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쿠웅-
콰앙! 쾅!
폭음이 울렸다. 한 번이 아니었다. 먼지구름이 피어오르며 압력이 피부를 쓸었다. 방금 전 그가 던진 폭발물의 여파였다.
그럼에도 얼굴을 찌르는 시선은 사라지지 않았다. 생명력 하나는 끈질긴 놈이었다.
“아, 이거 너무하네. 옷이 완전 넝마가 됐잖아.”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웅웅거리는 소음을 뚫고 고막에 닿았다. 빌어먹을 놈. 한차수는 혀를 차고선 땅을 박찼다.
“도련님, 이제 그만 평화 협정을 맺고 싶은데.”
“투항이라면 받아 주지.”
“협상 결렬이라는 거군. 알겠어.”
한차수는 쫓고, 상대는 도망치는 지루한 술래잡기가 시작된 건 지금으로부터 대략 이십 분 전. 상대가 가짜인 걸 알고 있다고 밝힌 순간부터다.
‘실은 그보다 오래됐을지도 모르지만.’
아무래도 정상적인 공간이 아닌지라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었다.
뭐,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언제까지 이럴 거야. 슬슬 힘들지 않아?”
한차수는 대답하지 않고 낮은 테이블을 집어 상대의 착지 예상 지점으로 날려 보냈다.
채앵-! 쿠웅!
“힘이 넘치는군, 우리 도련님. 오랜만에 봤더니 아주 펄펄 날아다녀.”
투덜거리는 음성과 함께 테이블이 벽에 처박혔다. 저놈의 장우산은 도대체 뭘로 만들어진 건지 아까부터 별짓을 다하는데도 부러지지 않았다.
“쯧.”
등급이 높은 아이템인가 보군.
하긴 대놓고 함정을 판 녀석이니 나름대로 만반의 준비를 했을 테다.
혀를 차자 가짜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파앙! 우산 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남자가 둥실 떠올라 다시 허공을 유영했다.
총만 있다면 저걸 그냥 확 쏴 버리는 건데.
그의 시선을 느낀 상대가 읊조렸다.
“내가 뭐 죽이려고 한 것도 아닌데 왜 사람을 몹쓸 놈 취급을 해.”
“사람 머리를 터트리려고 한 주제에 말은 잘하는군.”
녀석이 제 머리를 붙잡은 순간이 떠올라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때 느꼈던 끔찍한 통증이란….
마치 몸이 안팎으로 뒤집히는 것 같았다. 내장이 밖으로 빼내지고 가죽이 안쪽으로 말려 들어가는 듯한 고통.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은 감각이었다.
그래서 정신을 차리자마자 곧장 턱을 후려치고 몸을 빼낸 뒤 근처에 있던 철제 의자를 걷어차 날렸다.
콰앙!
안타깝게도 철제 의자는 방금 던진 흉상처럼 기다란 장우산에 의해 순식간에 산산조각났지만.
그 후로 계속 교착 상태가 이어지는 중이다.
녀석은 진정하고 자기 이야기 좀 들어 보라며 도망치고, 자신은 순순히 항복하라며 쫓아가고.
생각보다 볼품없는 추격전이었지만 그러려니 했다.
“터트리려고 한 게 아니라 가르쳐 주려고 한 거라니까. 사람 말 좀 귀 기울여 들어보는 게 어떨까, 도련님?”
“새벽에 수상한 메시지나 보내는 놈한테 받을 가르침 같은 거 없다.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무릎 꿇고 하라고 했을 텐데!”
상대는 사람을 떠보는 방법조차 허술한 놈이었다. 그걸로도 모자라 반나절이 채 지나기도 전에 자신을 직접 찾아오기까지 했고.
‘아쉬운 건 저쪽이야.’
맞춰 줄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다.
“메시지를 보낸 이유를 말해. 그놈의 진실이 뭔지, 그리고 왜 날 찾아왔는지도.”
