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521)

“그래서. 여기선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지?”

루멘이 소환 마법의 흔적을 살피며 물었다.

“루만 씨는 비명을 못 들었습니까? 아주 우렁찼는데요.”

“멀리서 비슷한 소리를 듣기는 했어. 소리를 따라서 이곳에 왔을 때는 이미 상황이 끝나있었지만.”

“그거 안 됐네요. 흥미로운 장면을 놓치다니.”

카델이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그 ‘흥미로운 장면’이 무엇인지 알려 줄 생각은 조금도 없어 보이는 태도에, 루멘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표정을 못 숨기길래 순진한 타입인 줄 알았더니. 의외로 능구렁이처럼 구는군.’

생긋 웃으며 제 부하에게 무언가를 속삭이는 꼴이 말간 외형과는 영 딴판이었다. 루멘은 카델에게서 시선을 돌려 거대한 원형의 그을음 자국을 살폈다.

맨땅이 그냥 타올랐을 리가 없는데. 암만 봐도 발화제로 쓰였을 법한 잔해가 보이지 않았다. 조금 특이한 것이라곤 원형의 자국 근처에 푹 파여 있는 작은 구덩이 정도. 아직까지 구덩이 위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걸 보면 이 원형의 그을음과 비슷한 시기에 생겨났을 가능성이 컸다.

‘비명을 질렀던 사람은 어디 있는 거지?’

그을음의 출처도, 그 옆에 난 구덩이의 생성 원인도, 비명의 주인도 알 수 없다. 추리에 듬성듬성 구멍이 생겨나니 갑갑한 기분이 들었다. 카델이란 작자는 분명 중요한 장면을 목격한 듯한데, 태도로 보아 그 정보를 나누고 싶어 하진 않는 것 같고.

아무래도 접근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루멘은 카델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자신보다 한 뼘은 아래에 위치한 작은 머리통이 움직이며 깊은 다갈색의 눈동자가 이쪽을 향했다.

“그 흥미로운 장면에 대해 설명해 줄 생각은 없는 건가?”

“음……? 물론이죠!”

질문의 의도와는 맞지 않는 명쾌한 대답이었다. 조금 어이가 없어지려는데, 카델이 다시 말을 이었다.

“루만 씨도 신전의 소문을 듣고 찾아온 거 아닌가요? 신전이 공식적으로 기사단을 요청해 흉흉한 소문의 근원을 잠재우기 전, 먼저 선수를 쳐 보상을 요구하려는 속셈이잖아요.”

“그건…….”

“설마 아니라고 하진 않겠죠. 들어오는 의뢰를 처리해 근근이 먹고 사는 처지에.”

할 말이 없었다. 카델의 화법은 의미심장하면서도 직설적이라, 순식간에 상대의 변명거리를 쏙 빼앗아 제 손아귀에 들고 딸랑거리는 데에는 도가 터 있었다.

루멘은 그런 카델이 얄미웠으나,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신의 입장을 이토록 정확하게 꿰뚫었다는 것은, 카델 또한 비슷한 처지라는 뜻이니. 그가 여유롭게 웃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같은 처지에 서로 돕고 살아야 하지 않겠어? 혹시 모르잖아. 내가 그쪽에게 큰 도움이 될지.”

“아뇨. 전혀 되지 않을 겁니다.”

“……난 꽤 강해. 뭣하면 직접 붙어 봐도 좋아.”

“이런. 더더욱 도움이 되지 않겠군요.”

슬쩍 튀어나온 비웃음에 루멘의 여유롭던 표정에 금이 갔다. 오랜 세월 이름난 세가의 공자로 살아온 만큼, 그는 자존심이 강했다. 떠돌이 검객 행세를 하며 돈이 필요해지면 때때로 용병처럼 의뢰를 받기도 했으나. 그런 생활을 하면서도 한 번도 굽히고 들어간 적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그로서는 꽤 많이 봐주고 들어갔음에도, 철옹성처럼 굳건한 카델의 태도를 보고 있자니 상당히 배알이 꼴렸다. 내가 진짜 정체를 밝혀도 이런 식으로 나올 수 있을까? 그런 오만한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현재 루멘의 상황은 썩 좋지 못했다.

자금은 거의 바닥난 데다 시시때때로 가문이 붙여 오는 추격꾼들에게 시달린 지가 근 한 달. 그들에게 ‘어서 돌아오지 않으면 가문에서의 네 위치가 위태로워질 거다’라는 협박성 회유를 듣느라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다. 함부로 얼굴을 내놓고 다니지도 못해 갑갑한 후드를 뒤집어쓰고 다니느라 신경도 예민해졌다.

빠른 시일 내에 눈에 띄는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출가할 때의 원대한 포부를 조금도 이루지 못한 채 가문으로 복귀해야 하리라. 그런 수치라니. 그런 수모를 겪느니 차라리 눈앞의 자그마한 남자에게 머리를 조금 숙여 보는 쪽이 나았다. 숙여 봤자, 자신의 머리는 여전히 그의 위에 있을 테니까.

“난 네 도움이 필요해. 그만큼 네게 도움을 줄 생각도 충분히 있지. 신전이 기사단까지 불러낼 정도로 중대한 사안이라면, 너희 둘만으로는 감당하기 힘들 텐데. 내 말이 틀린가?”

