한 허울뿐인 명성 줄 테니까, 찾아와서 귀찮게 하지 마라, 뭐 그런 의도야?’

그렇다. 현재 주점과 길거리, 심지어는 동네 꼬마들까지 몰려다니며 떠들어 대는 화제. ‘데폴로 신전이 축복한 타지의 용병단’은 다름 아닌 적린 용병단이었다.

여신도를 훔쳐 달아난 루멘은 무사히 신전의 보상을 얻어 낸 듯했고, 선심이라도 쓰듯 본인을 적린 용병단의 단원으로 소개한 모양이었다. 그러니 주교가 직접 나서 축복을 내려 주었겠지. 물론 그것이 나쁜 일은 아니었다.

‘명성도 한 번에 15나 올랐으니까. 37 명성 정도면 웬만한 하급 기사는 쉽게 영입할 수 있겠지. 하지만…….’

기분이 더러웠다!

반은 빠득빠득 이를 갈며 새 술을 주문하려는 카델을 향해 손을 뻗었다. 걱정 가득한 얼굴은 이미 울상이었다.

“단장, 이제 그만 마셔요!”

“속이 타서 못 견디겠다고!”

“그 쓰레기 자식은 지금쯤 엎어져서 코가 깨지고 과다 출혈로 죽었을 거예요! 단장이 몸을 축내면서까지 분해할 필요가 없다고요.”

“그럼 그 시체가 가진 어마어마한 금화는 다른 놈이 훔쳐 갔겠네? 열받아!”

열불이 났다. 아니, 이탈 직전에 호감도를 10이나 올리는 기사가 어디 있는가? 직전까지 함께 싸워 놓고, 심지어는 목숨도 빚져 놓고!

카델은 아직도 반의 텅 빈 등과 쓰러진 일곱 그루의 나무가 잊히지 않았다. 오히려 주기적으로 떠올라 가슴을 두드리게 만들었다.

‘충성도를 올릴 기회는 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물론 충성도 5인 주제에 너무 순순하게 입단을 수락한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래도 먹고 튀는 게 이렇게까지 확실할 필요가 있어?’

조금만 기다렸으면 자신이 좋은 무기도 사 주고, 방어구도 맞춰 주고, 신뢰도 주면서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그 한발 늦은 타이밍이 아쉬워서일까. 카델은 반의 만류를 뿌리치며 기어코 술을 주문했다. 너무 열받아서인지 취기 대신 분노가 올라왔다.

반은 씩씩거리며 콧김을 뿜어 대는 자신의 단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그 썩을 놈을 찾아다 오체분시를 해 버리고 싶은데. 그러는 동안 카델이 고주망태가 될 것 같아 차마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그는 빈 술잔을 끝까지 기울여 한 방울이라도 더 털어 넣으려 하는 카델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너무 속상해하지 마세요. 다른 곳으로 떠나면 그 배신자 놈의 얘기도 들리지 않을 거고, 새로운 의뢰도 받을 수 있을 거예요.”

“떠나긴 어딜 떠나?”

카델은 그런 반의 손길을 뿌리치며 가자미눈을 떴다.

“설마 그 자식을 찾을 생각은―”

“뭐가 예쁘다고!”

“그럼 떠나지 않을 이유도 없지 않나요?”

떠나지 않을 이유가 없다니? 오히려 너무 많아서 문제였다.

게임에선 보통 다음 메인 퀘스트를 진행하기 전, 충분한 육성을 위한 서브 퀘스트가 출현하며 해당 지역에 머무를 기회를 준다. 저번 빌스 마을에서는 스트라 자작 때문에 예기치 않게 도망을 쳐 버렸고, 그로 인해 마을에 머무르며 의뢰를 받을 수 없게 되었을 뿐.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신전이 공식적으로 용병단을 우호적 집단으로 분류했으니, 오히려 상황 자체는 희망적이었다. 카델은 루멘이 만들어 낸 상황을 희망적이라고 보는 것조차 굴욕스러워 잔뜩 인상을 쓴 채 일갈했다.

“곧 다시 신전을 찾아야 할 일이 생길 거야. 그때야말로 밥그릇 제대로 사수해야지.”

카델의 말대로, 신전에 들어갈 기회는 꽤 빠르게 찾아왔다.

“적린 용병단의 단장, 카델 라이토스. 그대에게 전설의 기사 로덴과 위대한 여신 데폴로의 가호가 함께하길.”

그에게 축복을 내리는 주교의 얼굴엔 인자함이 가득했다. 딱히 대단한 신성함이 느껴지진 않았으나, 보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안정감은 있었다. 카델은 축복을 받기 위해 꿇었던 무릎을 세우며 예의를 차렸다.

“또 한 번 신전을 도울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교님.”

“감사의 말은 이쪽이 해야지요. 신도들을 해치던 마족을 소탕해 준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뒷정리까지 맡아 주신다니.”

“하하, 사례도 거절하지 않은 사람을 높게 평가해 주시는군요.”

“이전에 그대 대신 찾아온 단원에게 충분한 보상을 주지 못한 것 같아 마음이 쓰이던 참이었습니다. 이렇게라도 신도들의 마음을 대신하고 싶었을 뿐.”

루멘이 생각보다 적은 보상을 받아 간 건가? 그 가정만으로도 찝찝하던 기분이 조금은 나아지는 듯하다.

한편, 카델을 향해 자애로운 미소를 지어 보인 주교는, 그의 어깨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요한 시선 속으로 신전의 입구 근처에 모여 있는 신성 기사단이 들어찼다. 원래라면 용병단을 대신해 마녀를 제거해 주었어야 할 기사단이었다.