“아까부터 똑같은 말만 반복하는 것 같은데… 알려 준다니까? 도련님 머리를 통해서 직접 느끼게 해 주겠다고 했잖아.”
“…미치겠군.”
“동감이야. 똑똑해진 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답답하게 굴지? 화상 자국을 알아차리고 날 쫓아온 건 대견한데 계속 헛발질하면 곤란하다고.”
환장하겠다, 정말.
보통 범인인 게 들통나면 쓸데없는 힘겨루기 없이 본론으로 직행하지 않나?
그러나 이놈은 아니었다.
“내가 말로 해 봤자 안 믿을 게 뻔하거든. 거짓말쟁이로 몰리느니 확실하게 상황을 보여 주려는 건데 왜 싫다는 건지 모르겠네.”
녀석이 원하는 건 단 하나였다.
진실을 알고 싶다면 머리를 내놔라. 그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며 그 어떤 협상도 거부했다.
‘갑자기 머리를 터트릴지도 모르는데 잘도 들어주겠다.’
한차수는 언덕처럼 솟아오른 바닥을 밟으며 도약했다.
제 머리통을 원하는 가짜와 술래잡기하며 한 가지 알아낸 게 있다면 ‘배신자를 위한 꿈’이 그의 의지를 따른다는 점이다.
한차수는 벽을 세우고 바닥을 무너트리는 등 공간을 새로이 구성할 수 있었다. 뭘 해도 그놈의 백합 문양만은 절대 사라지지 않았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 슬슬 시간이… 음. 안 되겠네. 진지하게 상담 좀 하자, 도련님.”
목소리가 점점 낮아진다 싶더니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귀를 찢는 바람 소리에 한차수는 눈썹을 찌푸렸다.
“젠장.”
술래가 바뀌었다.
쿠웅! 쿵! 속도를 높이기가 무섭게 단숨에 따라잡혔다. 상대가 우산을 휘두를 때마다 먼지구름이 피어올랐다 순식간에 사라졌다.
바닥이 폭격을 맞은 듯 움푹 파였다. 한차수는 재빨리 벽에 붙어 공격을 피했다.
“거참 너무하네. 해치지 않는다니까?”
“퍽이나 신뢰가 가는군!”
때려죽이겠다는 듯이 달려드는 주제에 말은 잘한다. 지금도 녀석의 눈이 제 목에 닿는 게 느껴지는데 말이다.
“생각해 봐, 도련님. 내가 딱히 해를 끼친 건 없잖아. 잘 자고 있던 도련님을 깨운 건 미안하게 됐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내가 다치는 건 싫나 보지?”
“그럼.”
“좋아.”
어디 한번 보자고.
후욱!
한차수는 딛고 있던 땅을 지워 버렸다. 옷자락이 칼날처럼 나부끼고 시야가 거칠게 쓸려 내려갔다.
순식간에 바닥으로 추락하는 육체.
“야!”
그리고 눈앞으로 다가온 상대.
됐다.
콰앙! 한차수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상대의 멱살을 붙잡아 그대로 반 바퀴 돌려 바닥으로 처박았다. 저항하지 못하도록 무릎으로 배를 찍는 건 기본이었다.
“커헉.”
“이제야 말이 통할 것 같네.”
“…하아, 쿨럭! 컥! 미친… 진짜 어이가 없네.”
“됐고, 본론으로 들어가.”
“우리 도련님. 기억 상실이 아니라 사람이 바뀐 게 아닌가 싶다니까.”
“…그놈의 도련님 소리 좀 그만하지. 진짜도 아닌 게.”
“아.”
깨달음을 얻은 듯한 얼굴에 한차수가 눈썹을 찌푸렸다. 이어진 말을 들은 뒤에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숨을 터트렸다.
“내가 누군지 몰라서 그런 거였군. 깜빡했네.”
너무 태연하게 날 대해서 기억하고 있는 줄 알았지 뭐야. 가짜가 중얼거렸다.
“좋아. 그럼.”
그러나 가짜의 결심은 일 분도 되지 않아 허무하게 스러졌다.
