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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후보의 정체가 루멘 도미닉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이제는 자연스러운 접근만이 남았다. 그래서 카델은 되지도 않는 헛소리로 루멘의 심기를 건드리는 대신. 그에게 관심이 없는 척,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끌어내기로 결정했다.
“생각보다 신전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군요. 바빌 마을까지 건너온 소문치고는 잠잠했어요.”
현재 카델과 반은 소문의 근원지인 ‘데폴로 신전’을 향하는 중이었다. 데폴로 신전은 아주 오래전, 마계 봉인을 주도하여 이름을 날린 ‘세븐 나이츠’ 중 한 명인 로덴과 그의 수호신인 데폴로를 모시는 신전이었다.
마이뉴 왕국을 포함한 7대국은 각각 한 명의 기사와 한 명의 수호신을 모셨다. 그러니 마이뉴 왕국을 벗어나기 전까진, 어느 신전에 가도 로덴과 데폴로를 볼 수밖에 없다. 카델은 게임의 세계관을 곱씹으며 대답했다.
“소문의 근원지니까 겉으로는 더 잠잠하겠지. 다른 것도 아니고 신성한 신전에 관한 찝찝한 소문이잖아. 가뜩이나 관광객도 많은데, 위신을 떨어뜨릴 순 없을 거야.”
“그럼 저희 같은 외부인은 끼어들기 힘들겠군요. 소문이 사실이라면, 신전도 입단속과 일 처리가 확실한 기사단을 고용할 테니.”
“아마 그렇겠지.”
그럼에도 카델이 데폴로 신전을 찾은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루멘 도미닉이 헤르멜 도시에 머무는 이상, 그는 무조건 신전의 냄새를 맡는다. 냄새를 맡은 루멘은 어떤 식으로든 사건에 관여될 것이다. 루멘은 돈 많은 세가의 차남이었지만, 현재의 그는 신분을 숨긴 채 여행하는 중이었으니까.
가문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여행길은 오래될수록 궁핍해지기 마련이다. 루멘은 돈이 필요하고, 헤르멜 도시에서 그의 신분과 재정 상태에 이보다 적당한 일거리는 없다.
그리고 둘째. 신전에 관한 소문은 헛것이 아니다.
원인은 모르겠지만 신도들은 계속해서 실종되고 있었고, 신전은 이를 막기 위해 실력이 뛰어난 기사단을 고용할 것이다. 어쩌면 이미 고용해서 기사단이 신전을 향해 움직이는 중일지도 모른다. 카델은 그 과정을 기다려 줄 마음이 없었다.
그는 기사단이 오기 전. 그들보다 먼저 움직여 사건 해결의 공을 가로챌 계획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누구보다 먼저 사태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카델이 이렇게 소문의 진위를 확신하며 계획을 설계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메인 퀘스트 ‘신전의 그녀’ 수락 완료!」
「퀘스트를 클리어하여 스토리를 진행하십시오. 보상이 주어집니다.」
「실패 시, 기사단의 명성이 10 하락합니다.」
데폴로 신전 가까워짐과 함께 떠올랐던 시스템 창. 신전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자신이 해결해야 할 과제임을 확인시켜 주는 알림이었다. 그는 새 메인 퀘스트의 페널티를 떠올렸다.
‘실패하면 명성이 10 하락해? 참나. 지금 명성이 고작 7인데, 마이너스라도 달란 소린가?’
명성이 마이너스라니. 그건 그냥 악명이지 않은가.
‘하지만 그 정도로 리스크가 크다는 거겠지. 몰래 신전을 뒷조사하고 멋대로 들쑤신 주제에 원흉을 해결하지도 못한다면…….’
최악의 경우엔 책임을 묻게 될 수도 있다. 카델의 낯빛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첫 번째 퀘스트에서도 느꼈지만, 스토리 초반인 주제에 페널티가 너무 컸다. 부하의 목숨을 쥐고 흔들질 않나, 있지도 않은 명성을 떨어뜨리겠다고 협박하질 않나. 괜히 기분이 나빠져 인상을 구긴 카델의 옆으로, 반이 바짝 붙어 왔다.
“단장, 근처에서 인기척이 느껴져요.”
