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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퇴사하면 안 될까-110화 (110/113)

110화

‘이게 뭐야.’

신종고문이라고 해도 믿겠다. 한차수는 괴로운 표정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신음을 내뱉었다.

배신자를 위한 꿈의 지배력을 잃었다는 걸 느낀 순간, 뭔가 범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 거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이건 그의 예측 범위를 벗어났다.

[소식을 들은 민산하는 생각했다. 그 많은 시간이 지났다 한들 채차수는 채차수라고. 멍청할 정도로 욕심만 가득한 그 녀석은 결국 착실하게 자멸의 길을 밟아 나갔다. 시시한 일이었다.]

등장인물들의 머리 위로 문장이 흘러갔다. 마치 자막처럼 사람들의 생각과 심리를 설명하는 글자는 황금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새벽에 자신이 받았던 메시지와 똑같이.

“마음에 들어? 머리가 싫다길래 다른 방법을 써 봤는데.”

“…입 다물어.”

무대 뒤편, 그림자에 가려진 모습으로 민산하가 웃었다. 장우산에 몸을 기댄 그의 형체는 어째선지 일그러진 듯 보였다.

“왜 그렇게 날카로워. 혹시 기억을 보면 성질머리도 덩달아 돌아오는 건가…그건 별로인데.”

우산 끄트머리로 바닥을 쿡쿡 찌르며 민산하가 덧붙였다. 그가 보기에도 과거의 채차수는 인간쓰레기가 아니었냐며.

“…넌, 하아. 됐다.”

한차수는 연거푸 마른세수를 했다. 그는 지금 채차수의 과거만으로도 머리가 폭발할 지경이었다.

민산하가 보여 주는 일이 진짜 맞다는 가정 하에-아니, 한차수는 내심 사실일 거라고 확신하는 중이었다- 지금까지 본 것들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채차수는 어려서부터 채라하를 시기하고 질투했다. 아픈 것 외에 자신보다 나은 게 하나도 없는 형이 사람들의 인정과 관심을 받는 걸 견딜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어릴 때는 그나마 봐줄 수 있는 수준이었다.

‘잘했다는 소리는 아니고.’

형이 마실 음료수에 벌레를 넣고, 은근슬쩍 계단에서 등을 밀치려 드는 건 짓궂은 정도를 넘었지.

형제의 부모도 그를 걱정한 게 틀림없었다. 민산하의 기억에 기반한 연극이라 정확한 상황은 알 수 없지만, 채차수는 다양한 심리 치료를 받았던 것 같으니까.

“상담 가셔야죠, 도련님.”

“말 걸지 마!”

별 도움은 안 된 것 같다만.

그 외에도 민산하는 꽤 다양한 장면을 보여 주었다. 주로 채차수가 얼마나 형을 싫어하는가를 증명하는 모습들이었는데 하나같이 보기에 즐겁지 않았다.

여름철 휴양지에서 채라하를 식중독에 걸리게 하려던 채차수, 설산 별장에 채라하를 고립시키려던 채차수. 형과 좋은 감정을 쌓아 나가던 사람을 유혹해 제 방에 있는 모습을 보여 준….

‘진짜 쓰레기군.’

그리고 믿을 수 없게도 채라하는 동생의 모든 행동을 용서했다. 자신을 향한 질투와 증오를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넓은 마음으로 감싸 안고 포용한 것이다.

‘채라하는 정녕 성인군자인가?’

도대체 어떻게 저 짓거리를 전부 당하고도 동생을 사랑할 수 있는 건지 믿기지가 않았다. 솔직히 말해 정이흔이나 백담이어도 그렇게까지는 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왜냐하면 그는 후계자가 확정되고도 끝까지 포기하지 못하는 동생을 납득시키기 위해… 젠장.

“하.”

거친 한숨을 토해 낸 한차수가 얼굴을 덮고 있던 손을 내렸다. 한껏 지친 회색 눈이 무대 뒤편을 향했다.

“민산하.”

“왜요, 도련님.”

“채차수는 정말 채라하를 죽이려고 했나? 그러니까, 계획에서 그친 게 아니라 실행에 옮겼어?”

“남 일처럼 말하네.”

“대답.”

비서라는 걸 알고서는 벌써 태도부터 바뀌었다며, 민산하가 툴툴댔다. 한차수가 노려보자 그는 벽에 등을 기댄 채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도련님. 신이 나서 온갖 계획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사방팔방 돌아다니셨죠.”

“빌어먹을.”

민산하는 욕설을 내뱉는 한차수를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흐음. 장우산을 벽에 기대놓은 그가 팔짱을 끼고서 입을 열었다.

“더 자세한 설명을 원하시나?”

“해 봐.”

성격이 바뀌더니 이런 건 시원해서 좋군. 손가락을 까딱거린 민산하가 입을 열었다.

“너는 거의 평생에 걸쳐 채라하를 눈앞에서 치우고 싶어 했어. 네 말을 빌리자면 ‘할 줄 아는 거라곤 모자란 놈처럼 웃으면서 사람들한테 뜯어 먹히기만 할 줄 아는 약골’이 왜 첫째라는 이유로 아버지의 모든 걸 물려받아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지. 아, 이렇게 말하니 채라하가 정말 아픈 것 외에는 쓸모없는 사람처럼 들리겠지만 어디까지나 헛소리야. 넌 채라하가 아파서 쓰러지거나 입원할 때마다 형을 항상 실패작이니 당장 갖다 버려야 하는 폐차니 뭐니 그런 식으로 불렀거든.”

“…….”

