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내가 실직 위기거든.”
“뭐라고?”
한차수가 눈살을 찌푸렸다. 저 미친놈이 지금 뭐라고 한 거지. 실직 위기?
어이없다는 시선을 느낀 민산하가 제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생각해 봐. 쓰레기 같은 인생을 살던 동생이 모든 걸 잊고 개과천선해서 돌아왔는데 그 개자식을 곁에서 보필하던 놈을 그대로 두고 싶겠어?”
“……하아.”
민산하의 말에 한차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했기 때문이다.
“과거를 알게 된 내가 옛날처럼 변할까 걱정한 거로군.”
머리를 쓸어 넘긴 그가 가만히 읊조렸다.
어쩐지 기억을 되찾자는 말은 끝까지 꺼내지 않더라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래, 아무것도 기억 못하는 동생이 망나니 동생보다 낫겠지.’
심지어 빙의 이후 한차수가 보인 행보는 채차수와 딴판이었다. 그는 재물을 욕심내지도, 권력을 탐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화제의 중심에서 벗어나길 원했다.
사람이 뒤바뀐 게 아니고서는 믿을 수 없는 현상.
채라하를 비롯해 그를 알던 사람들은 당연히 한차수가 과거의 모습을 되찾지 않길 바랐으리라.
‘역시 섣불리 채라하에게 말하지 않길 잘했어.’
메시지를 받자마자 채라하나 민목하에게 이야기했다면 그들은 분명 민산하를 찾아내 추방했을 것이다.
채라하는 지금의 ‘한차수’가 사라지지 않길 바랐을 테니까.
‘만에 하나의 가능성도 용인하고 싶지 않았겠지.’
동생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을 정도로 미쳤으니, 순하게 변한 동생을 보고는 얼마나 기뻤을까.
‘안타깝군. 난 진짜 채차수가 아닌데 말이지.’
자신과 시간을 보내며 좋아하던 채라하를 떠올리니 입 안이 조금 썼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이 원해서 이 몸에 들어온 것도 아니지 않은가.
‘역시 하루라도 빨리 사라져야….’
한차수를 상념에서 건져 올린 건 민산하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도련님 수행비서 노릇 그렇게 나쁘지 않았거든.”
“…툭 하면 사직서를 날렸으면서?”
채차수가 해고 통지서를 날린 만큼 민산하 또한 사직서를 뿌려 댔다. 둘 만의 기 싸움이었다.
물론 채라하가 도착하는 족족 둘 다 반려시켜 버렸지만.
“그거야 도련님이 지랄할 때만 그런 거고.”
“…….”
딱히 할 말이 없어 한차수는 팔짱을 꼈다. 민산하가 낮게 웃었다.
‘진짜 많이 변했다니까. 이걸 어떻게 똑같은 사람으로 봐?’
어딘가에 영혼을 바꾸는 아이템이 있다던데 혹시 그걸 쓴 건 아닐까?
보면 볼수록 흥미롭다. 역시 돌아가라는 채라하의 명령을 거부하고 남길 잘했다고 민산하는 생각했다.
사실 채차수가 사람 목숨을 구했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그는 웃기 바빴다.
수행비서라는 직함 따위는 새까맣게 잊은 채 남미의 해변에서 서핑을 즐기다 잠깐 쉬고 있는데 민목하가 말도 안 되는 메시지를 보냈으니까.
“그 새끼가 사람 구하다가 죽기 직전이라고? 누굴 죽일 뻔하다 실패해서 뒤치게 처맞아 죽기 직전인 게 아니라?”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오히려 웃기기만 했다. 채차수와 희생이라니. 세상에서 그처럼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조합이 어디 있을까.
그런데 진짜였다.
“산하야, 한국에 좀 다녀올래?”
“…어?”
뜨거운 태양볕 아래, 깔끔한 흰 셔츠를 입고 나타난 사내는 분명 채라하였다. 발목 위에서 딱 떨어지는 갈색 슬랙스 덕에 복숭아뼈가 드러나 해변과 경쾌하게 어울렸다.
그러나 민산하는 채라하의 옷차림새를 훑어볼 여유가 없었다.
그가 나타났다는 건 자신의 평화가 끝났다는 소리니까.
“나 이제 채차수 비서 아니라고! 아니, 무엇보다 걔 이제 채 씨도 아니잖아!”
채차수가 개심했다는 것도 믿기 힘든데 걔를 살펴보러 가라고? 민산하는 저항했으나 소용없었다.
“산하야. 너희 형제는 우리 ‘형제’의 수행 비서잖니. 그래서 여태껏 아무 일도 안하면서 3년 넘게 유급 휴가를 쓸 수 있었던 거고.”
그랬다. 민산하와 민목하 형제는 편의를 위해 형제 한 명씩을 맡은 것뿐이지 실제로 계약서에는 두 형제의 수행 비서라고 적혀 있었다.
“이제 와서 모른 척하면 안 되지?”
“…젠장.”
일하는 건 죽기보다 싫었으나 그동안 꿀 빤 게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민산하는 한차수가 서리거인 던전에서 반시체 상태로 나와 유백 병원에 입원했을 시점, 한국에 도착했다.
그리고 채라하가 제게 맡긴 임무가 생각보다 흥미진진하다는 걸 깨달았다.
채차수는 진짜로 달라진 것이다!
‘믿을 수가 없네.’
처음부터 기억을 잃어버렸다는 걸 눈치챈 건 아니었다. 민산하는 채차수가 위선을 떨고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채차수는 어려서부터 채라하에게 가는 관심과 호의를 빼앗고 자기 혼자만 주목받고 싶어 안달 내던 녀석이었다.
그런 녀석이 타국으로 도피해 몇 년이나 숨죽여 산다는 것부터가 솔직히 현실성 없는 이야기.
