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잖아……. 움직임이 보이지도 않았어.’
카델은 자신에게 신도를 넘겨준 남자를 쳐다보았다. 로브를 벗은 그는 움직임을 따라 근육의 윤곽이 비치는 얇은 천 옷과 가벼운 흉갑 하나를 걸치고 있었다. 움직임의 제약을 최소화하기 위한 효율적인 방어구였다.
자신을 훑는 시선을 느낀 듯,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에서도 확연하게 도드라지는 푸른 눈동자.
“일단 신도 한 명은 확보했군. 이제 저 마녀를 해치우기만 하면 되는 거겠지? 대장.”
루멘 도미닉. 카델은 태생적인지 습관적인지 모를 그의 고고한 표정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쪽은 아직 네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어. 단숨에 몰아붙여.”
“내 특기지.”
그리 대답한 루멘의 신형이 순식간에 전방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그가 있던 자리에 남은 것은 어마어마한 각력이 남긴 작은 크레이터뿐. 카델은 쓰러진 메리를 자신의 옆에 눕힌 뒤, 침착하게 장막을 생성했다.
‘좋아. 지금까진 전부 계획대로 되고 있어.’
그는 처음부터 마녀가 소환해 간 신도들을 노리고 있었다. 마녀가 한눈을 판 사이 몰래 신도를 빼내 보호하는 것이 최우선 임무였다. 그 임무를 위해 일부러 루멘을 숨겨 두었다.
[섬광(閃光)의 기사, 루멘 도미닉]
루멘의 공격 속도는 모든 S급 기사를 통틀어 가히 최강이라 할 수 있었다. 그의 주특기는 섬광과도 같은 발도술(抜刀術)이었으며, 속도뿐만 아니라 뼈대를 그대로 절단하는 괴물 같은 근력 또한 갖추고 있었다.
마녀의 방심을 틈타 인질을 구해 내기에 루멘보다 적합한 이는 없다.
그리 판단한 카델이 반과 본인이 마녀의 주의를 끌고, 빈틈을 노린 루멘이 인질을 확보하는 그림을 그린 것이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이 빌어먹을! 빌어먹을 하등 종족이!”
눈 깜짝할 새 한쪽 팔을 잃은 마녀는 충혈된 눈을 부릅뜨며 마구잡이로 마법을 난사하고 있었다. 상대를 가리지 않는 시꺼먼 구체가 카델이 쳐 둔 장막 위까지 날아들었다.
조심스럽게 장막의 범위와 두께를 늘리며. 카델이 눈 앞에 펼쳐진 정신없는 난투를 지켜보았다.
마녀가 다치면 다칠수록, 그녀의 피를 머금으면 머금을수록. 반을 휘감은 붉은색의 오라는 점점 짙어졌으며, 그가 날리는 검기의 힘과 스피드도 눈에 띄게 증가했다. 움직임을 따라 붉어진 눈동자의 안광이 날카로운 잔상을 남기며 일렁였다.
반은 마녀의 공격을 절반 정도만 피하며 사정없이 돌진하고 있었다. 공격을 맞든 말든 흉흉하게 달려드는 강한 기세는 분노한 마녀조차 주춤하게 만들었다.
그 망설임을 포착한 루멘이 후방을 노렸다.
「쾌검난무(快劍亂舞)」
순식간에 마녀의 후방으로 얇은 섬광들이 스쳤다. 수십 개의 길고 짧은 실선들. 전혀 경계하지 않던 방향에서 느껴지는 살기에 마녀가 재빠르게 몸을 튼 순간.
“아아악!”
은빛의 잔상 그대로, 혈선(血線)이 그어지며 피가 뿜어져 나왔다. 우습게도 피가 뿜어지는 순간 그녀의 등이 바라본 곳엔 반이 있었기에, 이번에도 반의 대검은 핏물을 흠뻑 머금을 수 있었다.
물론, 전부 계획된 연계였다.
‘본격적인 전투에 들어가면 적의 몸에 최대한 많은 상처를 만들어 줘. 한 방에 죽일 수 있다면 상관없겠지만.’
‘……아하, 광전사로군. 소문은 익히 들어 봤지만 정말 피를 먹을수록 강해지는 검사가 있을 줄이야.’
‘피를 먹는 건 내가 아니다. 내 대검이지.’
반은 루멘이 자신의 부탁을 잊지 않았다는 것에 은근한 불쾌감을 느끼며 뺨에 뛴 핏방울을 문질러 닦았다.
“네놈! 네놈이로구나! 감히 내 팔을……!”
그리고 그제야 루멘의 존재를 알아챈 마녀. 그녀는 보란 듯 비웃음을 흘리는 루멘을 발견하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산발이 된 머리칼 사이로 그득한 살기가 들어찬 새카만 동공이 희번득 빛났다.
“죽여 주―!”
하지만 그녀의 경고보다 루멘의 공격이 더 빨랐다.
“얼마나 대단한 마족인가 했더니. 약한 놈만 골라잡는 무뢰한이었군. 이건 실망이 큰데.”
방금까지 코앞에 있었던 루멘이 사라졌다. 당황한 마녀가 뒤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고는 재빨리 몸을 틀었다.
하지만 그곳에 있는 것은 루멘이 아닌 반이었다. 반의 대검이 거침없이 그녀의 목을 노렸다. 마녀는 곧바로 장막을 만들기 위해 남은 팔을 들어 올렸으나.
툭.
이번에도, 전과 똑같이 팔뚝이 떨어져 나갔다.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서도 또 한 번 팔을 내어 준 것이다.
경악에 찬 마녀가 황급히 몸을 물렸으나, 이미 늦었다. 반의 대검이 그녀의 목을 깊숙이 베어 내고 있었다.
“꺼헉!”
