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그다음 이어질 질문은 굳이 머리를 굴릴 필요도 없었다.
정말로 내가 기억을 찾지 않길 바라는가.
한차수는 물었고, 그녀의 마음은 답했다.
-분명 과거에는 관심 없다고 들었는데… 소장님께 말해야 하나? 일단 잘 말해서 돌려보내자. 채차수가 기억을 되찾아서는 안 돼, 절대로.
‘이것 봐라.’
한차수의 입꼬리가 자연스레 올라갔다.
작정하고 속인 건 아닐지 몰라도,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건 확실했다.
뭘 숨기고 있는 걸까.
왜 숨기고 있는 걸까.
다른 두 명은 그 이유를 알고 있을까?
머릿속을 스치는 의문을 정리하며, 한차수는 생각했다.
‘여기서 더 알아낼 건 없겠군.’
아일라에게 쓸 수 있는 두 번의 기회는 모두 사용했다. 시간을 끌며 더 떠볼 수도 있겠지만 쓸모없는 짓이었다.
상대는 이미 태도를 정한 지 오래였다.
‘내가 무슨 말을 꺼내든 상관없어. 아일라는 내게 과거에 대해 알려 주지 않을 거다.’
허점이나 말실수를 노릴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느릿한 어조와 무심한 듯한 태도는 일견 허술해 보였으나 빈틈없었으니까.
그러니 여기서 깔끔하게 물러나는 게 옳았다. 딱히 협박이나 무력을 동원해 캐낼 정도로 심각한 상황도 아니고.
“슬슬 가 봐야겠습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아일라가 벌써 가냐며 아쉬운 기색을 내비쳤다.
한차수는 그녀의 아쉬움이 제가 아니라 아이템을 향한 것임을 알고 작게 웃었다.
뭐, 이러나저러나 호감을 산 건 확실한 듯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가끔이면 와도 좋아요. 거기, 주황색 머리분도….”
“저요?”
가만히 서 있던 선희다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자신을 가리켰다. 아일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난리 법석을 벌이는 와중에도 침착하게 곁을 지킨 게 마음에 들었나 보다.
그게 아니면 중간중간 선희다가 건네준 간식거리가 입에 맞았나 보든지.
“음, 그래요. 또 뵈면 좋죠.”
“잘 가요.”
아일라의 조용한 미소를 뒤로하고 한차수는 건물을 나섰다.
그리고 그대로 쭉 걸어 해변가로 나왔다. 아일라의 행방을 알려 준 직원이 다른 손님에 대해서도 말해 줬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곧 선착장에 도착했다.
“날씨 좋네요.”
“그러게요. 오늘 같은 날씨면 요트를 띄워도….”
그때였다.
쿠우웅——!
“윽!”
“한차수 씨!”
강한 충격이 섬을 통째로 흔들었다. 결계가 출렁이며 하얀 격자무늬가 뚜렷이 드러났다.
“저게, 뭐….”
처음엔 산맥이 솟아난 줄 알았다. 자세히 보니 그건 검게 일어난 파도였다.
바다가 성난 짐승처럼 으르렁대고 있었다.
쿠우웅!
“이쪽으로!”
결계가 무너진 건 아니었으나 멍청히 관망할 수준은 아니었다. 한차수는 선희다의 지시에 따라 빠르게 선착장 근처 건물로 몸을 피했다.
휘오오오오——
돌개바람 소리가 거칠게 대기를 찢었다. 창문이 금방이라도 떨어져 나갈 것처럼 덜컹이고, 수풀이 울었다.
“폭풍우 한가운데 떨어지면 이런 느낌일 것 같군요.”
“그러게요.”
분명 태양이 하늘 높이 떠 있는데도 그림자에 잡아먹힌 것처럼 어두운 수면. 모래사장을 잡아먹을 듯 거칠게 달려드는 파도.
한차수는 그 원인이 결계 너머 멀리 보이는 소용돌이 때문이라고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도대체 저게 뭐길래….”