둘은 곧장 신전과 이어지는 길목에서 벗어나 그 옆에 난 수풀에 몸을 숨겼다. 대놓고 들어갔다간 얼굴이 팔릴 테니, 일을 깔끔하게 마무리 짓기 전까진 수상쩍을지라도 염탐하는 편이 나았다.
카델은 숨소리를 죽이며 몸을 웅크렸다. 반은 그와 마주 본 자세로 수풀 너머를 향해 눈을 굴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이렇다 할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답답함을 느낀 카델이 살짝 입을 연 그 순간. 반이 그의 입술 위로 검지를 올리며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다.
‘뭐, 뭐야. 너무 가까운 거 아니야……?’
숨결이 느껴질 정도였다. 반사적으로 몸을 뺀 카델이 중심을 잃고 휘청이자, 반이 곧바로 그의 허리를 감싸 당기면서 거리는 더욱 가까워져 버렸다. 당혹감에 열에 오를 정도인데.
내가 과민한 건가? 반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그를 거의 품 안에 가두다시피 한 자세를 유지하며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신도들이에요. 뒤를 밟을까요?”
카델이 반의 어깨 위에서 맹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뒤를 밟지 않는다면, 이 친밀함의 도가 넘는 자세를 버티다 졸도할 것 같았다.
신도들은 여성 한 명과 남성 두 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들은 신전 뒤편에 난 숲길을 통해 이동하는 중이었고, 카델과 반은 최대한 기척을 죽인 채 신도들의 뒤를 밟았다.
“무슨 얘기하는지 들려?”
나무 기둥 뒤에 몸을 숨긴 카델이 물었다. 신도들과의 거리가 꽤 되는 데다 밤이 깊어 가는 터라 얼굴마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반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모든 감각을 청각에 집중시켰다. 그러자 희미하게나마 신도들의 대화가 들리기 시작했다.
“번거롭게 해서 죄송해요, 형제님들. 다른 물건이라면 날이 밝는 대로 혼자 찾아봤겠지만…….”
“아닙니다, 형제님. 다른 것도 아니고 아버님의 유품인걸요. 잃어버린 채로는 잠도 안 올 겁니다.”
“하아. 잃어버린 게 이 근처였으니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세 명의 신도는 여자가 잃어버린 물건을 찾기 위해 숲을 수색하는 중인 듯했다. 남신도 둘은 시무룩한 여신도를 다독이며 주변을 두리번거렸고, 한동안은 별 영양가 없는 대화들이 오갔다.
점점 벌어지는 거리에 엿듣는 걸 멈추고 이동하려 할 때였다. 여신도가 불안한 듯 움츠러든 목소리로 말했다.
“형제님들이 아니었다면 찾아볼 엄두도 못 냈을 거예요. 초조하게 기도하는 게 전부였겠죠.”
“그 악마가 저희의 믿음을 시험하고 있는 겁니다. 절대로 굴복해서는 안 돼요. 이럴 때일수록 로덴 님의 용맹함과 데폴로 님의 자비로움에 기대야 합니다.”
“그럼요! 그런데…… 정말 마녀일까요?”
……마녀?
뜻밖의 단어에 반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그는 시선을 신도들에게로 고정한 채 카델의 손목을 가볍게 움켜쥐었다.
“계속 따라붙어 보죠.”
“뭐가 들리기는 해?”
“더 들어 봐야 알 것 같습니다.”
그는 카델을 데리고 맞은편의 나무 기둥을 찾아 숨었다. 어두운 색의 로브와 짙은 그림자 덕분에 은신은 비교적 쉬웠다. 일반 신도들이니 기척을 알아챌 확률도 낮았고.
“아무리 마족이라지만, 마녀가 사람을 먹는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도 없는데……. 너무 끔찍하지 않나요?”
“쉿! 그만하세요. 사제님께서 추측이라도 입 밖으로 내지 말라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다 소문이 번지기라도 하면 신전이 타격을 입게 될 거라고요. 데폴로의 신도들만 골라잡는 마족이라니…….”
애매한 거리와 웅얼거리는 말투 때문에 대화가 온전히 들리지는 않았지만. 들려오는 단어들만으로도 소문의 근원을 짐작하기에는 충분했다. 반은 핵심 단어들을 조합하여 카델에게 전달했다.
