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521)

“……님!”

머리가 지끈거렸다. 커다란 망치 하나가 머릿속을 헤집으며 뇌 주름 하나하나를 다져 내는 듯한 고통이었다. 그 아찔한 두통에 여환이 본능적으로 이마를 짚었다.

“……델……님!”

‘누가 이렇게 시끄러워…….’

미간을 구긴 채 천천히 숨을 고르자, 흐릿했던 정신이 서서히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카델 단장님!”

‘……카델?’

그제야 온전하게 들리는 목소리는 어딘가 익숙한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그것도 여환의 바로 옆에서.

느릿느릿 눈을 뜨자, 시야 가득 낯선 사내의 얼굴이 들어찼다.

“단장, 일어나셨어요?”

은은한 잠기운이 싹 달아날 만큼 대단한 미남이었다.

염색으로는 결코 낼 수 없는 찬란한 은색의 머리칼과 태양처럼 강렬하게 빛나는 황금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남자. 이목구비의 선이 거칠고 날카로워 언뜻 냉랭한 분위기를 띠기도 했지만, 이쪽을 내려다보는 눈빛엔 따스한 기운만이 감돌고 있었다.

“많이 고단하셨나 봐요. 더 주무셨으면 좋겠지만…… 일이 생겨 버려서 말이죠.”

“누구…….”

“네?”

멍하니 남자를 올려다보던 여환이 더듬더듬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허름한 나무 내벽과 낡은 천장, 먼지와 얼룩이 가득한 창문, 딱딱한 침대와 뻣뻣한 이불, 그리고 그 아래에서 아무리 생각해도 구입한 기억이 없는 진녹색 튜닉을 입고 드러누운 자신의 몸뚱이가 보였다.

진녹색 튜닉이라니. 여환이 상황 파악을 거듭하며 굳어 있는 동안, 남자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아직 잠이 덜 깨셨어요? 저 반이에요, 단장.”

“……네?”

“반 헤르도스요.”

반 헤르도스!

그 이름을 듣자마자 별안간 심장이 싸대기라도 맞은 듯 저릿한 고통을 동반하며 박동하기 시작했다. 거의 반사적으로 상체를 일으킨 여환이 놀란 토끼 눈이 되어 반을 쳐다보았다.

‘미친. 진짜다. 진짜 반 헤르도스잖아? 뭐야.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이 비현실적일 정도로 훤칠한 미모는 ‘반 헤르도스’ 카드에 그려진 일러스트와 상당히 흡사했다. 아니, 흡사한 정도가 아니라 똑같았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챈 여환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시끄러운 비명을 눌러 삼키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제 이름이 카델 라이토스…인가요?”

“단장? 갑자기 왜 그래요?”

“맞나요?”

“그…렇죠.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거리감 느껴지는 말투를…….”

충격적이었다. 여환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퍽퍽 내리치며 경악했다. 놀란 반이 여환의 손목을 낚아채 자해를 저지했으나, 그렇다고 한번 왔던 충격이 가시는 것은 아니었다.

카델 라이토스.

그 이름은 「히어로 오브 나이츠」의 주인공, 플레이어의 기본 닉네임이었다.

‘설마 이게 말로만 듣던 게임 빙의? 아니,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냥 내가 정신이 나간 걸지도. 하지만…… 하지만 그렇다기엔…….’

모든 감각이 지나치게 생생했다. 내리친 머리의 통증도, 퀴퀴한 방 안의 공기도, 자신의 손목을 움켜쥔 반의 체온도.

‘잠깐. 그러고 보니 영혼 이동인지 뭔지를 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게 끝나면 안내를 해 준다며. 설명 어딨어, 설명!’

바삐 눈을 굴려 보아도 시스템 창은 보이지 않았다. 급격히 불안해진 여환이 입을 꾹 다물자, 그의 눈치를 살피던 반이 슬쩍 손목을 풀어 주었다. 침대 맡에 쭈그려 앉은 그가 다정하다 못해 달달하기까지 한 시선을 건네며 물었다.

“악몽이라도 꾸셨어요?”

악몽이라면 바로 지금 이 상황이 악몽이겠지. 참담한 기분으로 반을 바라보자, 현실감 저하의 주원인인 꽃미모가 환하게 피어나며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용병단 이름 짓는 일 때문에 잠이라도 설치신 거예요? 전 단장이 지어 주신 이름이라면 전부 좋은데.”

“용병단 이름……?”