조용히 읊조리는데 한순간 소용돌이가 마치 살아 있는 듯 몸을 틀었다. 바람은 굵게 똬리 튼 뱀처럼 사정없이 꿈틀거리고, 배를 까뒤집더니.
츠츠츠츳—
콰아아아!
날카로운 기운을 사방으로 쏟아 냈다. 어찌나 예리하게 다듬어진 기파인지, 짧은 순간 수면이 뭉텅이로 잘리는 게 보일 정도였다.
물론 결계도 이번만큼은 무사하지 못했다.
까드드득—
키이이잉—!
화살처럼 쏘아진 기운에 결계 이곳저곳에 균열이 일었다. 촘촘히 짜인 그물 사이사이 부식되듯 검은 구멍이 뚫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콰직.
꽈과과광!
뭔가 터져 나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아주 가까운 곳이었다. 묵직하고 단단한 무언가를 짓밟아 부수는 듯한 소리였다.
“한차수!”
포효가 대기를 흔들었다. 놀란 한차수가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선희다가 외쳤다.
“여깁니다!”
확인했다는 음성이 뒤를 잇고 선희다가 움켜쥐고 있던 손을 그대로 바닥에 세게 내리쳤다.
콰직!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녀의 손에서 빛줄기가 솟구쳤다.
피잉-
후욱!
노란빛은 빠르게 아래로 꺼지더니 파도처럼 넓게 퍼졌다. 그 순간, 갑자기 숨쉬기가 편해졌다.
한차수는 그제야 선희다가 뭘 부순 건지 깨달았다.
“이제 괜찮을 겁니다, 한차수 씨.”
“그건….”
“처음 보세요?”
“아뇨, 아이템 거래소에서 봤었습니다.”
방금 그녀가 사용한 건 긴급 간이 결계 설치 아이템.
‘목숨줄’ A 타입이었다.
직관적인 이름답게 복잡한 준비나 스킬 없이 바로 사용할 수 있는 결계 아이템이었다.
다만 긴급용인 만큼 한계가 있었다. 한 번 세우고 나면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고 지속 시간도 짧았다.
말 그대로 목숨줄을 잠깐 이어 주는 용도인 것이다.
‘인벤토리에 비슷한 게 하나 있던 것 같은데.’
결계 안에서 습득한 아이템을 떠올리며 인벤토리 창을 불러오려던 순간이었다.
“한차수 씨.”
돌연 단단한 가슴팍에 얼굴이 파묻혔다.
“컥.”
온기를 품은 대리석에 코를 부딪친 기분이었다. 그뿐일까. 흉통을 힘껏 조이는 팔 힘에 그대로 찌부러지는 줄 알았다.
“길드장, 님.”
“놀라진 않았습니까?”
너 때문에 놀랐다, 너 때문에.
얼얼한 코끝을 붙잡은 채 노려보자 정이흔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손을 뻗었다.
“바람에 넘어진 겁니까? 어디 좀 봐요.”
“…….”
말없이 가만히 노려보기만 하니 정이흔도 곧 제 죄를 깨우쳤다. 그가 몹시 미안하다는 듯한 얼굴로 포션을 꺼냈다.
“됐습니다.”
“하지만.”
“포션 아깝습니다. 그보다 저게 뭔지 아십니까?”
“적풍 새끼들일 거예요.”
대답은 다른 곳에서 튀어나왔다. 선희다가 어느새 검을 빼 든 채 창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서해안에 적풍의 근거지가 있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어요. 요 몇 년 잠잠했을 뿐이지.”
“적풍이라면… 자유주의자 길드로군요. 힘겨루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는 건 알고 있는데 왜 저러는 겁니까?”
“그 힘겨루기가 최절정에 다다른 겁니다.”
정이흔이 어느새 새까맣게 변한 하늘을 응시하며 말했다.
붉은 눈동자가 서릿발처럼 차가웠다.
