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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퇴사하면 안 될까-104화 (104/113)

104화

감정 스킬도 없는 아이템의 등급을 알게 된 건 ‘??? 미등록 헌터’ 위장 신분 덕이었고.

“그거, 어디서 본 반지인데.”

자세한 능력을 알려 준 건 공작이었다.

다만 이걸 상대에게 들고 가서 네가 어제 메시지를 보냈냐 물을 생각은 없었다.

‘그러기엔 아까워.’

횟수를 모두 소모한 반지를 재사용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장장 다섯 달.

자기를 찾아 달라고 애쓰는 상대를 위해 굳이 낭비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었다.

‘애초에 세 명 중에 있을 것 같지도 않지만… 애가 타면 그쪽에서 알아서 나타나겠지.’

상대는 정신이 나갔거나 당장 자신을 끌어들여야 할 만큼 급한 상태였다.

보통 일면식도 없는 상대를 회유하기 위해서는 신뢰부터 쌓는 게 기본이니까.

자신이 해가 되는 사람이 아님을 밝히고, 도움을 주고 정보를 제공하고… 그러면서 천천히 상대에게 의혹을 불어넣는 것이다.

그런데 제게 메시지를 보낸 놈은 어땠는가.

차라리 협박을 하면 모를까, 애매하게 사람을 떠보려 하고는 곧장 만나자고 지껄여 댔다.

만일 그런 놈이 제 밑에 있었다면 바로 좌천시켰을 것이다. 아니면 다른 부대로 보내 버리든지.

“저, 잠깐 말 좀 묻겠습니다.”

한차수는 심드렁한 마음으로 지나가는 직원을 불러 세웠다.

“오늘 새로 섬에 오신 분 중에 서류 들고 계시던 여성분 못 보셨습니까?”

“아, 그분이라면 관리동으로 가셨을 거예요. 저쪽 길에서 마주쳤거든요.”

“여기 관리동이란 곳도 있었나요?”

“작은 건물들이 모여 있는 곳 있잖습니까. 그중에 있나 봅니다.”

선희다의 물음에 한차수가 답했다.

“아, 그 낮은 건물들 있는 데요?”

화려한 저택과 달리 투박한 외양의 건물 대여섯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이 있었다.

아마 거기에 따로 공간을 내준 모양이다. 한차수는 선희다와 함께 관리동으로 몸을 틀었다.

“가서 인사만 하고 오실 건가요?”

“뭐 시간이 되면 겸사겸사 이야기도 나누죠.”

한차수가 반지를 매만지며 말했다.

앞서 말했듯 정체를 물어볼 생각은 없었다. 그럼 왜 상대의 속마음을 엿들을 수 있는 A급 아이템을 가지고 나왔는가.

채라하가 이변을 눈치채기 전에, 세 사람에게서 원작 한차수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서였다.

녀석들이 주고 싶은 것 말고, 자신이 알고 싶은 것 말이다.

지금까지는 굳이 깊게 파고들어 좋을 일 없다는 생각에 외면했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자신에게는 정보가 없었고, 상대는 그 상황을 이용하려 들었다.

‘누가 보면 쓸데없이 어려운 길을 택한다고 할지도 모르겠군.’

형에게 물어보면 되지 굳이 직접 나서서 시간 낭비 할 필요가 있느냐고 말이다.

하지만 상대가 자신을 해치지 않을 거라는 믿음과 자신에게 올바른 정보를 건넬 거라는 믿음은 완전히 별개다.

누군가는 소중한 사람을 보호하는 수단으로 정보를 통제한다.

채라하라고 그러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었다. 더욱이 그는 동생에게 미친 남자라 이런 면에서 신뢰도가 떨어졌다.

섬에서 지내는 내내 아주 어릴 때의 일 말고는 입에 올리지 않았던 것도 낮은 신뢰도에 상당 부분 기여했다.

“너하고 이렇게 몰래 주방에서 야식을 먹어 보고 싶었거든.”