“신도들은 실종이 아니라 사망한 것 같은데요, 단장. 마족에게 잡아먹혀서요.”
“마족?”
“신도들만 노리는 마족이 있나 봅니다. 그게…… 마녀일지도 모르고요.”
카델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다.
‘「히어로 오브 나이츠」에 등장하는 마녀라……. 몇 놈 기억나긴 하지만, 전부 좋은 기억은 아니야.’
상대했던 모든 마녀가 까다로워 번번이 클리어에 애를 먹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녀들의 종잡을 수 없는 성격과 무지막지한 마법 실력도.
‘정말 마녀가 맞다면 최대한 빨리 루멘 도미닉을 영입시켜 봐야겠는데.’
반의 실력이야 두말할 것 없이 뛰어났지만, 문제는 자신이었다. 마녀는 마족이었고, 마족의 대부분은 마법에 능통했으며, 마녀는 그중에서도 최고점에 가까웠다.
하지만 카델은 아직 마법을 완벽하게 숙지하지 못했을뿐더러 응용력도 떨어진다. 그런 상태에서 자신보다 월등히 뛰어난 마법사를 상대해야 하는 입장이니, 자신을 제외하고도 전력을 채워 줄 만한 인물이 필요했다.
“일단 오늘은 물러나자. 신도들 입에서 나온 얘기니까 신전에 문제가 있다는 건 확실할 테고. 날이 밝으면 본격적으로 정보를 수집―”
판단을 마친 카델이 후퇴를 결정할 무렵이었다.
“꺄아아악!”
신도들이 있던 방향에서부터 자지러지는 비명이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것은.
“사, 살려, 살려 줘!”
세 신도를 감싼 칠흑의 불꽃. 그림자보다도 짙은 어둠에 휩싸인 그들이 주변을 둘러싼 높은 불길 속에서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카델이 그들을 향해 뛰쳐나간 것은 거의 본능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손바닥에 마력을 응축시킨 그가 신도들을 감싼 불꽃 대신 바로 옆 바닥을 향해 [화염구]를 쏘았다.
콰광!
짧은 폭음과 함께 흙이 솟구치며 불꽃을 진화하듯 그 위로 끼얹어졌다. 자욱하게 흩날리는 흙먼지. 더 이상의 비명은 들리지 않았다.
“괜찮으십…….”
카델은 흙먼지를 뚫고 신도들이 있던 자리까지 도달했다. 사람들의 상태를 살피려던 그가 일순 표정을 굳혔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이지?’
없었다.
“단장! 갑자기 그렇게 튀어 나가시면…….”
좀 전까지만 해도 불길에 휩싸인 채 비명을 질러 대던 신도들이, 흔적도 없이 증발해 버렸다.
그를 뒤따라온 반 또한 눈앞의 텅 빈 공간을 발견하곤 말을 멈췄다. 그들의 앞에는 새카맣게 그을린 원형의 자국만이 남아 있을 뿐. 그 안에 갇혀 비명을 내지르던 신도들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마법의 일종일까? 아니면 그 짧은 사이에 전신이 발화해 뼛가루조차 남지 않은 걸까?
불꽃을 꺼뜨리기 위해 일으켰던 폭발 때문에 신도들이 사라진 찰나의 순간을 지켜보지 못했다. 카델이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신발코로 유일한 흔적인 그을음을 짓밟듯 문질러 보았다.
‘자국이 얼마나 깊은 거야? 파도 파도 계속 까만 게 나오잖아.’
이 정도 깊이라면 더 이상 그을음이라고 볼 수도 없었다. 그 불꽃은 땅에서부터 치솟았다. 일종의 함정이라고 볼 수 있었다. 카델은 이러한 종류의 함정에 관해선 아주 해박했다. 더럽게 많이 당해 보았기 때문이다.
“전부 불타 버린 걸까요?”
반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주변의 흔적을 살폈다. 카델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이건 소환 함정이야.”
“소환 함정이요?”
“발동하자마자 상대의 피통, 아니, 체력을 반이나 갉아먹는 징그러운 소환 마법이지. 지금쯤 소환당한 신도들은 도망칠 기력도 없는 상태일 거야.”
“대체 누가 그런 마법을…….”
