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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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치유가 끝나지 않았네! 그렇게 멋대로 움직이면……!”

“필요 없어. 내 몸에 손대지 말고 꺼져라. 단장, 카델 단장은 어디 있는 거지?”

치유실 안. 반은 전신에 붕대를 휘감은 채 치유사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그는 보기만 해도 진저리가 나는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자신의 상태도, 이곳이 스트라 자작의 저택이라는 사실도, 단장의 행방을 알 수 없다는 상황도 전부 불쾌했다. 기분이 너무 더러워서 까딱했다간 눈앞의 치유사를 죽여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런 반의 살기를 느낀 듯, 그를 막아서던 치유사가 주춤했다. 당장 피를 보아도 아무렇지 않을 것 같은 냉혹한 시선을 마주하자, 자작의 명령이든 뭐든 다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치유사가 떨리는 오금에 힘을 주던 바로 그때였다.

험악하던 반의 표정이 봄이 찾아온 것처럼 온화하게 풀리며 어딘가를 향해 소름 끼칠 만큼 따뜻하게 웃어 보이는 것이 아닌가. 당황한 치유사가 반의 시선이 닿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기도 전, 반이 먼저 그의 어깨를 밀치며 맞은편으로 걸어갔다.

“단장! 어디 계셨어요? 안 보여서 계속 불안했단 말이에요.”

“미안, 미안. 몸은 좀 어때. 괜찮아?”

“당연하죠. 이제 완치됐어요.”

방금까지만 해도 사람 한둘은 너끈히 죽일 것처럼 살벌하게 굴던 사내가. 단장이라는 남자 앞에서는 꼬리 아홉 달린 여우처럼 아양을 떨어 대고 있었다. 어처구니를 상실한 치유사가 헛웃음을 뱉자, 카델의 시선이 뒤늦게 그를 향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덕분에 살았어요.”

“……인사는 자작님께 하시면 됩니다.”

“혹시 주의 사항 같은 게 있을까요? 당장은 휴식을 취해야 한다든지…….”

휴식? 치유 작업도 다 마치지 못했는데 휴식은 무슨 휴식이란 말인가.

그렇게 쏘아 주고 싶었으나…… 카델의 뒤편에 음침하게 서서는 이쪽을 죽일 듯 노려보고 있는 반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자니, 도저히 말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치유사는 대충 얼버무리듯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완쾌하셨으니 당장 뛰어나가셔도 돼요.”

“아! 다행이네요. 그럼 나가자, 반. 할 말이 있어.”

정중한 인사와 함께 반을 데리고 나가는 카델의 뒷모습을 보며. 치유사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단장이란 사람이 불쌍하군…….”

“그 귀족 놈이 자기 휘하의 마법사로 들어오라는 제안을 했단 말입니까?”

아직 그 귀족 놈의 저택 안에 있으면서도 반은 거리낌 없이 자작을 비웃었다. 카델은 대신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길거리 용병보다야 자작의 보호와 지원을 받는 마법사가 낫긴 하다. 아마 반 또한 그렇게 생각할 것이고, 자신이 그를 버리는 선택을 할까 봐 불안해하겠지.

하지만 그럴 일은 없다. 적어도 이 세계에 머물고 있는 이상, 카델의 목표는 안정적인 삶의 영위가 아니었으니까.

그는 쓸데없는 오해가 생기기 전 사실을 전달하려 했다. 오해만큼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것도 없으니까. 하지만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반이 먼저 선수를 쳤다.

“의뢰비도 주기 전에 그런 제안부터 하다니 치졸하기 짝이 없군요. 그래서 단장의 계획은 뭔가요? 일단 돈부터 받고 거절할 생각인가요?”

걱정과 달리, 반은 아예 ‘카델이 용병단을 버린다’는 선택지를 생각조차 않는 듯했다. 신뢰가 가득 담긴 아름다운 황금빛 눈동자. 그 안에 떠오른 자신의 그림자를 마주하고 있자니, 카델은 괜스레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살면서 누군가에게 이토록 투명한 신뢰를 받아 본 적이 있던가. 물론 반의 충성은 이런저런 시스템의 농간으로 이루어진 것이겠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그래야지. 그래서 혹시라도 네 치료가 오래 걸릴까 봐 확인하러 온 거야. 난 돈만 받고 내뺄 생각이거든.”

“하지만 자작의 영지에 머무르는 한 간섭을 피하긴 어려울 텐데요. 강압적인 방법을 사용할지도 모르고요.”

“그렇지. 원래는 이곳에 좀 더 머물면서 다른 의뢰를 찾아볼 계획이었지만…….”

카델이 한숨과 함께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처음 계획은 ‘한낮의 고래’에서 다수의 의뢰를 처리하며 자본을 늘리는 것이었다. 겸사겸사 훈련도 하며 능력치도 키우고. 게임도 그런 식으로 진행했으니까. 하지만 이 세계는 그가 스토리를 미룬 채 성장에 집중할 수 있게끔 놔두지 않았다.

‘뭐…… 잠시 자작가에 머물면서 지원받는 돈으로 반을 키울 수도 있겠지.’

어쩌면 그쪽이 더 효율이 높을지도 몰랐다. 대신 반의 충성도는 폭락할 위험이 있겠지만.

반은 귀족을 혐오한다. 이유는 개별 스토리를 찾아보지 않아 자세히 알지 못했으나, 어쨌든 반 헤르도스의 귀족 혐오 사상은 뿌리 깊었다. 그가 따르는 것은 몰락 귀족인 카델뿐. 그러니 반은 카델이 스트라 자작의 아래에서 충성을 바치는 짧은 기간도 못 견뎌 할 것이 뻔했다.

‘물론 다짜고짜 날 배신하지는 않겠지만, 찝찝하잖아. 난 사이좋게 지내고 싶다고.’

