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포인트가 있잖아? 안 보고 갔으면 큰일 날 뻔했네.’
스토리 초반의 속성 배분은 상당히 중요했다. 마법 속성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의 종류가 다른 데다, 줏대 없이 여기저기 어설프게 배분했다간 죽도 밥도 안 되는 비극이 발생하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인지하고 있는 카델은, 망설임 없이 10포인트를 전부 불 속성에 올인했다. 불 스킬만큼 운용 폭이 넓고 효과가 도드라지는 것도 없다.
‘초반 화염계 스킬은 화염구나 폭발, 화마의 화살 정도였던 것 같은데…….’
카델 라이토스는 시작부터 영창이 필요 없는 즉시 시전 마법을 사용했다. 일종의 재능충이었다. 그러니 마력을 다루는 법만 터득한다면, 기술을 사용하는 데엔 전혀 무리가 없을 테다.
‘연습할 기회가 있을 거야. 조급해하지 말자.’
론의 말에 의하면 스모그 평원의 마물은 달이 뜰 때 활동을 시작한다고 했다. 아직 노을도 지지 않았으니 시간은 충분하다.
“그나저나 반. 밥도 제대로 못 먹었는데 괜찮겠어? 내 가방에 드류 공자가 준 육포 있을 텐데, 그거라도 먹을래?”
카델은 자신의 앞에서 거치적거리는 풀과 덤불을 밀어 내며 길을 만들어 주고 있는 반을 향해 말했다. 살짝 고개를 돌려 카델을 바라본 그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말씀드렸잖아요, 단장. 전 며칠 굶는 걸로 타격받지 않아요. 단련했는걸요.”
“그래도…….”
“게다가 드류 공자가 준 육포라니. 단장을 모욕한 폐기물의 빵을 먹느니 차라리 땅바닥의 진흙을 퍼먹겠어요.”
웃으며 저런 말을 하니 묘하게 섬뜩하다. 카델은 다시 수풀을 밀어 길을 정리해 나가는 반의 뒤에 바싹 붙어 섰다.
“난 딱히 모욕받은 것 같지도 않아. 너에 비하면 비실비실해 보일 만도 하지.”
토끼 한 마리도 못 잡을 인물이라 했던가? 사실이었다. 그는 이미 죽어 있는 닭의 깃털을 뽑는 것도 보기 힘겨워했다. 드류는 사람을 아주 제대로 판단한 것이다.
“단장은 비실비실하지 않아요. 뭐, 보통 마법사들이 대체로 체력이 떨어지긴 하지만…… 단장은 달라요. 단장의 몸은 선이 가늘고 여린 것뿐이니, 굳이 따지자면 아름다운 거죠.”
“……엉?”
잘못 들은 건가. 방금 ‘단장의 몸은 선이 가늘고 여려 아름답다’라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카델은 귀를 의심하며 반의 뒤통수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정정할 마음이 조금도 없어 보이는 단호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역시 귀족 놈들은 제대로 볼 줄 아는 게 하나도 없다니까요. 그딴 기름진 상판에 비단옷만 걸친다고 다가 아닌데 말이죠. 그놈들보단 차라리 다 벗은 단장이 더 보기 좋을걸요.”
“그, 그러냐…….”
갈수록 혼미해지던 칭찬을 멍하니 듣던 중, 카델의 뇌리로 문득 벼락같은 깨달음의 섬광이 스쳤다.
그렇다. 이것은 ‘여성향’ 게임이었다!
이 게임은 유저가 여자든 남자든, 등장하는 기사들 전부를 플레이어와 엮지 못해 안달이 났었다. 당시에는 메인 스토리만 대충 흘려 보았기에 딱히 실감하지 못했지만.
‘어떡하지.’
카델은 여성향 게임의 아주 작은 단면을 훔쳐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 게임 캐릭터에 빙의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할 때도 나지 않던 식은땀이 다 났다.
‘그, 그래……. 지금은 이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쓸 때가 아니야. 뭐가 됐든 난 나의 길을 가면 되는 거잖아? 응, 그럼 되는 거야!’
