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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퇴사하면 안 될까-106화 (106/113)

106화

채유진은 전체적으로 예민한 분위기를 가진 사내였다.

고양이처럼 끝이 올라간 긴 눈매에 움푹 파인 볼. 고집스러움이 느껴지는 턱까지.

“어떻게 할까요? 안으로 들이려면 결계를 해제해야 하는데.”

선희다가 검집으로 채유진을 툭툭 뒤집으며 말했다. 무의식중에 욕 같은 걸 간간히 내뱉던 그는 끝내 정신을 잃은 뒤였다.

충격파에 휘말려 간이 결계에 부딪힌 충격이 어지간히 컸나 보다.

‘채유진의 특성은 마법 계열이라고 했지.’

많은 친척 중 채라하가 그를 부른 이유에는 채유진이 집안에서 반쯤 쫓겨난 자식인 것 외에도 그의 능력이 한몫했다.

그는 섬을 둘러싸고 있는 대형 결계의 유지 및 보수를 위해 불려 왔다. 아무리 잘 구축된 결계라 하더라도 주기적인 확인과 관리가 필요한 탓이었다.

아까 전 구멍 난 결계도 아마 채유진이 현장에서 틀어막은 게 분명했다. 그러다 미처 충격파에 대비하지 못하고 이렇게 날아온 거겠지.

“음….”

한차수는 채유진을 바라보다 먼 바다를 확인하고는 다시 채유진을 응시했다.

마법사라면 다른 특성을 가진 각성자들에 비해 대체적으로 정신력이 높았다. 정신 계열 방어력도 비슷할 가능성이 컸다.

그뿐이겠는가. 꿈틀거릴 때마다 짤랑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걸로 보아하니 아이템도 잔뜩 두르고 있는 것 같은데….

한차수는 생각을 이어 나가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심상찮은 바람 소리를 들은 뒤였다.

‘이런.’

새까만 수면을 본 그의 눈썹이 꺾였다.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한차수가 말했다.

“일단 안으로 들이는 게 좋겠습니다.”

소용돌이는 사방으로 불덩이를 쏟아 낸 뒤 위력이 약해진 상태였다.

하지만 방심하기에는 일렀다.

“소용돌이가 움직이는 것 같거든요.”

검은 폭풍우가 조금씩 움직이는 게 보였다.

귀를 찢는 귀곡성 또한 마찬가지였다. 검은 형체가 소용돌이를 중심으로 휘휘 도는 게 어째선지 의료 센터에서의 추억이 떠올랐다.

금명결이 소환한 악령들 말이다.

“예? 그럴 리가…. 젠장, 진짜군요. 저 녀석들 아직도 싸울 사람이 남아 있나?”

끼야아아아아아——

귀신이 울부짖는 것 같은 기분 나쁜 소리에 한차수는 미간을 구겼다. 선희다도 마찬가지였다.

혀를 찬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이상하네요. 보통 섬이 날아갈 때쯤이면 순위 결정전도 끝날 텐데. 적풍 인원수가 곱절로 불어났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 없어요.”

“…다른 목적일 겁니다.”

정이흔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는 차분한 눈으로 결계 밖을 보고 있었다.

“예?”

“얼마 전에 적풍의 수장이 관리국에 소환당해 크게 면을 구긴 일이 있지 않았습니까.”

백담 습격 사건을 일컫는 말에 채유진을 살피던 한차수의 어깨가 움찔 튀었다.

‘그러고 보니…’

백담을 습격한 자유주의자 헌터들이 백치가 되고, 그 후 구치소가 습격당한 뒤 사건에 대한 소식을 일절 듣지 못했다.

‘뉴스에도 별다른 말이 나오지 않던데, 설마 아직까지도 배후를 찾지 못한 건가.’

적풍 입장에서는 짜증이 날 만도 했다. 그렇게 들쑤시고 뒤집어 대더니 막상 아무 성과도 내지 못한 관리국이 아니꼽겠지.

보통 이쯤 되면 뭔가 단서라도 잡았어야 하는데 말이다.

‘…생각해 보니 이상한 구석이 남아 있긴 하군.’

백담을 노린 습격범들은 모종의 술수로 인해 이지를 상실했다. 거기까지는 그리 놀랍지 않았다. 쓰고 버리는 패에게 조치를 취해 놓는 건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그 다음이 문제였다.

쓸모를 다한 도구. 그것도 이젠 혼자서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놈들을 제거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썼다고?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그럴 이유가 없어.’

죽일 생각이었다면 백치로 만드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자폭 장치를 심어 뒀겠지. 그쪽이 더 깔끔하기도 하고 말이다.

자신이 관여할 일이 아니라 깊게 파고들지 않았는데, 생각해 보니 제법 찜찜한 사건이었다.

“흐음….”

관리국도 꽤나 골치 아프겠는데. 한차수가 낮은 한숨을 내쉰 순간이었다.

갑자기 어깨 한쪽이 무거워졌다. 고개를 돌리니 크고 단단한 손이 그를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정이흔이었다.

한차수는 묘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살짝 땀에 젖은 앞머리 사이로 보이는 얼굴이 유려했다.

그는 담담한 어조로 선희다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단순한 힘겨루기가 아니라면 외부에 날리는 메시지일 겁니다. 자신들이 마음먹으면 이렇게까지 할 수 있다는 경고이자 힘자랑인 셈이죠.”

“관리국하고 대놓고 한 판 붙고 싶다는 거네요?”

“예, 다른 때라면 위험했을 테지만 이번엔 저쪽이 원하는 목표가 따로 있으니 이쪽으로 눈을 돌리지는 않을 겁니다. 한 번 사냥감을 정하면 피를 보기 전까지 절대 포기하지 않는 이들이니… 참 귀찮은 사람들이죠.”