그리 말하는 루멘의 눈빛은 당당했으며, 쫙 펴진 어깨와 아름다운 외모 또한 몹시 매력적이었다. 다른 이였다면 루멘의 외관에 홀려 못 이기는 척 정보를 흘려 주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루멘의 상대는 카델이었다. 심지어 카델의 뒤에는 루멘이 무슨 말만 해도 콧방귀를 뀌며 언짢아하는 충견까지 있었다.

“제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모양입니다.”

카델은 유감이라는 듯 눈썹을 늘어뜨렸다. 그러고는 대놓고 한숨을 쉬며 팔짱을 꼈다.

“루만 씨. 당신과 저희의 목표는 같습니다. 바로 그게 저희가 협력할 수 없는 이유예요.”

“그게 무슨 말이지?”

“전 당신과 공을 나눌 생각이 조금도 없어요. 모든 공은 저희 적린 용병단이 가져갈 겁니다. 그리고 바로 이곳, 헤르멜 도시에서 ‘적린’이라는 이름이 제대로 알려지게 될 테죠.”

루멘의 눈이 가늘어졌다. 카델은 진심인 듯 보였다. 그는 단순히 신전을 상대로 막대한 보상을 요구하고자 찾아온 것이 아니라, 용병단의 이름값을 올리기 위해 신전을 찾은 것이었다.

‘곤란하게 됐군.’

이런 목적이라면 더더욱 정보를 빼내기가 힘들어진다. 게다가 오늘은 물러나더라도, 앞으로 계속해서 카델 쪽과 부딪힐 일이 생길 것이다. 둘 중 한쪽이 신전을 파헤치는 일을 멈추지 않는 한.

“하지만…… 저희가 협력할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죠.”

루멘이 막막한 미래를 타파할 방도를 고심하는 동안, 카델은 처음과는 달리 호의적인 시선으로 그를 천천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발언을 했다.

“적린 용병단에 들어오세요. 이쪽의 일원이 된다면, 정보를 숨길 이유는 사라질 테니.”

⚔️

퀘스트를 진행하는 이 짧은 기간 안에 저 콧대 높은 귀족의 충성을 얻는다?

‘말도 안 되지. 무리야.’

그렇다면 여성향 게임이라는 세계관의 정체성을 살려 미인계로 루멘을 살살 녹여 낸다?

‘미쳤어? 생리적으로 불가능이라고.’

이것도 저것도 안 되는데 평범한 단계를 거쳐 루멘 도미닉을 입단시키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래서 카델은 ‘실익을 따져 입단하도록 유도하기’를 택했다.

충성심? 그딴 건 일단 묶어 놓고 쌓으면 된다. 루멘이 옆에 붙어 있어만 준다면 작위적인 방법으로라도 단장의 면모를 보여 줄 기회는 많았다.

지금 카델은 충직한 부하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퀘스트를 무사히 진행시켜 줄 전력이 필요했다.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전력이.

“……단장.”

“응?”

“단장의 선택은 존중하지만, 전 저 녀석을 조금도 믿을 수 없습니다. 이름부터 가짜로 밝혔잖아요. 게다가 단장에 대한 충심이라곤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카델의 옆에 딱 붙어 속삭이던 반이 뒤에서 자신들을 따라오는 루멘을 흘겼다. 따가운 시선이었으나, 루멘은 그들이 안중에도 없다는 듯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어이, 대장. 정말 소환 마법을 발동시킨 마녀가 근처에 있는 거 맞아?”

설렁설렁 주변을 살피던 루멘이 목소리를 높였다. 반은 그 격식 없는 말투에 이를 갈았다.

“보십쇼. 저 건방진 말투. 멋대로 대장, 대장, 부르질 않나 반말을 틱틱 내뱉질 않나. 물론 단장은 누가 봐도 동안이니 어림짐작으로 자기보다 어리다고 판단했을 수는 있지만요. 저 녀석의 그런 섣부른 판단력까지 포함해서 전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요.”

“하하…….”

“귀족 놈들은 믿을 수 없어요. 분명 본인의 이득을 위해 움직일 겁니다.”

“나도 전직 귀족이었는데…….”

“단장은 언제나 예외잖아요.”

카델이 뾰로통한 반을 달래듯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미안하게도, 본인의 이득을 위해 움직이는 쪽은 오히려 이쪽이었다. 자신이 입단을 제안하기 전까지, 루멘은 이런 식으로 정보를 공유하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 했을 테니까.

큰 싸움 전에 전력을 키우기 위한 필연적인 선택이라지만, 반의 입장에선 껄끄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귀족 혐오증에 걸린 남자와 태생부터 귀족인 남자라니. 부딪히지 않는 게 신기한 일이겠지.

‘하지만 그것도 차차 고쳐 가면 될 거야. 같은 단원으로서 몇 번이고 사생결단의 사투를 치를 텐데. 보통 그런 동료 사이에 끈끈한 감정이 피어나지 않는 게 어려운 거잖아?’

카델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비록 루멘을 입단시키자마자 확인했던 프로필이 조금 거슬리긴 했지만…….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