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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퇴사하면 안 될까-107화 (107/113)

107화

나 좀 알아봐 달라고 난동을 피우는 놈이라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대놓고 나타날 줄이야.

한차수는 혀를 차면서도 눈에 띄지 않게 상대를 살폈다.

‘이놈 이거 도대체 뭐 하러 온 거야?’

자신이 아일라를 만났다는 걸 알고는 확인 차 들린 건가.

“아일라 양을 만나셨다면서요. 작은 도련님에 대한 칭찬이 엄청나던데 대체 어떻게 하신 겁니까?”

“그냥 얘기가 잘 통하던데요.”

만약 그렇다면 정말 웃긴 놈이 따로 없었다.

겨우 한 명 만났을 뿐인데 뭐가 그리 궁금해서 부리나케 달려오신 건지.

아, 참고로 자신 외에 그가 가짜라는 걸 알아차린 이는 없었다.

“역시 적풍이었군요. 관리국에서 연락이 왔다면 4본부인가요?”

“4본부와 5본부가 함께 투입되는 것 같습니다.”

“오, 본격적이네요. 하긴 섬을 두 개째 날려 버리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래도 천령길드장께서 이곳에 계시다는 말을 듣고는 안심하더군요.”

“관리국 녀석들은 우리 길드장님이 없으면 일을 못하나봐요.”

녀석은 진짜와 똑같았으니까.

외양이나 목소리가 같다는 걸 말하는 게 아니었다.

‘그 정도는 아이템이나 스킬로 복제할 수 있지.’

한차수는 심드렁한 눈으로 가짜를 훑었다.

보통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서 느끼는 위화감은 아주 사소한 데서 온다.

이를테면 이야기를 나눌 때 느껴지는 상대의 시선 처리. 웃을 때 올라가는 입꼬리의 각도나 얼굴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

그 외에도 걸음걸이나 보폭. 평소에 손을 사용하는 방식이나 주로 사용하는 어휘 등등….

함께 한 시간과 경험이 많을수록 상대에 대한 정보는 무의식중에 겹겹이 쌓이고, 그것은 곧 하나의 지표가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상대가 어색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뭐라고 딱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뭔가 묘하게 찝찝한 순간.

대부분은 상대의 심리가 평소와 다르거나 문제가 생겼다는 걸 알아차리는 데서 그치지만 아닌 경우도 존재했다.

‘이렇게 남을 흉내 내는 경우 말이지.’

그런 맥락에서 이 자리에서 자신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민목하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판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민목하와 지낸 시간이 짧으며, 질적으로도 풍부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별 의미는 없었을 테다.

‘지나치게 정교해.’

한차수의 눈이 차분히 상대를 훑었다.

‘꼭 민목하를 복제해 둔 것 같군.’

그래, 이 가짜는 진짜와 차이가 없었다.

보폭이나 걸음걸이, 목소리의 높낮이와 얼굴 근육을 사용하는 방법이 동일했다. 굳이 차이점을 찾자면 동작이 아주 미세하게 조금 더 큰 정도일까.

그런데 자신은 어떻게 알아차렸느냐….

사실 별거 없었다.

“이 상처 말입니까? 작은 도련님을 구하다 입은 영광의 상처죠.”

채라하가 욕실에서 형제만의 즐거운 시간을 보내자고 징징거렸을 때. 그곳에는 민목하도 있었으니까.

“입욕제는 이걸 추천드립니다.”

빌어먹을 책자를 저술하신 분께서는 채라하를 움직이는 걸로도 모자라 현장에도 직접 참여하길 원하셨기 때문이다.

“스크럽은 이걸로.”

“하….”

그걸 욕실 시중이라고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는데, 여하튼 민목하는 장소에 걸맞은 의복을 갖췄다.

목욕 내내 별로 보고 싶지 않은 놈의 맨가슴을 보게 되었다는 말이다.

덩달아 가슴에 난 상처까지도.

“S급은 괜히 S급이 아니더군요.”

자신을 균열에서 빼내 온 날 치러진 정이흔과의 처절한 전투에 대해서도 듣게 되었다.

‘정이흔을 무슨 마왕처럼 묘사한 게 웃기긴 했지.’

정작 친형인 채라하는 가만히 있는데 민목하가 혼자 흥분해서 분노를 토해 내는 게 신기했었다.

그런데 그게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한차수는 흘끗 가짜의 헐거운 셔츠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샌님 같은 외양과 달리 탄탄한 가슴엔 진한 화상 자국이 남아 있었다.

진짜 민목하에게는 남아 있지 않은. 이미 며칠 전에 치료를 끝낸 화상 자국 말이다.

“흐음….”

참고로 화상 자국을 통해 알아낼 수 있는 정보는 눈앞의 민목하가 가짜라는 것만이 아니었다.

한차수는 그보다 더 많은 정보를 획득했다.

상대는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보아하니 계속 섬에 숨어 있던 모양이군.’

민목하는 정이흔과의 싸움에서 상처를 입었고, 그 이후 단 한 번도 섬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고로 화상을 입은 민목하의 모습으로 변신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섬에 한 번은 발을 들여야 했다는 뜻이었다.

숨어 지냈을 것이라 추측한 건 상대가 민목하의 상처가 다 나았다는 걸 알지 못했기 때문이고.

‘알았다면 당연히 치료가 끝난 상태로 왔겠지.’

하지만 상대는 며칠 전 상태로 변신했다. 정보를 실시간으로 갱신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소리다.

추측이 맞다면 민목하에게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뜻이었다.

한차수가 가짜를 눈앞에 두고도 평온한 이유였다.

‘민목하에게 해코지를 했거나 직접 가뒀다면 상처가 없는 모습으로 나타났을 테고.’