그래서 민산하는 빠른 휴가 복귀를 위해 채차수의 성질을 건드리기로 했다. 바로 그와 채차수 사이에 오고 가는 수많은 신경전 중 가장 잘 먹혔던 방법을 통해서 말이다.
“여보세요, 어, 형. 내가 부탁한 것 좀 보내 줄래? 또 벌레 넣으려는 거냐고? 아니… 몸에 나쁜 것도 아니잖아? 어차피 먹으면 다 단백질인데, 끊지 말고, 야!”
민목하는 제발 어른이 되라며 전화를 끊었고, 별수 없이 민산하는 블랙마켓을 통해 벌레를 구했다.
지금으로부터 한참 전, 채라하의 생일에 채차수가 그의 음료에 넣으려던 그 벌레 말이다.
“으, 징그러워.”
볼 때마다 소름이 돋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건 확실한 신호였다. 서로의 음료수에 벌레를 넣어 온 세월이 얼마인가. 채차수는 즉각 자신이 한국에 있다는 걸 알아차릴 것이다.
그런데….
“소식이 없네?”
이상하리만치 채차수가 잠잠했다. 심지어 무슨 오해가 생긴 건지 병원 내부 관계자들이 실시간으로 감시당하고 갈아 치워지기까지 했다.
“흐음….”
그때부터, 민산하는 조금 더 진지하게 이번 임무를 맡았다.
직원들이 권고 사직당하는 건 관심 없었지만 그게 채차수 때문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니까.
그렇게 그는 채차수의 주변에서 묵묵히 그를 지켜보았고, 그의 보고를 들은 채라하는 심고 끝에 한국에 입국했으며….
‘나는 해고 통보를 받았지.’
말이 되나? 해변에서 잘 놀던 자신을 갑자기 한국으로 보내 버리고서는 이렇게 재미있는 일을 두고 물러나라니.
그랬다. 한차수에게는 신의 직장을 잃고 싶지 않아서 찾아온 거라고 말했지만 사실 민산하는 그냥 한차수를 지켜보는 게 재미있을 것 같아서 수행비서 직을 유지하고 싶었다.
더불어 직접 찾아와서 과거를 까발린 건 민목하가 언제 작은 도련님이 기억을 되찾을지 모른다며 전전긍긍하는 게 꼴 보기 싫어서였고.
‘딱히 기억을 되찾는다고 성격이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단 말이지.’
채차수는 모르겠지만 그가 지켜본 ‘한차수’는 그러했다.
그래서 민산하는 믿음직스럽지 못한 쌍둥이 형의 걱정도 덜어 줄 겸, 시험도 해볼 겸 한차수에게 미끼를 던졌고….
한차수는 아주 훌륭하게도 그를 역으로 붙잡았다.
‘아아, 민목하가 이 꼴을 보면 뭐라고 할까. 궁금해 죽겠네.’
두근거리는 속내를 깔끔히 숨기고서, 민산하가 말했다.
“할 일도 별로 없는데 월급도 잘 나오지, 휴가도 원하는 때 갈 수 있지. 윗사람만 괜찮으면 이런 직장이 또 어디 있어?”
“그걸 대놓고 말하네.”
“지금의 도련님이 어떤 사람인지 아니까. 착하지, 배포 넓지, 이유 없이 남 부려 먹는 거 싫어하지. 그러니 안 달라붙고 배겨?”
민산하는 개과천선한 걸 알게 되었으니 적게 일하면서 꿀 빨고 싶다는 말을 뻔뻔하게 지껄였다.
한차수는 그런 민산하를 미친놈 보듯 바라보았다.
‘허우대는 멀쩡한데 이것도 또라이네.’
하긴 오밤중에 메시지 날릴 때부터 짐작하긴 했다. 멍청이 아니면 미친놈이라는 걸.
‘하지만 나쁘지 않아.’
만약 민산하가 뒤늦게라도 자신의 편이 되고 싶다며 다가왔다면, 또는 채차수가 원래 후계자였다는 말을 흘렸다면 결코 믿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그는 반대로 행동했다. 자신의 솔직한 욕구를 밝혔고, 채차수의 과거도 나름대로 시원하게 까발렸다.
한차수는 그게 제법 마음에 들었다.
“뭐, 하고 싶은 말은 알겠다. 이제 와서 후회한다느니 하는 어쭙잖은 변명보다는 낫군.”
“그럼 내가 계속 비서로 있어도 좋다는 거지?”
“미쳤나?”
한차수가 정색했다.
“당연히 거절이지.”
“뭐? 도련님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지금 날 먹고 튀겠다는 거야?”
눈을 동그랗게 뜨는 민산하에 한차수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가 정신 차리라는 듯 힘주어 말했다.
“너는 내가 필요하겠지만, 나는 아니거든.”
민산하는 업무 수행 의지가 영에 수렴하는 사내였으나, 그럼에도 비서가 존재하는 것과 아닌 것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채라하와 연락할 구실을 여기서 더 늘릴 수는 없지.’
언젠가 섬에서 나가 잠적할 예정인데 귀찮은 게 달라붙는 건 사양이었다.
한차수는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정 일자리를 원하면 네 형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아 보던가. 그러고 보니 애초에 월급 주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형님 아닌가? 왜 나한테 와서 이러는지 모르겠네.”
“너무하네. 그 형님이 날 해고했다니까? 한때나마 도련님의 부하였던 사람한테 그만한 동정심도 없어?”
“사람을 갖고 놀려고 한 놈이 별말을 다 하는군.”
“난 도련님의 빛나는 지성을 보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흠, 이건 어때요?”
“뭐.”
“도련님이랑 손잡고 물건 팔아먹은 공범. 찾고 싶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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