“불꽃놀이 할까, 차수야? 아, 큰 것 말고. 손에 들 수 있는 작은 게 있던데.”

채라하가 꺼내는 과거는 대체로 십 대 초반을 넘기지 않았다.

형제 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할 시기인 사춘기와 그 이후의 이야기는 한 마디도 흘리지 않았다는 소리다.

‘굳이 캐묻고 싶지 않아 방관했는데 그 부분을 찔리다니.’

만일 채라하가 세 사람에게 입단속을 명했어도 상관없었다.

마음속에서 새어 나오는 말까지 통제할 순 없을 테니까.

한차수는 천천히 바람이 들이치는 복도를 지났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상황에 직면했다.

“…돌아가세요.”

“…예?”

“방이 지저분해서… 아니, 음. 커피를 쏟아서…?”

문을 사이에 두고 느릿한 목소리가 천천히 울려 퍼졌다.

“어쨌든 오늘은 그냥 돌아가 주세요….”

자기가 흥미 있는 것 외에는 전부 귀찮아한다더니.

‘이 정도였을 줄이야.’

한차수는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일라는 대놓고 그의 방문을 거부했다.

***

그나마 다행인 건 아일라의 변명이 무척 구차했다는 점이다.

“낮잠을 좀 자야 할 것 같은데….”

즉, 딱히 제대로 된 이유가 있는 건 아니라는 뜻.

이렇게 되면 파고들 여지가 있다.

‘이걸 벌써 쓰게 될 줄은 몰랐는데… 어쩔 수 없군.’

한차수는 품을 뒤져 주먹만 한 무언가를 꺼냈다. 아일라의 궁색한 변명을 물리치기 위한 무기였다.

“환각 심장이 만들어 낸 공간.”

“음…?”

“기존의 아데르잔 던전이 아니라 심장이 직접 만들어 낸 공간에서 습득한 아이템들이 몇 개 있습니다.”

우우웅—

힘을 불어넣은 광석은 곧장 은은한 파동을 일으켰다.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달칵.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될 법한 문 틈새로 아일라의 푸른 눈이 보였다.

“환각 심장… 진짜로?”

“예. 형님께 들으셨을 텐데요. 며칠 전 환각 심장의 폭주에 휘말려서 녀석의 심층부까지 들어갔다 왔습니다. 덕분에 거의 죽기 직전까지 갔지만….”

잠시 침묵이 맴돌았다. 생각에 잠긴 듯 고뇌하는 푸른 눈동자.

한차수는 재촉하지 않았다. 그는 알고 있었다.

희소한 아이템에 대한 그녀의 열렬한 탐구욕과 집착을.

“일단… 들어오세요.”

됐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황홀경에 빠진 목소리가 방 안 가득 울렸다.

“아아, 정말… 정말 멋지네요. 아데르잔 던전에서 출토되는 월장석은 이렇게까지 강한 빛을 뿜지 못하는데….”

아이템을 바라보는 아일라의 눈빛이 어찌나 이글거리는지 문자 그대로 월장석을 씹어 삼킬 기세였다.

‘역시 졸리다는 건 거짓말이었군.’

“그것만이 아닙니다. 이렇게 두 개를 맞붙이면….”

“오…!”

그리고 한차수는 열기를 식히기는커녕 열심히 장작을 던져 넣었다. 환심을 사 심리적 방벽을 낮추기 위해서였다.

담쟁이덩굴 반지는 만능이 아니었다.

상대방의 정신력이나 저항력, 경계심 등이 높을 경우. 혹은 대항하는 효과를 지닌 아이템을 지닌 경우, 반지는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렇게 열심히 장단을 맞춰 줄 수밖에 없었다.

“이제 직접 한번 쥐어 보시죠.”

“아, 저는 마력량이 그리 많지 않아서….”

“괜찮습니다. 그걸 보려는 게 아니니까요.”

화아악!

두 사람이 동시에 돌을 잡자마자 돌의 표면을 타고 빛이 물결쳤다. 그리고.

“색이 바뀌었…. 잠깐, 문양도 달라졌어.”

