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유혹, 유혹이라….
한차수는 팔짱을 낀 상태 그대로 고개를 비틀었다. 녹색이 섞인 노란 눈동자가 그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자신이 어떻게 반응할까 기대하는 눈이었다.
‘얼씨구.’
깜짝 놀라 얼굴을 붉힐 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한차수는 제 손등에 입술을 눌러 붙인 놈의 얼굴을 밀어냈다. 그리고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옛날의 나는 참 비위도 좋았나 보네. 형님을 거꾸러트리겠다고 그런 짓까지 한 걸 보면.”
딱 잘라 말하자 민산하의 입매가 살짝 올라갔다. 살짝 그을린 피부에 잘 어울리는 건치가 빛을 발했다.
어떻게 봐도 즐거워하는 듯한 표정에 한차수는 조금 어이가 없었다.
‘변태인가?’
욕을 먹고도 좋아하다니. 이건 민목하와는 다른 방식으로 성가셨다. 한차수는 못마땅한 눈으로 민산하를 흘겼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괜찮은 건 맞지.’
일단 민산하는 다른 이들에 비해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자세가 좋았다. 체격은 평범했지만 키가 크고 팔다리가 길어 모델 같은 분위기가 풍겼다.
‘제대로 계획 짜서 훈련시키면 체격도 더 좋아질 것 같은데….’
뭐, 그렇다 해도 한차수의 취향은 아니었다.
외견이 별로라는 말은 아니고, 그냥 딱히 끌리는 지점이 없었다. 그런 면에서는 다행이었다. 혹시라도 채차수의 ‘몸’이 제멋대로 반응했다면 골치 아팠을 테니까.
‘타의에 의해 휘둘리는 감정은 질색이야.’
잠깐이지만 한차수의 얼굴에 경멸의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
멋대로 흥분하는 몸, 의지에 반해 뛰는 심장. 한 번도 본 적 없는 상대를 원해야만 한다고 고함을 지르는 머릿속 목소리들.
이전 세계에서도 약이나 질 낮은 수작으로 그를 어떻게든 해 보려 하는 사람은 차고 넘쳤다.
‘지긋지긋한 것들.’
하지만 나름대로 도움이 되기도 했다. 억지로 충동질하는 감정을 느낄수록 점점 감정과 이성을 분리할 수 있었으니까.
덕분에 별다른 특별 훈련 없이 고통에 초연해질 수 있었다. 가문의 어른들은 그걸 또 좋다고 치켜세웠지만, 글쎄….
‘쓸모없는 추억팔이는 이쯤이면 됐어.’
어차피 돌아갈 수도 없는 곳이다. 돌아가고 싶지도 않은 세계였고.
한차수는 재빨리 이전 세계에 대한 감상을 털어 냈다.
어쨌든, 기태연에게 느낀 감정을 자신의 것이라 착각하지 않았던 것도 그 덕분이다.
그가 인정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의지로 인해 발생한 감정뿐.
그것이 다른 사람이든, 알 수 없는 힘이든 자신으로부터 시작된 게 아닌 마음은 제 것이 아니었다.
같은 이유로 만약 채차수의 ‘몸’이 민산하에게 반응했다 하더라도 한차수는 당황하지 않았을 것이다.
상대도 일부러 마지막 경합 때라고 콕 집어 말한 걸 보니 애초에 좋아서 유혹한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전혀 안 부끄러워하네.”
민산하가 우산 끝으로 바닥을 툭툭 치며 중얼거렸다. 자신의 반응이 꽤 흥미롭다는 기색이었다. 그때마다 크고 작은 물체들이 바닥에서 훅 튀어나왔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하는 짓이 꼭 영상 기록물에서 보던 마술사 같았다. 실크햇에서 토끼를 꺼내는 사람 말이다.
한차수는 민산하가 만들어 낸 두툼한 카펫 위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기억도 안 나는 일을 가지고 굳이 부끄러워해야 할 필요는 없지.”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유혹했는지는 궁금하지만… 굳이 지금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어디 보자.’
아직도 결계의 제어권은 저쪽에 있군.
한차수는 민산하가 바닥에서 분수대를 꺼내는 걸 가만히 지켜보다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 있는 건 반구형의 천장이 아니라 새파란 창공이었다.
한차수는 민산하가 만들어 낸 가짜 하늘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갑자기 왜 꺼낸 거지?”
“기억이 없어지면 성격만 변하는 게 아니라 취향도 변하나 궁금해서.”
“널 유혹한 건 취향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서 아니었나?”
의심스럽게 자신을 바라보는 한차수의 얼굴에 민산하가 푸하,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궁금해할 수도 있지 않나? 그도 그럴게, 도련님은 죽다 살아나서 완전 딴판이 되어 버렸잖아. 수행 비서로서 취향쯤은 알아 둬야지. 옛날에는 남자도 상관없었지만 이제는 싫어졌을 수도 있잖아.”
“별….”
“아, 참고로 도련님은 민목하도 덮치려고 했어.”
“…….”
아, 이건 좀 타격이 컸다.
한차수는 창백해진 얼굴을 연거푸 쓸어내렸다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채차수, 이 또라이 같은 새끼…!’
도대체 마지막 경합 기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길래 쌍둥이를 돌아가며 덮칠 생각을 하는가. 정말 미친놈이 따로 없었다.
심지어 민목하라니. 자신을 의료 센터에서부터 친절하게 돌봐 주고 보살펴 온 민목하를 덮치려 했다니…!