그들은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목표물이 이미 제거되었다는 사실에 황당해했으나, 다행인지 아닌지 또다시 기사단의 힘을 필요로 하는 사건이 생겨났다. 바로 신전 뒤편의 숲을 가득 메운 함정들이었다. 마녀는 사라졌지만 그대로 남은 수십 개의 함정 마법 때문에 현재까지도 신도들의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주교는 신성 기사단에게 함정 해제를 부탁했으나, 어떻게 알고 찾아온 것인지 카델이 의뢰를 맡겨 달라며 방문한 것이다. 본인은 함정 탐지에 능통한 마법사이니, 신성 기사단보다 더 유능할 것이라며.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를 고용한다면 기사단의 자존심이 상할 테고, 거절한다면 정식으로 용병단에 축복을 내린 신전의 이미지가 상할 테니.

결국 주교는 그 누구도 아닌 신전의 편에 서기로 했다. 신성 기사단의 기분이 상한다 해도, 그들은 결코 로덴과 데폴로를 모시는 신성한 장소에 해를 끼칠 수 없으니까.

“신성 기사단과 협력한다면 생각보다 일을 금방 마무리 지을 수 있겠군요. 신전의 평화가 하루빨리 돌아오기를 바라며,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뒷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카델은 유해 보이는 인상을 과시하며 묵례했다. 주교는 복잡한 심경을 숨기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부디 기사단과 용병단의 사이에 트러블이 없기를 바랄 뿐이었다.

⚔️

“함정 탐지는 이쪽에서 할 테니 물러나시죠. 탐색에 방해가 됩니다.”

트러블이 없을 리 없다. 카델은 거의 무생물을 보듯 건조한 시선을 보내오는 신성 기사단의 단장, 요한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뭐, 게임 내에서도 용병단이 기사단이 되기 전까진 사방팔방에서 갖은 무시를 다 해 대니까. 예상했던 바이지만……. 그래도 역시 면전에서 이런 취급이면 기분이 더럽긴 하네.’

판타지 게임의 주인공에겐 언제나 고난과 역경, 무시와 차별이 찾아오는 법. 이미 스트라 자작의 태도에서부터 그것을 실감하고 있던 카델이었으나. 멀고 먼 기사단 승격을 생각하면 그저 막막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그렇다고 맞받아치자면 피곤한 일이 두 배로 늘어날 뿐이니. 대충 참고 넘기자. 먼저 시선을 피한 카델이 최대한 부드럽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가 한마디를 내뱉기도 전.

“두 명밖에 없는 이쪽이 방해인지 개미 떼처럼 몰려다니는 그쪽이 방해인지, 정말 몰라서 그딴 소리를 지껄이는 건가?”

내내 불편한 표정으로 카델의 옆을 지키고 있던 반이 튀어나왔다. 반은 탐색 내내 은근히 용병단을 무시하며 저들끼리 수군거리는 기사단의 치졸한 행동을 참고 있었다. 자신이 평민 출신의 하잘것없는 용병이라는 소리도, 왜 신전의 일에 용병이 끼어드느냐는 소리도. 일일이 발끈했다간 단장인 카델의 입장이 난처해질 테니까.

하지만 다른 건 다 참아도, 카델이 거슬리는 방해물 취급받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요한 또한 반의 거친 언사가 불쾌했는지 미간을 구겼다.

“말이 험하군. 하나뿐인 단원의 기강부터 잡는 게 어떻겠소? 용병단장.”

“난 말뿐만 아니라 몸도 험하게 쓰거든. 한번 경험해 볼 텐가? 기사단장.”

마주치는 두 남자의 시선 사이로 스파크가 튀었다. 카델은 절로 나오는 한숨을 꾹 참아 내며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언제나 생각하지만, 중재하는 입장은 참으로 곤욕스럽다.

“요한 경, 신성 기사가 마법을 사용할 줄 안다는 건 저도 인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진짜배기 마법사보다는 못하죠. 안 그렇습니까?”

“어중간한 마법사보다는 뛰어납니다만.”

“물론이죠. 하지만 경의 앞에 있는 자는 어중간과는 거리가 먼지라.”

부드럽게 말하자, 부드럽게. 카델은 스스로를 세뇌하듯 되새기며 친절한 어투로 말했다.

“함정 탐색은 맡기겠습니다. 하지만 함정 해제는 이쪽이 맡도록 하죠.”

“아니, 그럴 필요 없습니다. 탐색과 해제 전부 이쪽이―”

“뛰어난 마법사를 옆에 두고 굳이 힘든 길을 가시겠다면야…… 굳이 막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느려 터진 일 처리를 구경하고자 일부러 찾아온 게 아니라서요. 협력하지 못하시겠다면, 여기서부턴 따로 움직이도록 하죠.”

요한의 표정이 굳었다. 그 역시 마법 함정 해제에는 마법사보다 효율적인 인물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쉽게 인정하기엔 자존심이 상하는 듯했다. 카델은 그런 요한의 속내를 꿰뚫어 보듯 빤히 응시하다, 그가 끝내 입을 열지 않자 한숨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서로 괜한 힘만 빼게 됐군요. 유감입니다.”

달래지 못한다면 불편함을 감수하고 옆에 붙어 있는 것보단 일찌감치 멀어지는 게 낫다. 그리 판단한 카델이 아직도 화가 나 있는 반의 팔뚝을 툭 치며 말했다.

“반. 우린 반대쪽으로 돌아가자.”

“네, 단장.”

요한은 망설임 없이 멀어지는 카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이내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