자작가에 소속되는 것이 꼭 필요한 수순도 아니고, 스모그 평원 건의 의뢰비만 받는다면 당장 돈이 급해 밥을 굶는 일도 없을 것이다. 조금 편하게 가자고 앞으로의 행보를 어렵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스트라 자작의 영지를 벗어나려면 얼마나 걸리는지 알아?”

“음, 여기서 가장 가까운 곳은 헤르멜 도시일 거예요. 수도인 드라키움과도 인접해서 일감 찾는 것도 더 수월할 테고……. 말을 타고 가면 사흘 정도 걸리겠죠.”

“사흘이라.”

사흘이라니! 카델은 속으로 욕설을 난무하며 주먹에 힘을 주었다.

그는 지금도 밤을 꼬박 새운 탓에 눈 밑이 퀭했고, 당장 찝찝한 몸에 목욕물을 끼얹어 벅벅 문지르고 싶었으며, 배가 고파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그런데 바로 내일 아침부터 사흘간의 여행길에 올라야 한다니.

‘노숙해야 하나? 하겠지, 노숙? 벌레도…벌레도 많을 거야. 춥고, 바닥은 딱딱하고, 먹을 거라곤 텁텁한 빵이나 육포뿐일 거고…….’

상상만으로도 울적한 나머지 그의 눈썹이 힘없이 처졌다.

“단장? 왜 그래요, 피곤하세요?”

카델의 우울한 표정이 신경 쓰였는지 반이 고개를 기울여 그의 안색을 살폈다. 걱정 가득한 시선이 닿아 오자 카델의 기분도 조금은 나아졌다.

‘그래. 나만 고생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제대로 성장하기만 하면 이런 고생길도 안녕이야.’

지금은 투정 부릴 때가 아니다. 사흘이건 나흘이건 고생 좀 하면 어떤가. 고생해서 얻는 게 있다면 그건 불행해할 일이 아니었다.

“일단 뭐부터 좀 먹자. 배고파서 쓰러지겠어.”

“그 귀족 놈이 식사도 대접하지 않았습니까?”

“차를 주더라. 그건 그렇고, 너 자꾸 귀족 놈, 귀족 놈 하면―”

“흥, 아무리 단장이 이슬만 먹게 생겼다지만 그놈도 참 생각 없군요. 방금까지 싸우고 온 용병이 향기 나는 물 따위를 마시고 싶겠어요?”

대체 뭐라는 거야. 카델은 이마를 짚으며 반을 저택 밖으로 끌어냈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머물렀다간 사달이 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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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델과 반은 노점이 늘어선 거리를 거닐었다. 식당에 들어가기엔 수중의 돈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잘 차려진 한 끼를 대신해 카델은 양손에 꼬치구이를 쥐었으며, 반은 옆에서 그가 목이 막혔을 때를 대비한 물통을 들고 있었다.

“네가 입맛이 없다니까 내가 다 먹는 거긴 한데, 나중에 의뢰비 받고도 먹는 거 거절할 생각은 말아라.”

“알겠어요, 단장.”

천사처럼 웃고 있는 얼굴을 보니 더 잔소리할 의욕도 사라진다. 카델은 설설 고개를 저으며 꼬치를 뜯는 일에 열중했다. 그러다 문득 잊고 있던 물건이 떠올랐다.

“아, 맞아. 이것 좀 들고 있어 봐.”

카델은 꼬치를 전부 반에게 떠넘긴 뒤, 반이 메고 있던 자신의 짐 가방을 찾아 안을 뒤적거렸다.

“단장……? 뭐 하시는 거예요?”

“줄 게 있거든.”

“저한테요?”

“너 말고 줄 사람이 어딨냐?”

그가 짐 가방 안에서 꺼내 든 것은, 어딘가 익숙하게 생긴 기다란 잿빛 붕대였다. 반은 카델이 내민 붕대를 내려다보며 어색하게 눈웃음을 지었다.

“또 붕대네요?”

“그냥 붕대가 아냐, 인마. 미라 퀸한테서 나온 고급 아티팩트라고.”

이 붕대의 정체는 바로 그가 퀘스트 보상으로 얻었던 히든 아이템, [퀸의 붕대]였다.

반을 만나기 위해 치유실을 찾던 중 보상의 존재가 떠올랐던 카델. 그는 아이템이 ‘인벤토리’라는 가상 저장고에 보관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한 뒤, 물건을 밖으로 끌어냈다.

‘가지고 있으면 약한 언데드들은 접근하지 못하는 데다 몸에 감으면 회복력을, 장비에 감으면 내구도를 올려 주는 초고급 아이템! ……이라는 걸 설명하긴 귀찮으니까 그냥 둘러대야지.’

카델은 애써 당혹감을 숨겨 보려는 반에게서 붕대를 빼앗아 들고는 그의 등에 달린 대검을 칭칭 휘감기 시작했다. 까치발까지 들어 꼼꼼하게 붕대를 감자 꽤 멋들어진 모양새가 되었다. 적어도 처음 반이 가지고 있던 넝마 같은 천 쪼가리보단 보기 좋았다.

“좋아. 갖고 다니면 좋은 일이 생길 테니까 절대 잃어버리지 마라.”

“그렇게 귀한 물건인데 절 주셔도 되는 거예요? 차라리 단장이 가지는 건…….”

“무슨 소리야? 넌 내 사람이잖아. 내 사람한테 좋은 물건을 주는 건 조금도 아깝지 않다고.”

게다가 자신에게는 저 기다란 붕대를 감을 장비도 없었다. 그리고 초기 자본 투자는 플레이어보다 기사들에게 몰아주는 편이 성장에 도움이 되기도 하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흡족하게 반의 어깨를 두드리는데, 갑자기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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