“자기 소개할 필요 없어. 알고 있으니까.”
“…알고 있다고?”
담담한 대답에 상대는 제법 놀란 듯싶었다. 알 만했다. 가짜라는 걸 알아차릴 거라는 예상은 했어도 진짜 정체를 파악할 거라는 생각은 못했겠지.
“일란성이라고 들었는데… 민목하보다 키가 좀 더 큰 모양이지, 민산하?”
“…!”
맞나 보군. 휘둥그레지는 상대의 눈을 들여다보며 한차수는 무릎에 힘을 실었다.
상대의 정체를 짐작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표적의 외양과 특징적인 습관을 따라 하는 건 연습으로 가능한 범주였다.
하지만 그걸 무의식중에, 심지어 누군가에게 공격을 받는 와중에 따라할 만큼 깊게 체화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주 오랜 세월 표적의 곁에서 지내며 그의 사소한 몸짓을 자연스레 배운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래서 알아차렸다.
“누가 남동생하고 같이 목욕하고 모래찜질을 하냐고요? 그야… 저요?”
“…사이가 굉장히 좋으신가 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함께였으니까요.”
민목하의 쌍둥이 동생. 형제간의 우애를 다지기 위한 책자에 나온 거지같은 일화의 또 다른 주인공.
민산하가 이 어처구니없는 사태의 장본인이라는 걸.
민목하보다 키가 크다는 건 순전히 몸놀림을 보고 유추한 단서였다. 관절의 가동 범위를 더 넓게 잡는 모습이 눈에 잡혔으니까.
그 외에도 벽에 처박히기 직전 몸을 돌릴 때는 발끝이 구조물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간 적이 여러 번이었다.
달라진 다리 길이를 챙기지 못했다는 의미다.
“민목하 씨는 뭐 수면제라도 먹였나? 아니, 이쪽으로는 오지도 못할 만큼 바쁜 상태일 수도 있겠군.”
나름대로 사이좋은 형제로 보였으니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도 사이가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형제 관계라는 게 원래 그런 거지.’
한차수는 이골이 날 만큼 잘 알고 있었다.
한편, 민산하는 제 정체를 알고도 거리를 둔 게 퍽 억울한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날 못 믿었다 이거지….”
“민목하를 향한 신뢰를 널 위해 베풀 필요는 없지. 게다가 원래 등 돌리기 제일 쉬운 게 가족이지 않나.”
여상스러운 대답에 민산하가 코웃음 쳤다.
“꼭 그런 기억이 있는 사람처럼 말하는군.”
한차수는 어깨를 으쓱였다. 우드득! 바닥과 벽에서 돋아난 가시가 그의 목을 노렸다.
“그래서 어쩔 거지?”
너털웃음을 지은 민산하가 어깨를 으쓱이고선 온몸에 힘을 뺐다. 항복의 표시였다.
“뭐, 정 날 못 믿으시겠다면야 어쩔 수 없지.”
드디어 끝이군. 다행이다. 여기서 더 고집을 부렸다간 정말 어디 한 군데 부러트렸을지도 몰랐으니까.
“그럼 이제….”
그때였다.
쩌어엉——!
“윽…!”
무언가가 뒤통수를 크게 후려친 듯했다. 시야가 일그러지고 속이 울렁거렸다.
처음에는 빌어먹을 놈이 제 뒤통수를 때린 줄 알았다. 그러나 곧 깨달았다.
주도권을 빼앗겼다.
이 공간을 움직이는 힘을 말이다.
“아프지는 않지만 어지럽긴 할 겁니다, 우리 도련님.”
화아악!
무채색 세상을 물들이는 휘황찬란한 색채. 들불처럼 일어나는 빛과 점점 뚜렷해지는 형체들. 그리고….
“느끼기 싫으면 보여줄 수밖에 없거든.”
과거가 펼쳐졌다.
한차수가 모르는, 그러나 민산하는 기억하는 채차수의 과거가.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