비틀거리며 물러선 그녀가 절반이나 베인 목을 움켜쥐고자 했다. 하지만 목을 움켜쥘 손은 남지 않았고, 그녀는 피가 퐁퐁 솟아오르는 팔뚝을 목 근처로 갖다 대기 위해 안간힘을 쓸 뿐이었다.
서 있는 바닥이 흥건해질 정도로 심한 출혈과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달랑거리는 목. 죽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별것 아니었군.”
흥이 식는다는 듯, 중얼거린 루멘이 반쯤 뽑혀 나와 있던 장검을 납검했다. 신전이 기사단을 요청할 만큼 큰 사고를 일으킨 적이라기에 꽤 대단한 마족 정도는 되는 줄 알았더니. 실망스러웠다.
신전에 저 신도를 데려간다면 보상이야 두둑이 받을 수 있겠지만, 개인적인 성취감을 느끼기는 어려웠다. 쯧, 혀를 찬 루멘이 카델과 신도가 있는 방향을 향해 몸을 돌리고. 반 또한 끌어 올렸던 오라를 갈무리하던 바로 그때.
“이 멍청이들아! 아직 안 끝났어!”
후끈한 열풍과 함께,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카델의 기억 속에서 ‘마녀’라는 종족이 아주 강렬한 인상을 남길 수 있었던 이유. 거기엔 바로 적을 죽여도 끝나지 않는 페이즈가 있었다. ‘상대를 엿 먹이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느껴지는 연쇄 자폭 쇼. 화려하기까지 한 그 자폭 쇼가 넌더리 날 정도로 인상 깊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과 신도를 보호하던 장막을 거두고 재빨리 반, 루멘의 앞으로 장막을 꽂아 넣었다.
“크윽……!”
마녀는 폭발하고 있었다. 정신적인 폭발이 아닌, 실제 폭발이었다. 그녀의 몸에 난 상처에서부터 검은 불씨가 튀어 오르며 크고 작은 폭발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 폭발을 막아 내는 장막이 실시간으로 찢어지고 부서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카델은 마력을 퍼붓다시피 하며 끊임없이 장막을 새로 만들어 냈다.
“이게 무슨……!”
당황한 반과 루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부터 마녀의 자폭에 관해 알려 줬어야 했던 걸까? 하지만 카델은 이미 마녀를 대면하기 전, 자신의 기사들에게 ‘절대 방심하지 말고 적을 확실하게 죽여야 한다’는 경고를 해 두었다.
하도 자신만만하게들 대답하길래 무조건 원샷 원킬을 내 줄 줄 알았지! 서서히 죽어 가는 꼴을 보며 다 끝났다고 안심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죽어라! 네놈들을 지옥의 노리개로 써 주마!”
온몸이 폭발하는 와중에도 마녀는 소리 높여 깔깔거렸다. 반 잘린 양팔을 하늘 높이 치켜든 그녀의 목소리는 광기에 차 있었다.
반과 루멘은 쉴 틈 없이 이어지는 폭발에 꼼짝 못 하고 장막 뒤에 숨은 상태였다. 반은 대검을 바닥에 내리꽂은 채 불안한 얼굴로 카델을 바라보았고, 루멘은 깨지고 복구되길 반복하는 [화염 장막]을 응시하며 미간을 구겼다.
“그 커다란 검으로 머리통 하나를 제대로 베어 내지 못하다니. 피를 먹여 준 보람도 없군.”
“닥쳐. 애초에 너도 한 방에 죽일 자신이 없으니 얄팍한 칼질이나 해 댄 거잖아.”
“네가 편하게 죽일 수 있도록 양팔을 전부 잘라 내 줬던 것 같은데.”
“이게 네 쓸데없는 배려의 결과다. 저 여자의 팔뚝에 대포라도 달린 것 같군.”
본인들이 낸 상처에서 폭발이 나고 있다는 것은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루멘과의 짧은 언쟁을 마친 반은 입 안을 짓씹으며 카델의 상태를 살폈다.
‘장막 유지에는 마력이 많이 들어간다고 했는데. 언제 끝날지도 모를 폭발을 계속 막아 낸다면 단장의 몸이…….’
장막의 유지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폭발의 범위였다. 강한 폭발은 장막을 비껴가며 카델이 있는 쪽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하지만 카델은 자신과 루멘을 지키느라 본인을 방어할 장막을 생성시키지 못하고 있다. 이러다간 날아드는 불덩이를 피하지 못한 카델이 중상을 입을 수도 있었다.
그런 상상만으로도 온몸의 피가 바싹 마르는 기분이었다.
‘팔을 조금만 더 크게 휘둘렀다면!’
한 방에 머리통을 날리지 못했다는 게 이토록 통탄스러운 후회를 안겨 줄 줄은 몰랐다. 다 죽어 가는 꼴을 보며 안심할 게 아니라 확실한 일격을 먹여 주었어야 하는 건데.
처음부터 단장은 절대 방심하지 말라며 몇 번이고 당부했다. 믿음직스럽게 보이기 위해 물론 방심 따윈 하지 않는다고 호언장담했던 것이 조금 전인데. 과거의 자신을 찾아가 당당한 낯짝을 곤죽이 되도록 패 버리고 싶었다.
그렇게 반이 어떤 타이밍에 뛰쳐나가야 폭발에 휩쓸리지 않고 카델을 지키러 갈 수 있을지 고민하던 무렵. 불안정한 장막의 균열에 집중하던 루멘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장막을 버리자.”
“……뭐?”
그는 쭈그렸던 몸을 일으키며 검집의 위로 손을 올렸다. 결심한 듯 냉철해진 눈빛이 장막 너머의 마녀를 담아냈다.
“네가 못 한 마무리를 해 줄 테니, 그 커다란 검으로 시간 좀 벌어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