스멀스멀 피어나는 불안의 싹을 힘껏 뽑아 버리며, 카델은 바싹 붙어 있던 반과의 거리를 슬그머니 벌렸다.
스모그 평원은 이름대로 뿌연 안개가 자욱해 한 치 앞을 보기가 힘들었다. 더 끔찍한 사실은 이곳에 있는 구조물이라곤 평원을 에워싼 울타리뿐이라, 주변과의 거리를 가늠하는 일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용할 지형지물이 없다는 건 리스크가 좀 큰데.’
평원을 둘러본 카델이 짧게 혀를 찼다. 환경이 이렇다면 오로지 실력으로 승부를 볼 수밖에 없다. 실력에 자신 없는 카델으로서는 상당한 부담이었다.
걱정이 드러난 표정이 신경 쓰였는지, 반이 카델의 옆으로 다가왔다.
“제가 망을 보고 있을게요, 단장. 그동안 조금이라도 쉬어 두세요.”
“응? 아니, 됐어. 이런 탁 트인 평원이면 고개만 돌려도 다 보인다고.”
반을 만난 지는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지만, 그는 자신을 과잉보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보통은 단장에게 등을 맡기고 의지하지 않던가.
‘……하긴. 믿을 만한 구석을 보여 줘야 그런 신뢰도 생기겠지.’
본인을 향해 냉소한 카델이 불안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론과 바빌을 불러 세웠다.
“달이 뜨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휴식부터 하죠. 그 뒤엔 한 사람당 한 방위를 맡아 마물이 어디서 접근하는지 감시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조, 좋소. 그렇게 하지.”
“젠장, 심장 떨려서 쉴 수나 있을는지 모르겠군.”
그들은 최대한 울타리에 바싹 붙어 앉아 짐 가방을 풀기 시작했다. 카델은 반에게 먹을 것을 권유했으나 매몰차게 거절당했고, 결국 반 몫의 육포까지 씹어 먹게 됐다. 온종일 제대로 먹은 것이 없다 보니 종이를 씹는 것처럼 별맛도 안 나는 육포가 계속 들어갔다.
‘카델 라이토스가 죽으면…… 진짜 나도 죽게 되는 거겠지?’
안개에 가려 흐릿해진 하늘을 올려다보며, 카델이 생각에 잠겼다. 게임 주인공에 빙의되었으니 어쩌면 ‘세이브 포인트’라든가 ‘부활’ 같은 것이 가능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걸 직접 나서 확인해 보기엔 담이 부족했다. 제정신이 박힌 인간이라면 확신 없는 도박에 목숨을 내던지는 일은 못 한다.
‘무조건 살아남아야 해. 그리고…….’
점점 어두워지는 남색의 하늘을 담아내던 시선이 느리게 움직였다. 색이 짙은 고동색 눈동자 위로 그의 옆자리를 차지한 반의 훤칠한 얼굴이 비쳤다.
‘절대 실패하면 안 돼.’
트럭에 치이고도 살아남을 기회를 얻은 것은 천운에 가까웠다. 당연하게도, 그런 천운이 두 번이나 주어질 리는 없다. 그러니 매 순간 사활을 다하는 수밖에.
의지를 다진 카델이 물통을 기울여 입을 축이고. 그와 동시에, 겁에 질린 론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 달이 떴소!”
울타리에 붙어 삼면만 경계한다.
어찌 보면 합리적인 방법이었으나, 이 작전은 하수에 가까웠다. 자칫하면 퇴로가 막힌 상태에서 포위당할 수도 있을뿐더러, 전투 중 울타리가 부서지기라도 한다면 가둬 둔 마물들이 사방으로 흩어질 것이었다. 그리되면 가장 먼저 빌스 마을이 피해를 입게 될 테고, 힘들게 살아 나간다 해도 스트라 자작가가 묻는 책임을 피할 수 없다.
그 때문에 초승달이 뜬 밤. 그들은 어둠과 안개가 혼합된 끔찍한 시야 속을 헤치며 울타리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진 중심부에 본진을 두었다.