놀랍지도 않다.

반쯤 불타 잿더미가 된 한차수를 보며 민산하는 말을 이었다.

“그의 자리를 노려 왔고, 그럴 기회가 주어졌는데 왜 마다하겠어?”

한차수는 침음했다.

그래, 그게 문제였다.

채라하는 동생에게 아량을 베풀었다.

끝까지 자신의 패배를 납득하지 못한 채차수를 위해 마지막으로 기회를 마련해 준 것이다.

해가 가기 전까지 자신을 죽이는 데 성공한다면 그 어떤 책임도 묻지 않고 그에게 자신의 모든 법적 권리와 자산을 넘긴다는 미친 기회를.

***

“회장님이 허락하신 게 놀랍네.”

장소는 깔끔한 사무실. 협탁에 놓인 명패에 채라하의 이름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긴 소파에 등을 기댄 채 잡지를 뒤적이던 등장인물 1이 고개를 틀어 상석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설득했어? 난 회장님 앞에 서면 이상하게 몸이 굳더라. 어릴 때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서류를 넘기던 등장인물2, 채라하가 민산하의 말에 희게 웃었다. 그는 통창을 등진 채 성실히 주어진 일을 처리하던 중이었다.

“차수라면 걱정할 필요 없어. 내가 그 애를 해치는 일은 없을 테니까.”

“…내가 그쪽을 걱정해서 하는 말일까.”

은근슬쩍 말을 돌리는 채라하를 보며 민산하가 혀를 찼다. 햇살이 드리워진 얼굴에서 어린 날의 병색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때, 커다란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거칠게 문이 열렸다.

등장인물 3이 나타났다.

“너 여기서 뭐 하냐?”

훤칠한 키에 뚜렷한 이목구비. 안경에 가려지지 않은 큰 눈이 인상적인 청년, 민목하가 동생을 향해 쏘아붙였다.

참고로 그는 한차수가 알고 있는 민목하가 아니었다. 성격이나 태도 말고.

‘이쪽이 진짜 모습인가 보군.’

얼굴 자체가 달랐다.

아무래도 의료 센터에서부터 봤던 얼굴은 가짜였나 보다. 그다지 충격받지는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내심 찜찜하던 부분이었으니까.

‘내가 정말 기억을 잃었는지 확신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맨 얼굴로 나타나는 건 위험 부담이 크지.’

같은 맥락에서 소파에 반쯤 누워 있는 민산하의 얼굴도 지금 무대 뒤편에 있는 장본인과 딴판이었다.

등장인물 1은 여전히 소파에 누운 채 형을 반겼다. 살랑살랑 손을 흔드는 모습이 무척이나 태연자약했다.

“안녕, 형. 당연히 형 보러 왔지.”

“장난해? 넌 이제 사무실 출입 금지야.”

“아… 팍팍하긴. 그렇게 심각하게 굴 필요 없잖아.”

“시끄러워. 이건 목숨이 걸린 문제라고.”

“누구 목숨이 달렸는지는 뻔한데.”

민산하가 어깨를 으쓱였다. 민목하는 금방이라도 잔소리를 쏟아 낼 것 같은 얼굴이었으나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내가 이제 와서 채차수한테 붙을 리 없잖아. 우리 도련님은 날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고. 라하 형, 형이 반려시킨 내 해고 통지서가 지금까지 몇 개지?”

“비공식적인 것까지 합친다면 세 자리 수를 넘지. 문서화된 것만 따져서.”

“봐.”

“하아….”

할 말을 잃은 민목하는 어깨만 늘어트렸다. 민산하는 피식 웃으며 자세를 바로 했다. 형제는 곧 마주 앉아 작금의 사태에 대해 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만 보여 줘도 돼.”

“끝까지 보고 싶은 줄 알았는데.”

그림자 속에서 민산하가 웃었다. 그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빛이 머리 위에서 뭉쳐 황금색 문자를 빚어내고 있었다.

[민산하는 생각했다. 이 ‘경합’의 승자는 보나마나 채라하일 것이라고. 언제나 그렇듯 채차수는 패배할 것이고, 열등감에 몸부림칠 것이다.

다만 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경합이 끝난 뒤 채차수에게는 더 이상 패배가 허락되지 않는다는 점이겠지.

채차수의 발악이 통하는 건 이번이 마지막일 테니까.]

한차수는 머리 위에서 번쩍거리는 문장과 무대 뒤편을 번갈아 노려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뒤에 이어질 일이야 뻔하지. 채차수가 성공했다면… 채라하가 날 데리러 오지 못했을 테니.”

민산하가 우산을 까딱거리며 물었다.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혹시 어느 날 눈을 뜨니 다른 사람의 몸에서 깨어났다거나 한 경험 없나?”

“뭐?”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을 잃은 사람이 갑자기 똑똑해졌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어서.”

“…….”

한차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머릿속이 엉망진창인데 미친놈한테 정곡까지 찔리다니, 속이 복잡했다.

“고민하지 마. 진지하게 물어본 거 아니니까.”

딱!

민산하가 손을 튕겼다. 파스스…. 무대가 모래처럼 스러졌다.

한차수가 먼지처럼 흩어지는 채라하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물었다.

“그보다 네게 궁금한 게 있는데.”

“기꺼이 물어보시죠, 도련님. 뭐든 답해 드릴 테니.”

“왜 내게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민산하는 채차수에게 호감을 보인 적이 없었다. 첫 만남부터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얼굴을 마주한 순간까지.

“아, 그거 말이지.”

돌아온 대답은 가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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