혀를 차며 덧붙인 말에는 사적인 감정이 듬뿍 묻어 있었다. 적풍에게 몇 번이고 시달린 정이흔이라면 그럴 만했다.

적풍은 강함을 숭상하고 힘의 논리를 따른다. 그러니 각성자 중 최강이라는 S급을 가만히 놔둘 리가 있겠는가.

정이흔은 몇 번이고 그들의 표적이 되어 소득 없는 전투를 억지로 치르고는 했다.

원작에서는 더 심했다. 동생이 죽은 뒤 더는 잃을 게 없어진 그는 적풍의 이상형이 되었다.

압도적인 무력으로 세상을 박살 내며 자신의 규칙을 강요하는 모습에 적풍이 홀딱 빠져 그들에게 스토킹을 당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으나 정이흔은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정말 미친 내용이었군.’

그런 미래가 오지 않아서 다행이다.

‘앞으로도 그냥 이렇게 있자.’

한차수는 제 어깨 위에 놓인 정이흔의 손을 토닥였다. 새삼 그의 성품에 탄복해서였다.

“한차수 씨?”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랐는지 정이흔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이쪽을 내려다보았다. 한차수는 인자한 얼굴로 그를 마주 보았다.

그래, 호구면 어떠한가. 원작에 비하면 천사나 다름없는 것을.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한차수에 정이흔이 당황한 찰나.

“쿨럭, 컥!”

아직도 결계 바깥에 나동그라져 있던 채유진이 거친 숨을 토해 냈다.

저놈을 잊고 있었군.

“지금 다시 세울까요?”

“예. 저희가 옮기겠습니다.”

한차수는 결계의 경계선이 흐려지는 타이밍에 맞춰 정이흔과 함께 녀석을 건물 안쪽으로 들였다.

후우욱!

채유진을 벽에 기대 세우는데 바닥을 타고 흐르는 불빛이 보였다. 새 결계가 성공적으로 세워진 것이다.

“그럼 이제….”

“깨울까요?”

정이흔과 선희다가 어떻게 하고 싶냐는 듯 이쪽을 바라보았다.

한차수는 가만히 목 뒤를 쓸었다.

회색 눈동자가 차분히 채유진을 훑었다.

결계 보강을 위해 불려 온 마법 특성 계열 각성자. 동시에 한차수의 친척이자 당연히 그를 알고 있을 남자.

원래 계획대로였다면 한차수는 그에게 좋아한다는 와인을 잔뜩 안겨 준 뒤 진탕 취하게 해서 어렸을 적의 자신에 대해서 물을 예정이었다.

주로 채라하가 언급하지 않은 사춘기 시절을 집중적으로 말이다.

‘거짓말을 한대도 반지가 속마음을 알려 줄 테니 상관없고.’

다만 아이템을 저렇게 주렁주렁 매달고 있을 줄은 몰랐다.

‘일단 벗길까.’

생각해 보니 뇌를 술로 절이는 것보다 일어났을 때 아무것도 걸치고 있지 않은 게 더 혼란스러울지도 몰랐다.

‘화를 내더라도 상처 확인을 위해서 벗겼다고 하면 되고.’

좋아.

한차수가 선희다에게 잠시 옆방에 가 줄 수 있냐 물으려던 때였다.

쿵, 쿵!

결계가 흔들리더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작은 도련님! 거기 계십니까? 작은 도련님!”

민목하였다. 한차수가 저도 모르게 멈칫한 사이 선희다가 빠르게 벽에 붙어 창밖을 확인했다.

“민목하 씨 맞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직원 대피는 다 끝났나 보지?

자리에서 일어선 한차수는 슬쩍 발돋움을 해 수평선을 확인했다.

“슬슬 나가도 될 것 같긴 하네요.”

소용돌이가 먼 곳으로 떠난 탓일까. 바다는 언제 거친 모습을 보였냐는 듯 잔잔해진 지 오래였다.

수면을 찢을 듯 울려 대던 귀곡성조차도 말이다.

“그럼 채유진 씨는 음… 길드장님, 부탁드립니다.”

한차수는 자연스레 채유진을 정이흔에게 떠넘긴 뒤 문을 열었다.

“작은 도련님!”

아직 해제되지 않은 결계 너머, 민목하가 보였다. 거친 바람을 뚫고 온 탓인지 평소보다 지저분한 행색이었다.

오다가 한바탕 굴렀는지 어쨌는지 금 가고 먼지 묻은 안경에 헝클어진 머리하며 풀어 헤쳐진 셔츠까지….

흠.

“괜찮으십니까?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시고요?”

민목하의 꼬락서니를 살핀 한차수가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민목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입니다. 다른 분들도 다 괜찮으시죠?”

“여기 친척이라는 분이 기절하시긴 했는데….”

“예?!”

상황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기겁한 민목하가 어딘가로 연락을 넣자 재빨리 사람들이 들 것을 가지고 나타났다.

“가시죠, 도련님.”

“형님은 괜찮으십니까?”

“그럼요. 오히려 슬퍼하고 계실 겁니다.”

“예?”

“원래 큰 도련님이 직접 오시려고 했거든요.”

안타깝게도 대피하자마자 각성자 관리국에서 연락이 오는 바람에 성사되지는 못했다고 민목하는 덧붙였다.

“아하…. 그렇군요.”

‘생각보다 연기를 잘하는군.’

예상대로 인내심은 없는 것 같지만 말이야.

한차수는 피식 웃으며 눈앞에서 재잘거리는 놈을 바라보았다.

녀석은 민목하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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