“그쪽은 마법사 양반이라고 하지 않았소? 장막 같은 거라도 만들어 두면 마음이 훨씬 편해질 것 같은데 말이지.”
사방위 중 동쪽을 맡은 바빌이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카델은 본인이 맡은 북쪽을 응시하며 무심하게 대꾸했다.
“그쪽 안심시키자고 벌써부터 마력을 낭비할 필요는 없죠. 걱정 마십쇼. 때가 되면 알아서 만들 테니.”
물론 허세였다. 그는 장막은 물론이고 불씨 하나 만드는 법도 몰랐다. 휴식 내내 옆에 붙어 떨어질 줄을 모르던 반 때문이었다. 부하의 옆에서 불 피우는 연습이나 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돈도 없고 능력도 없는 단장이라니, 버림받을 게 틀림없었다.
‘마물이 나타나면 일단 반에게 전투를 맡겨야겠어. 후방 지원을 하는 척 공격을 시도해 보면 되겠지.’
어차피 마법사는 후방에서 기사들을 지원해 주는 포지션이다. 아무도 그것을 이상히 여기지는 않을 테다.
빠르게 계획을 세운 카델이 숨을 골랐다. 그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당연하게도 단 한 번도 마물이라는 존재를 본 적이 없었다. 실존하지 않는 존재를 어떻게 보겠는가. 기껏해야 영화나 만화 같은 허구 속 세계에 등장하는 괴물을 보며 ‘징그럽게 생겼네’, ‘밥맛 떨어져’ 정도의 감상을 남기는 것이 전부였다.
‘꼴사납게 기절하지 않도록 조심하자고.’
마른침이 넘어갔다.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은 평원은 건조한 흙과 잘게 쪼개진 돌조각들이 전부였다. 정돈되지 않은 우둘투둘한 바닥을 덮은 짙은 안개는 음산한 분위기를 띠며 일렁이고 있었다. 유일하게 기댈 달빛조차 안개 사이로 흐린 빛을 엮어 주는 정도가 전부이니. 갑갑한 시야와 거친 숨소리, 습한 공기가 삼위일체를 이루어 온 감각을 불쾌한 긴장감으로 물들였다.
카델은 눈을 가늘게 뜨며 자신이 맡은 방향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무언가 다가오더라도 안개 때문에 꽤 가까운 거리가 되어서야 윤곽이 보일 터였다. 집중하지 않으면 지척에서 그들을 마주해야 하리라. 그런 깜짝 선물은 사양이다.
오감을 극도로 발달시킨 카델이 두 눈에 한가득 힘을 주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북쪽 저 너머에서부터 아주 작은 윤곽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촛불의 그림자처럼 휘청거리는 자그마한 그림자였다. 그 정체가 무엇이든, 지금껏 없던 것이 생겨났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신속한 판단을 마친 카델이 적의 등장을 알리기 위해 입을 열고.
“나, 나왔다!”
“이쪽도!”
“단장, 나왔어요!”
동, 서, 남 세 방위를 맡고 있던 그들이 동시에 외쳤다.
“뭐, 뭐야! 설마 우리 포위된 거야?”
새된 소리를 지르며 질겁한 론이 주춤주춤 물러났다. 론을 따라 당황하고 있을 여유는 없다. 카델은 곧장 뒤를 돌아 론과 바빌을 반이 있는 방향으로 밀어붙였다.
“전투 개시해! 반을 선두로 남쪽부터 뚫고 간다! 당신들은 후방을 경계하면서 반을 지원하세요!”
장소가 평원이라는 데에서부터 느낌이 안 좋기는 했지만, 이렇게 처음부터 사방에서 조여들고 올 줄은 몰랐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에게는 뛰어난 기사가 존재한다는 것.
반은 카델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육중한 대검을 꺼내 손에 쥐었다. 지체 없이 기운을 끌어모으자 널찍한 검날의 위로 매서운 붉은색 오라가 휘감기기 시작했다.
일순, 반의 눈동자가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는 긴장한 무리를 남겨 둔 채 전방을 향해 달려들었다. 묵직한 대검이 정면을 가르며 쇄도했다.