쿠르르릉—!
그에 분노하듯 거대한 파도가 부풀어 오른 수면 위를 거칠게 내달렸다. 꽈과광!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오늘 섬 하나는 지도에서 사라지겠군요.”
“…그래도 되는 겁니까?”
“적풍 소유의 섬이니까요. 다만 해태나 관리국의 방문은 피할 수 없을 겁니다. 거리로 따지자면… 관리국이 먼저 도착하겠군요.”
“흠….”
한차수는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생각보다 심각한 분위기는 아닌 듯했다.
‘그래서 아무 연락도 없는 건가.’
이렇게 빨리 추측이 확신이 될 줄 몰랐는데.
한차수는 연락은커녕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 채라하를 떠올리며 팔짱을 꼈다.
채라하와 지내며 깨달은 것 중 한 가지는 그가 생각만큼 수선을 떨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는 자신을 무척이나 아끼고 소중히 여겼고, 가끔 진저리 날 정도로 애정 공세를 퍼부었으나 정작 건강이나 상처에 대해서는 요란 떨지 않았다.
정이흔이나 선희다처럼 기침 몇 번 했다고 끔찍한 맛이 나는 약차를 가져온다든가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런 면에서는 또 평범한 형제 같단 말이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데, 뭘 어떻게 알아차린 건지 정이흔이 넌지시 말을 건넸다.
“그러고 보니 오는 길에 채라하 씨와 만났습니다.”
“예?”
“한차수 씨를 찾으러 나오는 길에 마주쳤는데, 당신을 데려와야 한다고 외치니 너무 걱정할 필요 없다더군요. 곧 잠잠해질 거라고.”
고개를 들자 시선이 마주쳤다. 정이흔의 붉은 눈동자는 빛을 받지 못해 검붉게 보였다.
한차수는 잠시 눈을 깜빡이다 천천히 입을 뗐다.
“혹시 형님이 따로 대책을 세워 뒀다고 하셨습니까?”
“자세히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그런 것 같았습니다. 침착하게 직원들을 대피시키고 있었으니까요.”
생각보다 더 별거 아닌 상황이었군. 한차수는 긴장을 풀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보니 어느 순간 결계에 난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팅! 티잉-!
은색으로 빛나는 결계는 오히려 날아오는 기운을 맞받아쳐 멀리 날려 보내고 있었다.
그때였다.
휘오오오오오——
끼아아아아악——!
결계 너머 소용돌이 주위로 강렬한 불빛이 타오르고, 끔찍한 귀곡성이 고막을 찢는가 싶더니.
콰아아앙! 콰앙! 쾅!
거대한 유성우가 사방팔방으로 튀어 올랐다. 그저 불덩이로만 보였던 그것은 정말로 긴 꼬리를 가진 암석이었다.
조각난 섬의 일부분이라는 말이었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진짜.”
선희다의 읊조림에 한차수는 소리 없이 동의했다.
곧바로 커다란 유성우 하나가 창공을 가로지르며 결계 바로 앞의 수면을 향해 떨어져 내리는 게 보였다.
“저건 여파가 좀 클 것 같은데요.”
“한차수 씨, 이리 오세요.”
단단한 품이 그를 감싸 안았다. 뒤이어 거센 풍압이 섬을 휩쓸고.
“으악, X발!”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시커먼 무언가가 창문에 부딪히더니 털썩 바닥에 널브러졌다.
“…저건 또 뭐야.”
선희다가 검을 손에 쥔 채 두 눈을 번뜩였다. 한차수는 그녀가 간이결계 바깥으로 무기를 내지르기 전에 가까스로 말렸다.
“저거, 그겁니다!”
“예? 뭐라고요?”
“제 친척입니다! 오늘 도착한!”
칙칙한 로브를 걸친 채 숨을 헐떡거리는 사내의 이름은 채유진.
채라하와 한차수의 친척이자 오늘 섬에 도착한 삼인방 중 한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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