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공범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아주 잠깐이지만 한차수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보듯 하던 눈동자에 순식간에 짜증이 몰렸다.
“너 이 새끼….”
자신이 기억을 전부 보여 주지 않았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다. 그리고 그 기억 중에는 채차수가 한국에 온 이후도 있다는 것도.
“처음부터 그걸 패로 내밀 생각이었군.”
당장이라도 목을 조를 듯한 눈빛에 민산하는 가벼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게 순순히 머리를 달라고 할 때 주지 그랬어요, 도련님?”
“기회가 있었다는 듯 말하지 마라. 내가 널 순순히 받아들였다면 공범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을 테지. 그래,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언제부터 날 지켜본 거냐.”
쓸데없는 말은 집어치우고 곧장 정곡부터 찔러 들어오는 말에 민산하는 다시 한번 웃었다.
‘그래, 이거지.’
기억을 잃은 채차수는 여러모로 기대 이상이었다. 예전의 그였다면 어떻게 알아냈냐며 바락바락 소리부터 질렀을 텐데, 이리도 침착한 반응이라니.
‘그 와중에 채라하가 알고 있는지는 묻지 않네. 말하지 않은 걸 짐작한 모양이야.’
역시 어디서 영매사라도 데려와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영혼이 뒤바뀐 게 아니라면 이 총명한 모습이 채차수의 본모습이라는 게 되니까.
아, 채차수가 아니라 한차수라고 해야 되나.
‘흠.’
민산하는 잠시 고민했으나 금세 털어 버렸다. 성만 어머니의 것으로 바뀌었을 뿐 이름은 그대로니 어떻게 부르든 별 상관없으리라.
중요한 건 그가 똑똑해졌다는 거니까.
‘그렇게 재미없게 끝난 줄 알았더니 이렇게 훌륭하게 고쳐져서 돌아올 줄이야.’
사실 채차수의 끝은 열한 살이었던 민산하가 상상했던 그대로였다.
시시했다는 말이다.
별 볼 일 없는 악당의 하찮은 몰락. 반전도, 의미도 없는 패배.
기대가 충족된 만큼 깊은 허무감이 그를 엄습했고, 그래서 민선하는 조금 짜증스러웠다.
‘그래도 그렇게 오래 발버둥 쳤으면 뭐라도 하나 제대로 보여 주든가.’
그게 마지막 경합에서 산산이 무너진 채차수를 보며 민산하가 한 생각이었다.
차라리 끝까지 악이라도 썼으면 그를 하찮게 보던 이들의 생각이 조금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채차수는 압도적인 실력 차 앞에 더는 버티지 못했다. 태생적인 오만과 고집스러운 현실 도피 위에 쌓아 올려진 연약한 자아는 자비로운 빗줄기 속에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으으, 나, 나는, 내, 내가…!”
한심하기 짝이 없는 꼴이었다. 채차수는 패배도 그 무엇도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니, 그럴 만한 정신머리가 없었나?
여하튼 채차수는 그대로 방 안에 틀어박혔다.
하지만 한심한 일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채차수는 사람들이 그를 신경 쓰지 않는 사이 한국으로 도망쳐 버렸다. 채라하는 슬퍼했으나 민산하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그것밖에 안 되는 놈 아닌가.
그 길로 채차수에 대한 흥미는 완전히 말라 버렸다. 빌어먹게도 고용 계약은 해지되지 않아 가끔씩 채라하가 시키는 일을 해야 했지만.
그러니까, 대충 요약하자면.
“우리 작은 도련님, 한국같이 빡센 나라에서 입국 기록도 없는 불법 체류 외국인을 시민으로 등록시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 줄 알아요?”
채차수가 ‘한차수’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필요한 모든 기반을 준비한 게 바로 그였다.
인생의 목표를 잃고 실의에 빠진 채차수가 한국에서 소리 없이 죽어 버리지 않도록.
“큰 도련님이 작은 도련님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알면서.”
민산하는 차갑게 가라앉은 회색 눈동자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씩 웃었다.
역시 그 날 채라하가 준 티켓을 찢어 버리길 잘했다.
***
“하….”
돌아 버리겠네.
한차수가 골치 아프단 얼굴로 미간을 꾹꾹 눌렀다.
사실 채차수가 쓴 일기를 봤을 때부터 내심 짐작은 하고 있었다.
‘자기 흔적을 제대로 지울 수 있는 정신머리가 아니었지.’
그 무렵 채차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온전한 이성을 유지하지 못한, 자아가 붕괴되기 직전의 상태.
삼시 세끼 챙겨 먹기도 힘들다 못해 방 구할 돈도 없는 놈이 뒤탈 없이 깨끗한 법적 신분을 구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래도 굳이 문제 삼는 사람이 없어서 내버려 뒀는데….’
굳이 파헤치지 않은 건 비밀을 알았을 때 져야 할 리스크가 더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를 땐 무지에 대한 책임만 질 수 있지만 진실을 알아 버리면 과거에 대한 책임까지 떠안아야 하니까.
비품 횡령 또한 마찬가지다.
‘채차수는 입사한 지 겨우 3년차인 데다 사내에서 자발적 왕따나 다름없었어. 손댈 수 있는 비품에는 한계가 있다는 뜻이지.’
하지만 그의 통장은 아이템 거래소에서 고민 않고 물건을 지를 만큼 풍요로웠다. 그러고도 지금껏 한 번도 범죄 사실을 걸린 적 없고.