마녀. 이런 악독하고 성가시며 진절머리 나는 소환 마법을 장난처럼 써 댈 수 있는 자는 마족, 그중에서도 마녀뿐이었다.
‘불꽃의 색이 검었어. 암흑 속성 마녀인가. 초반 스토리에 등장하는 암속 마녀라…….’
짐작 가는 인물이 있었다. 오래된 기억의 왜곡을 감안하고서도, 그 마녀는 카델이 공략했던 적들 중 성가심으로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혔다.
육성 극초반. 가진 기사도, 장비도 변변찮았던 시기. 그런 시기에 맞닥뜨리기엔 과할 정도로 신경을 긁어 대는 스킬을 난사했었지.
카델이 과거의 고통을 되새기며 인상을 찌푸리는 동안, 함정 발동자의 정체를 고민하던 반이 눈을 번뜩였다. 순식간에 가라앉은 그의 눈빛이 좌측에 난 수풀 너머를 응시했다.
“누구냐.”
예민한 짐승처럼 형형히 빛나는 금안이 수풀 너머의 깊은 어둠을 응시했다. 반의 손은 이미 대검의 손잡이에 가 있었고, 기척을 알아채지 못했던 카델 또한 눈치 빠르게 마력을 응축시켰다.
그리고 곧 침묵을 뚫는 발소리와 함께, 수풀 너머에서 로브의 후드를 뒤집어쓴 한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걸 들킬 줄은 몰랐는데.”
남자의 목소리를 들은 카델의 눈이 커졌다.
“그쪽은…….”
“여기서 당신을 또 볼 줄도 몰랐고 말이야.”
루멘 도미닉!
그는 카델을 응시하며 후드를 내렸다. 이미 한 번 얼굴을 보였으니 더 가릴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듯했다.
카델은 타이밍 좋게 나타난 루멘에게 음흉한 미소를 짓지 않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써야만 했다. 그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루멘 도미닉의 존재가 별것 아니라는 듯 태연한 표정을 지어냈다.
“뭘 하고 있었길래 여기서 튀어나오십니까?”
“그러는 그쪽이야말로.”
“저희는 신전 근처를 산책하다가 우연히 비명을 듣고 달려온 겁니다.”
카델은 보란 듯이 신발 밑창으로 바닥에 난 자국을 문질렀다. 루멘은 그가 지우려 하는 자국을 응시하며 조소를 머금었다.
“이 시간에 신전 근처를 산책하고 있었다는 변명은 좀 웃긴 것 같은데.”
“예, 뭐. 제가 이름도, 정체도 모르는 사람을 위해 공들여 변명할 필요는 없죠. 대충 알아들어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루멘의 푸른 눈동자 위로 이채가 스쳤다. 그는 흥미롭다는 듯 카델을 훑어보고는, 그 뒤에서 당장이라도 자신을 썰어 죽일 듯 살벌하게 으르렁대는 반을 일별했다.
아무래도 자신이 한발 늦은 모양이었다. 신전에 관한 뒷소문을 듣고 진위를 판별하기 위해 찾아온 것인데, 선객이 있을 줄은 몰랐다. 루멘은 잠시 무언가를 고민하며 로브 아래에 가려진 검집을 만지작거리다, 이내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루만이라고 한다. 가끔 들어오는 의뢰를 처리하면서 근근이 먹고 사는 방랑자지.”
“……루만. 꽤 멋없는 이름이네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루만이라니. 심지어 성도 갖다 팔았다. 아무래도 루멘은 자신에게 본명을 밝힐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가 루멘의 정체를 알고 있든 아니든. 최대한 모르쇠로 일관할 셈인가 보지. 좋다.
카델은 넘어가 주기로 했다. 그는 루멘을 무조건 영입할 생각이었고, 루멘에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신분을 모르는 척하며 친근하게 구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그러한 이유로, 카델은 들으란 듯 코웃음을 치는 반을 슬쩍 밀치며 루멘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카델이라고 합니다. 적린 용병단의 단장이죠.”
“멋있는 이름이군.”
“저도 압니다.”
맥 빠지는 웃음소리와 함께, 루멘이 카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짧은 악수 사이로 속셈 가득한 두 시선이 교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