흉내 내야 할 상대를 제압했는데 왜 굳이 상대의 과거를 재현하겠는가.

따라서 진짜 민목하는 아마 모종의 이유로 운신이 불가능한 상태일 가능성이 높았다.

뭐, 그렇지 않더라도 상대가 민목하를 해칠 가능성은 거의 없겠지만….

‘그나저나 나도 알아볼 정도면 채라하는 단번에 눈치챌 텐데, 어쩌려는 걸까.’

한차수는 조금 흥미 섞인 눈으로 가짜를 응시했다. 이대로 간다면 채라하를 만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저택으로 가는 길목에 접어들자 가짜 민목하가 갑자기 수선을 피웠다. 단말기 같은 걸 확인하더니 곤란한 얼굴로 혀를 차는 게 아닌가.

“이런.”

“왜 그러세요. 혹시 적풍이 이쪽으로 오는 건…!”

“아, 아닙니다. 아까 전에 있었던 충격으로 섬 뒤쪽으로 이어지는 길이 끊겼다고 확인 차 와 달라고 하네요. 아무래도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것 봐라.

한차수는 도망갈 준비를 하는 가짜를 보고선 피식 웃었다.

‘재밌는 놈이네.’

슬슬 감이 잡혔다. 상대의 정체도 어느 정도 윤곽이 나왔고.

한차수는 선희다가 들것에 실린 채유진을 살피러 간 걸 확인한 뒤 손을 쥐었다 폈다.

‘어차피 오래 참아 줄 생각도 아니었지만….’

상황이 이러니 어쩔 수 없었다.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예? 한차수 씨도요?”

선희다가 놀라 뒤를 돌아봤다. 한차수는 소매에 묻은 흙먼지를 털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이 잦아들지 않아 먼지가 풀풀 날아다니고 있었다.

“저택으로 가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정이흔이 슬쩍 다가오며 말했다. 말은 권유지만 압박감이 상당했다.

“가 봤자 할 일도 없을 텐데요, 뭐.”

한차수는 정이흔의 손을 피해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섬 뒤편으로 향하는 가짜 민목하의 뒷모습이 보였다.

“한차수 씨.”

“정 급하면 바로 사용하겠습니다.”

한차수가 구슬을 흔들었다. 의료 센터에서 받았던 것과 같은 구슬이었다.

정이흔이 한숨을 내쉬었다. 관리국의 호출을 받은 그는 안타깝게도 한차수를 따라갈 수 없었다.

“위험한 것 같으면 가까이 다가가지 말고 뒤로 빠져 있으십시오.”

“예에.”

한차수는 씩 웃으며 대답하고는 민목하와 함께 길을 틀었다. 정이흔은 어딘가 아련한 눈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잠시 뒤.

“작은 도련님?”

“거기 가만히 서 있는 게 좋을 겁니다.”

한차수는 반대편 손에 들고 있던 아이템을 발동시켰다.

[ 배신자를 위한 꿈 ]

: 소중한 이와 함께 하길 원하는 누군가의 이기적인 소망이 깃들어 있다.

-효과 : 지정 대상을 자신과 함께 외부로부터 일정 시간 동안 격리

화아아악——!

새까만 운무가 바닥에서부터 피어올랐다.

***

“아이고.”

“자, 작은 도련님! 대체 뭘 하신 겁니까?!”

한차수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남자를 무시한 채 주변을 살폈다.

예상대로 환각 심장이 만든 공간과 비슷한 분위기였다. 배신자를 위한 꿈은 마도사가 드랍한 아이템이었으니까.

군데군데 흐릿한 구석이 있었지만 바닥에 깔린 카펫에 새겨진 문양만은 선명했다.

백합.

브로치에 새겨져 있던 문양이자 아데르잔 공작가의 상징이었다. 한차수는 아직도 브로치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짓던 공작을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의 사랑은 그래도 거짓이 아니었다며 읊조리던 사내를.

‘하지만 그건 실패였지.’

“도련님!”

낯익은 목소리가 상념을 밀어냈다.

한차수는 슬쩍 눈을 들어 자신을 채근하는 사내를 응시했다.

이 녀석 아직도 내가 눈치챈 줄 모르네.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거거나.’

“…민목하 씨.”

“네, 도련님.”

“내가 웬만해서는 어울려 주고 싶은데… 굳이 제 발로 굴러 들어온 기회를 걷어차고 싶지는 않거든. 우리 좀 솔직해집시다.”

“예?”

한차수는 제 앞에 한쪽 무릎 꿇은 사내의 멱살을 가볍게 낚아챘다. 구부러진 안경 너머, 갈색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도, 도련님?”

이거 끝까지 이러네.

‘뭐, 됐다.’

한차수는 가짜와 얼굴을 마주한 채 귀찮음 가득한 음성을 내뱉었다.

“너, 뭐 하는 놈이냐.”

“…단발성 기억 상실증인가. 맙소사. 괜찮습니다, 도련님. 저만 믿으시고.”

투두둑.

그렇지 않아도 아슬아슬하게 달려 있던 단추들이 단번에 튕겨 나갔다. 모양 좋은 손이 순식간에 추레한 차림새가 된 가짜의 가슴팍을 찔렀다.

“걔 지금 상처 없다. 마지막으로 본 게 사흘 전인 모양이야. 그렇지?”

침묵은 무겁지 않았다. 공기를 팽팽하게 당기는 긴장감도, 짙은 살기도 없었다.

한차수는 가만히 상대를 응시했다. 흔들림 없는 회색 눈동자에 상대의 모습이 그대로 비쳤다.

이윽고 사내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알아봐 줘서 기쁘네.”

커다란 손이 한차수를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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