공범의 존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었다.
다만 지금껏 가만히 있었던 건, 공범 쪽에서도 침묵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놈이 대놓고 폭탄을 터트려 버릴 줄이야.’
한차수는 한숨을 내쉬며 눈앞의 사내를 노려보았다.
“우리 착하고 순한 작은 도련님은 과거에 자기가 저지른 범죄를 그냥 두고 볼 수 없겠지?”
…저게 정말로 자신이 착해서 공범을 잡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아무래도 아닌 것 같은데.
‘여차하면 정이흔한테 익명으로 찔러 놓고 튈 것 같단 말이지.’
그렇게 되면 보나마나 채라하가 나설 것이고, 자신은 그의 영향력 아래 더 오랜 기간 묶여 있어야 할 것이다.
“하….”
귀찮네, 정말.
한차수가 깊은 한숨을 토했다. 가능하다면 장우산에 몸을 기댄 채 싱긋 웃는 녀석의 송곳니를 갈아 버리고 땅에 처박은 뒤 공범의 정체를 불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녀석은 자신이 뭘 하고 다녔는지 대략적인 상황만 알지, 구체적인 정보는 알지 못하니까.
“보필을 할 거면 제대로 할 것이지, 움직이기 싫다고 다른 사람한테 일을 떠넘겨? 그러고도 네가 내 수행 비서가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냐?”
퉁명스레 튀어나온 말에 민산하가 태연히 대꾸했다.
“하지만 그때 작은 도련님은 보기 힘든 몰골이었는걸요. 그리고 도련님이 날 너무너무 싫어하는데 내가 어떻게 직접 수행합니까?”
맞는 말이라 더 열받네.
“…됐다.”
민산하는 당시 도망친 채차수를 돕기는 했지만, 직접 한국에 오지는 않았다.
꽁무니 빼고 도망간 채차수를 굳이 직접 돌볼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명목으로 그때그때 필요한 브로커를 고용해 일을 처리한 것이다.
“돈만 있으면 뭐든 되는 세상이라니까요, 도련님.”
“…너 그거 형님한테 보고 안 했지?”
“그럴 필요가 있나. 도련님이 멀쩡하게 천령 길드에 입사한 거 보면 아무 문제 없었던 게 확실한데.”
채라하 몰래 처리했다는 말이다.
‘채라하가 모르는 건 상관없는데… 여차하면 이놈이 내 수행 비서가 된단 말이지.’
한차수의 눈이 차게 식었다.
뭐, 어찌 되었든 브로커는 받은 돈만큼 성실히 일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채차수는 한차수가 되었고, 모놀리스의 둘째 도련님이 아니라 고아원에서 자라 혼자 힘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성실한 아이가 되었으며.
“하, 그나저나 도련님 집 구해 주는 거 너무 힘들었어요. 곱게 자라서 그런가 뭐 그렇게 따지는 게 많아? 브로커가 아니라 내가 직접 찾는 거였으면 진작에 때려치웠을 거라고요.”
천령 길드와 지근거리에 위치한 목 좋은 아파트를 수월하게 손에 넣었단다.
물론 그에 따른 자금은 전부 채라하의 주머니에서 나왔다.
측근들에게 들키지 않고 비밀리에 처리해야 했으니까. 참 알면 알수록 탄식밖에 나오지 않았다.
‘자기를 죽이려다 실패해서 도망친 동생을 애지중지 돌봐 주다니. 역시 정이흔보다 더해. 치료 불가능한 중증이야.’
목숨까지 내어 줘, 도망친 걸 잡지도 않아, 잘 살 수 있도록 지원까지 해줘…. 이쯤 되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다짜고짜 싸움을 거는 게 아니라 회사를 달라고 애원했다면 채라하는 진짜 줬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말이다.
“생각할 시간이 더 필요한가?”
협상이 자신에게 유리해진 게 기쁜 걸까. 민산하의 목소리가 이전보다 조금 들떠 있었다. 한차수가 혀를 찼다.
민산하가 수행 비서 직을 계속 수행하는 대신 내놓기로 한 건 채차수의 블랙마켓 정보였다.
‘해당 정보를 통해 역추적하다 보면 공범을 찾는 게 한결 수월해지겠지.’
아예 단서가 없다면 모를까. 공범을 추적할 수 있다면 찾아내 입막음을 해 두는 편이 좋긴 했다.
참고로 블랙마켓은 정식 허가를 받은 아이템 거래소가 아닌, 미등록 거래소 및 여타 불법 거래소를 통칭하는 단어로 보통 블랙마켓의 장사꾼들은 자유주의 연합의 비호 아래 있다.
“흐음.”
이걸 어쩐다.
“도련님, 우리한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어요. 빨리 정해 주면 좋겠는데.”
민산하가 은근슬쩍 어깨를 붙이며 속삭였다. 간지럽게 뭐 하는 짓이지. 몸을 빼내며 한차수가 말했다.
“좀 기다려 봐. 난 너같이 성질 급한 사람이 아니라서 숙고할 시간이 필요해.”
“이런 거 보면 또 영매사는 필요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뭐라고 했냐?”
“별다른 말 안했는데 왜 그러시는지. 그러고 보니 우리 도련님. 취향은 그대로인가?”
어깨가 붙들리고, 민산하가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마지막 경합 때, 도련님이 날 유혹하려고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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