“오늘 아침에 알려 주시기로 했잖아요. 물론 그것 때문에 억지로 깨운 건 아니지만.”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귓가를 울리고, 멍청한 표정을 한 여환의 눈앞으로 그렇게 기다리던 시스템 창이 모습을 드러냈다.

「용병단의 이름을 지어 주십시오.」

「완료 시 본격적인 게임이 시작됩니다.」

「히어로 오브 나이츠」의 플레이어는 자신만의 용병단을 꾸림으로써 게임을 시작하게 된다. 용병단이 성장하고 명성이 높아지며 자연스럽게 기사단으로 승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진정한 과몰입 플레이어라면, 처음 용병단의 이름을 정할 때부터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법이었다.

“적린(赤鱗) 용병단이라……. 붉은 비늘인가요? 상징적이고 멋있네요, 단장.”

하지만 남의 육성으로 용병단의 이름을 들어 보니 이보다 구린 작명 센스도 없는 것 같았다. 여환은 붉어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 괜스레 뺨을 문지르며 어색하게 웃었다. 수치심을 무릅쓰고 이름을 지어 줬으니, 이제는 시스템의 차례였다.

「적린 용병단의 주인이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영혼 이동 완료! 신여환 님의 영혼이 ‘카델 라이토스’의 육체로 이동되었습니다.」

「시스템 ‘능력치 열람’이 해금되었습니다.」

「시스템 ‘스토리 열람’이 해금되었습니다.」

「시스템 ‘인벤토리’가 해금되었습니다.」

시스템 창이 시끄러운 알림 소리와 함께 연속적으로 떠올랐다. 여환은 그중 자신의 영혼이 ‘카델 라이토스’에게 이동되었다는 알림에 집중했다.

‘내 영혼이 이동되었다는 건…… 빙의라는 말인가? 내가 진짜 게임 캐릭터에 빙의됐다고?’

그 물음에 답하듯 새로운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카델 라이토스’가 되어 스토리를 이끌어 나가십시오. 스토리 정복 완료 시 두 가지 특전 중 한 가지를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 특전: ‘카델 라이토스’의 삶

‣ 특전: ‘신여환’의 삶

특전의 정체는 두 종류의 삶이었다.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시스템이 요구하는 ‘스토리 정복’을 완료할 시, 현재 빙의한 몸으로 살아갈 기회와 본연의 몸으로 돌아갈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심장이 매서운 기세로 두방망이질 쳤다.

‘그럼 설마, 내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소리야?’

이것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중요치 않았다.

작은 희망.

트럭에 치여 넝마가 되었던 자신의 육체로. 신여환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것.

새하얀 병원 천장과 함께 눈을 떠도 좋다. 깨어났더니 몇 년이 흘러 있었다, 하는 전개라도 좋다. 이 황당무계한 상황 속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자신에 대한 부모님의 마지막 기억을 일에 찌든 아들의 신경질적인 통화로 장식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인생 최대 업적이 모바일 게임 랭킹 1위라는 구차함을 씻어 낼 수만 있다면!

이 기묘한 상황 속에서 그보다 중요한 희망은 존재하지 않았다.

“단장?”

집요하게 시스템 창을 노려보고 있는 여환, 카델 라이토스의 상태가 슬슬 걱정되기 시작하는지, 반이 심각한 얼굴로 그를 불렀다. 카델이 맹하게 대꾸하자 반의 표정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단장, 괜찮아요? 혹시 어디 불편한 건…….”

“어? 아니. 괜찮, 아…….”

유교국 출신답게 예의를 차리려던 카델이 말꼬리를 흐렸다. 자신이 「히어로 오브 나이츠」에 빙의된 것이라면 반 헤르도스는 그의 부하였다. 부하에게 일일이 예의와 격식을 차릴 필요는 없겠지. 카델은 안심하라는 듯 눈웃음을 치고는 문득 떠오른 궁금증에 반을 빤히 쳐다보았다.

‘능력치 열람이란 건 어떻게 하는 거지?’

해금되었다던 시스템을 확인해 보고 싶었다. 카델은 발동법을 고민하며 반의 빛나는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고, 그 강렬한 시선에 반이 어색하게 눈을 깜빡일 무렵.

새로운 창이 떠올랐다.

<반 헤르도스>

현재 등급: B급

최대 각성 등급: A급

포지션: 탱커, 딜러

착용 장비: 낡은 대검(D), 낡은 갑옷(D)

호감도 및 충성도: 70/100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