“예. 마력의 종류와 수에 따라 변화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자세히 봐도 될까요? 망가트리지는 않을게요. 살짝… 아주 살짝 검사 몇 가지만.”

“얼마든지 쓰셔도 됩니다. 몇 개나 더 있으니까요.”

아일라의 푸른 눈에 별 무리가 떠올랐다. 창백한 얼굴은 어느새 홍조를 띠고 있었다.

“…고마워요. 사실, 여기까지 와서 이런 걸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저야말로 아일라 씨 덕에 식견이 넓어졌습니다. 이건 선물로 드리죠.”

“…저 이런 거 거절할 줄 몰라요.”

“빈말한 것 아닙니다.”

아일라가 앓는 신음을 흘렸다. 이윽고 그녀의 두 손이 월장석을 쥔 한차수의 손을 감쌌다.

한차수는 전부 이해한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흐름과는 관계없지만 한 가지 여쭤봐도 될까요, 아일라 씨?”

“뭐든….”

“혹시 예전의 저와 알고 지내던 사이십니까? 아까 전에 절 만나기 싫어하신 것 같아서….”

기억을 잃은 걸 알게 된 뒤 모든 게 조심스럽다고, 한차수는 천천히 덧붙였다.

“아.”

아일라의 눈꺼풀이 빠르게 깜빡였다. 흥분으로 반짝거리던 푸른 눈이 점차 차분해졌다.

“아뇨, 그렇지는 않아요. 음… 그런데 그걸 물어보셨다는 건 역시 기억을 찾고 싶으신 거겠죠?”

한차수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이 여러분을 부르면서 깨닫게 됐습니다. 제가 잃어버린 것들이 어쩌면 제 생각보다 더 많을 수도 있다는 걸요.”

오랜 우정을 나누었을지도 모르는 친구, 자신에게 깊은 가르침을 내려 줬을 선생님. 그 외에 살아가면서 자신과 스쳐 지나갔을 모든 인연들 하나하나.

그것들을 전부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가슴이 아프다며, 한차수는 고개를 떨궜다.

“이런….”

아일라가 안타까운 듯 고개를 저었다. 푸른 눈동자에 자그마한 파문이 이는 게 보일 정도였다.

“전 위로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지만, 굳이 과거의 자신에게 얽매일 필요 없다고 생각해요. 한차수 씨는 지금 그대로여도… 충분한걸요. 고통스러운 희망보다는 현재에 집중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기억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일 아니냐며 아일라가 말했다.

“…고맙습니다. 마음이 편해지네요.”

“뭘요.”

아일라는 그의 손을 토닥이며 생긋 웃었다. 한차수는 힘없이 웃다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건 위로에 대한 답례입니다.”

“아….”

“월장석에 비하면 별 볼 일 없는 아이템이니 그냥 받아 주세요.”

아일라는 갈등하는 듯 잠시 미간을 찌푸렸으나 결국 거절하지 않았다.

“한차수 씨 덕분에 저희 연구가 진일보할 거예요.”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제 덕이 아니라 아일라 씨의 노력 덕분이겠죠. 그런데… 정말로 제가 기억을 찾지 않아도 괜찮을까요?”

아일라와 손을 겹친 채, 한차수가 물었다.

“그럼요.”

따스하게 웃는 아일라와 마주 보며 한차수는 미소 지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발신자 녀석, 아무 생각 없는 놈은 아닐지도 모르겠군.’

그가 아일라에게 건넨 질문은 아주 단순했다.

자신을 아는가와 기억을 찾지 않아도 되겠는가.

첫 번째 질문은 확인용이었다.

자신을 처음 보듯 대하는 아일라의 태도가 진짜인지 알고 싶었다.

두 번째 질문은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에 따라 달라질 예정이었다.

그리고 첫 번째 질문에 대한 아일라의 반응은….

-설마 날 기억해 낸 건 아니겠지? 아… 그러면 안 되는데.

자신과 모르는 사이라던 그녀의 말은 거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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