‘빌어먹을. 앞으로 민목하 얼굴을 어떻게 보지.’
물론 민산하의 말이 거짓말일 가능성도 없지 않았지만… 사실 그럴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왜냐하면.
[ 현재 활성화 가능한 위장 신분 (5/6) ]
[ 1. 순진하고 멍청한 막내
2. 유혹적인 밤의 손님
3. 재벌가 후계자
4. 유리 몸 포션 제작자
5. ???급 미등록 각성자 ]
위장 신분에 이따위 선택지가 있었으니까!
한차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시스템창을 응시했다.
‘도대체 위장 신분에 왜 유혹적인 밤의 손님 따위가 있나 했더니….’
아마도 사람들을 보다 편히 유혹하기 위해 만든 신분인가 보다.
한차수는 몰래 불러온 시스템창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흘끗 민산하를 보았다.
‘저 녀석이나 민목하를 유혹할 때 스킬을 썼을까?’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일단 유념해 둬야겠다.
긴 하품을 하던 민산하가 시선을 느끼고는 이쪽을 바라보았다.
한차수는 실실 웃는 녀석을 대충 흘겨보며 손을 만지작거렸다. 민산하가 그를 보며 눈을 휘었다.
“뭐, 그래서 대충 궁금했다는 말이야. 사람이 완전히 바뀌었으니 이상형도 그에 따라 달라졌을 것 같거든.”
“이상형 같은 거 없어. 딱히 정해진 취향도 없고.”
“그래? 그렇다기엔 도련님이 데리고 다니는 사람들이 너무 휘황찬란하던데.”
민산하가 능글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말하는 그의 눈빛이 의뭉스레 빛났다.
한차수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정이흔.”
“뭐?”
민산하가 잘도 모르는 척한다는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단신으로 불규칙 게이트를 박살낼 정도로 뛰어난 천령 길드장부터 시작해서 각국 정부에서 탐내는 백담에 이어 영국의 드루이드가 애지중지하는 금명결까지 하나같이 도련님한테 집착하고 있지. 그뿐인가? 도련님, 의료 센터인지 뭔지에 들어가서는 무슨 실장까지 홀렸다면서요?”
민목하가 잠입해 있는 동안 아주 학을 뗐다며 민산하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잠깐만.”
도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한차수는 자기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몇 번이고 귀를 확인했다.
그러나 귀는 멀쩡했다.
그리고 민산하는 미친놈이었다.
“우리 도련님 집 보는 눈만 높은 줄 알았더니 알고 보니 남자 보는 눈도 하늘에 달리셨더군요. 강하고 잘생긴 남자가 취향이라는 걸 진작에 알아봤어야 했는데 말이에요.”
자기를 덮칠 때부터 알아봤다며 민산하가 짓궂게 웃었다. 어처구니없는 비약에 한차수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내가 누굴 홀렸다고…? 하.”
S급들이 잘생기고 잘났다고 생각한 건 맞지만 나서서 꼬신 적은 없었다. 차라리 대놓고 수작을 부렸으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마음이 생기려다가도 제 처지를 자각해 누르기를 수십 번 아니던가.
“아, 소문이라면 걱정할 필요 없어요. 큰 도련님이 열심히 막는 중이라.”
“…그러냐?”
동생에게 미친 형이라 그런가, 일찌감치 헛소문을 잘라 내고 있는 모양이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그러니 이때를 노려서 귀국하기 전까지 한국에 존재하는 S급이란 S급은 죄다 도련님 어장에 쓸어 넣읍시다. 물론 미모와 재색을 겸비한 놈으로다가.”
민산하가 한쪽 눈을 찡긋했다. 한차수의 눈이 차게 식었다.
“수행 비서 건은 보류다.”
“말도 안 돼. 우리 분위기 좋았잖아.”
“생각해보니 널 수행 비서로 데리고 다녔다간 내가 제 명이 못 죽을 것 같거든… 저리 비켜, 무겁다고.”
“그러지 마세요, 도련님. 저 도련님 없으면 이제 끈 떨어진 연 신세라고요.”
내가 알 바냐. 거짓 눈물을 찍어 내며 은근슬쩍 달라붙는 민산하를 억지로 떼어 놓을 때였다.
우우웅——-
천지가 흔들렸다. 머리 위의 찬 공기가 순식간에 달아오르며 후끈한 바람이 사방에서 몰아쳤다.
“…!”
카가가각!
쩌저저적—!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꿈결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차가운 햇살이 배신자가 꿈꾸던 아름답고 덧없는 세계의 틈을 파고들었다.
‘드디어 오셨군.’
한차수는 태연한 얼굴로 침입자를 기다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의 부재를 깨닫고 자신을 찾아온 사람을.
‘누가 왔으려나.’
애초에 민산하와의 말다툼은 오래갈 수 없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 그것도 통행이 통제된 개인 소유의 섬이었으니까.
민목하를 따라간 제 행방이 묘연해졌다는 건 몇 시간도 안 되서 밝혀질 일이었다.
민산하가 시간이 없다며 재촉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을 테고.
“아아.”
예상대로였다. 결계가 부서지는 걸 목격한 민산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똑똑해지더니 잔꾀만 늘어서. 우리 도련님 보살피려면 꽤나 힘들겠네.”
“아직 네 도련님 아니다. 아마 앞으로도 아닐 가능성이 크고.”
“벌써부터 선 긋기는…. 그래도 도련님은 날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걸.”
슬쩍 올려다본 민산하의 눈에는 열기가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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