후웅―
바람을 동반한 낮은 파공음. 힘 있는 일격에 안개가 밀려 나며 그 너머의 풍경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언데드다!”
론이 날카롭게 외쳤다. 바빌 또한 서둘러 검을 뽑아 들고 반의 뒤를 쫓아 달려 나갔다. 하지만 카델은 그들을 따라갈 수 없었다. 다리가 목석처럼 굳어 버린 탓이었다.
‘저, 저게 뭐야……?’
안개가 가려 주고 있던 마물의 모습이 드러나며, 그는 충격에 빠졌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좀비였다.
그러나 자세하게 말하자면, 첫째로 그들은 목이 달리지 않았다. 대신 원래라면 목 위에 달려 있어야 할 본인들의 머리통을 소중하게 안아 들고 있었다. 머리통에는 눈이 없었고, 코뼈도 없어 구멍 두 개만 간신히 뚫렸다. 입술은 흉측하게 녹아내려 거미줄을 친 것처럼 입 구멍의 위아래가 듬성듬성 이어 붙어져 있었다.
둘째로 놈들은 전신을 홀딱 벗고 있었는데, 온몸이 푸른 곰팡이와 시꺼먼 구멍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보기만 해도 구토감이 치밀 만큼 역겨운 자태.
‘저런 게 사방에서 몰려오고 있다고?’
끔찍했다!
다리가 절로 후들거렸다. 카델은 차마 주변을 둘러볼 엄두는 내지 못하고, 겨우 용기를 내어 반에게로 달려갔다. 그에게 붙어 있는 편이 가장 안전할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것은 틀린 판단이 아니었다.
반은 대검을 휘두르고 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날렵한 속도로 빠르게 붉은 검기를 내질렀다. 초승달 형태의 검기가 안개와 함께 언데드의 상반신을 양단했다.
붉어진 눈동자가 짐승처럼 육감적으로 굴러가며 적들의 동태를 파악했다. 언데드는 느리고 둔했지만 그렇다고 공략하기 쉬운 종족은 아니었다. 오히려 성가신 쪽에 속했다.
“단장! ‘헤드 피쳐(Head pitcher)’예요! 장막을 만들어 주셔야 합니다!”
쉴 새 없이 마물을 베어 내던 반이 외쳤다. 힘 있는 외침에 바짝 쫄아 있던 카델이 소스라치며 놀랐다.
그렇다.
구토를 참은 것이 용할 정도로 끔찍한 몰골의 마물이었지만, 그것들은 전부 그가 해치워야 할 목표물이었다. 조금 전만 해도 후방 지원을 해 줄 계획을 짜지 않았었던가.
‘좆까좆까좆까, 할 수 있어 씨발…….’
속으로 한 사발 욕을 지껄이며 두려움을 삭인 카델이 고개를 숙인 채 이를 악물었다. 차라리 마물을 보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마법 나와라, 나와라 마법, 제발 나와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무식하게 힘을 주었다. 얼굴이 터질 것처럼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온 근육이 바짝 수축하며 쓰라린 고통을 동반했다.
마법 장막은 모든 속성 마법이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는 기술이었다. 쉽게 말해 방어막이다. 카델은 게임 속에서 보았던 장막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필사적으로 몸에 힘을 주었다.
“머리가 날아온다! 절대 닿으면 안 돼!”
“마법사! 장막을 펼쳐!”
론과 바빌이 시끄럽게 소리 질렀으나 카델의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의 내면에선 ‘생존 욕구’와 ‘공포’가 양분되어 끌어낸 극도의 집중력이 서서히 정신을 잠식하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 카델은 그의 몸속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흐르고 있는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피가 아니었다. 그보다 더 뜨겁고, 더 빠르며, 좀 더 본질적인 기운에 가까웠다.
‘이 힘을 끌어낸다.’
이 기운을 끌어내야만, 장막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야트막한 진리를 본능적으로 깨달은 카델이 있는 힘껏 기운의 흐름을 뒤틀었다. 그러자 좀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묵직한 열기가 솟구치는 것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