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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퇴사하면 안 될까-103화 (103/113)

103화

한편, 한차수는 조금 당황한 상태였다.

정이흔의 말을 종합해 보자면 채라하의 지나친 형제애를 다 받아 주지 말라는 뜻이었으니까.

희한한 일이었다.

‘지금 누가 누구한테 충고를…?’

동생에게 미친 걸로 따지면 작중 최고 순위를 가려야 할 당사자에게 이런 말을 듣다니.

그는 원작에서 동생이 죽은 뒤 완전히 정신을 놓고 나라를 뒤집어엎지 않았던가.

이제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 해도 정이흔의 동생 사랑이 어디 가는 건 아니었다.

의료 센터에서 지내면서 주워들은 바, 정서흔에 대한 정이흔의 사랑은 웬만한 팔불출 부모 못지않았다.

뭐라고 했더라, 정서흔이 각성했을 때 정이흔이 준 선물들을 합하면 웬만한 중소 길드의 십 년 치 수익하고 맞먹을 정도였다고 했던가….

‘그런 놈이 나한테 형하고 거리 두라는 소리를?’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어쩐지 조금 신기한 마음에 정이흔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는데 다시금 기침이 터졌다.

“쿨럭!”

“차 드세요.”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가까이에서 후끈한 김이 느껴졌다. 근엄한 얼굴의 선희다가 찻잔을 내밀고 있었다.

“의료 센터 측에서 한차수 씨에게 보낸 선물 중 하나예요. 장복할수록 기력이 좋아지는 약재를 우린 겁니다.”

“…….”

“마지막 한 방울까지 전부 드셔야 해요.”

다 마시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한 분위기에 한순간 이곳이 의료 센터인 줄 알았다.

“자, 드세요.”

“……길드장님.”

“아, 부길드장에게서 연락이 왔군요. 잠시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한차수 씨 잘 부탁드립니다, 선희다 헌터.”

필요해지면 언제든지 말하라며.

잽싸게 방을 나가는 정이흔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한차수는 결국 압박에 못 이겨 찻잔을 받았다. 흘깃 찻잔 속을 들여다본 그가 기함했다.

“무슨… 도대체 뭘 하면 이렇게 되는 겁니까?”

불투명한 액체는 용암처럼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쉬지 않고 솟아오르는 공기 방울이 무척이나 불길했다.

‘그대로 마셨다간 꼭 죽을 것 같은데.’

한차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선희다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스윽 손을 내밀었다.

퐁당.

수면에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푸른 연기가 피어올랐다.

화아악!

“이제 드실 수 있을 겁니다.”

온도는 내려간 대신 색깔이 수상해졌는데…. 왠지 자아를 가지고 움직이는 것 같기도 하고.

“지저해수종의 핵을 넣은 거예요. 약효를 배로 더해 주죠. 자, 이제 쭉 들이켜시면 됩니다.”

한차수는 착잡한 얼굴로 찻잔을 내려다보다 벌컥 들이켰다.

차는 생각보다 먹을 만했다.

딱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후우….”

“괜찮죠?”

“…예.”

가만두지 않을 테다, 정이흔.

울렁이는 속을 애써 내리누른 한차수가 입을 열었다.

“선희다 씨. 형님이 데려오신 손님들, 직접 만나 보지는 않으셨죠?”

“예? 예. 배에서 내린 걸 보긴 했지만 직접 인사를 건네지는 않았죠.”

선희다는 먼발치에서 세 사람을 지켜보았을 뿐,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한차수가 잘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조금 있다가 같이 인사나 하러 가시죠. 앞으로 한동안 함께 지내게 될 식구나 다름없는데, 이쪽에서 먼저 찾아뵙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예? 음, 어. 알겠습니다. 그러죠, 뭐.”

그로부터 대략 십여 분 뒤, 한차수는 선희다와 함께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초조한 듯 따라붙는 정이흔을 외면한 채로.

“정말 저 없이도 괜찮겠습니까?”

“절 죽이려고 온 사람들도 아니고 지키겠다고 오신 분들인데 무슨 걱정을 하시는 겁니까? 게다가 길드 일로 바쁘실 텐데요.”

“그건,”

“절 부탁한 선희다 씨의 실력을 믿지 못하시는 건 아닐 테고.”

“…….”

미미하게 흔들리는 동공에 한차수는 쾌재를 불렀다.

어차피 처음부터 정이흔은 데려갈 생각이 없었다. 그에게 억하심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가 S급이었기 때문이다.

첫 만남에 불필요한 경계심을 살 필요는 없지.

헌터들은 특유의 호승심과 짐승처럼 발달된 기감으로 서로를 재곤 했다. 정이흔을 데려갔다가는 괜스레 방어벽만 높이는 꼴이 될 테다.

결국 정이흔이 백기를 들었다.

“…다녀오십시오.”

“예. 혹시나 형님이 절 찾으시면 다른 분들을 만나러 갔다고 말해 주시면 됩니다.”

낮은 한숨을 뒤로한 채 한차수는 한결 개운해진 마음으로 저택을 나섰다.

“한차수 씨,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건데요.”

“네.”

선희다가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첫눈에 반해서 고백하러 가시는 거라면 지금 당장 말씀해 주세요. 다짜고짜 무릎 꿇으시기 전에 도망치고 싶거든요.”

“…아닙니다.”

어쩌다 그런 오해를 한 거냐는 듯 고개를 젓자 선희다가 팔짱을 끼었다. 그리고 탐탁지 않은 눈으로 위아래를 훑는다.

“그렇게 때 빼고 광내고 반지에 귀걸이까지 끼고 오시면 누구든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그런가.

한차수는 멋쩍은 얼굴로 제 착장을 훑었다.

잠옷이나 다름없던 옷에 비하면 세련된 차림새긴 했다. 다림질한 셔츠에 면바지. 슬리퍼 대신 구두까지 신었으니.

“길드장님도 비슷하게 느끼시는 것 같던데.”

“아.”

어쩐지 눈빛이 심상찮더니. 그렇게 보였던 건가….

한차수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슨 즐거운 상상을 하신 건지 모르겠지만 그럴 일은 없습니다.”

“그럼 왜 그렇게 차려입으신 거예요?”

선희다의 물음에 한차수는 어깨를 으쓱였다.

“첫 만남이니까요.”

“…그것만이 아닌 것 같은데요.”

“정말로 그게 다입니다.”

사실 이유가 따로 있지만 말할 수가 없었다. 선희다의 눈빛이 따가워지자 한차수는 바삐 발을 놀렸다.

“수상한데….”

등 뒤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렀지만 한차수는 애써 모른 척 했다.

‘그나저나 첫눈에 반했다고 생각하다니, 참 상상력도 풍부하군.’

그런 풋풋한 감정은 사라진 지 오래다.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이 세계에서 그가 사랑에 빠질 일은 없었다. 빙의하기 전에도 딱히….

“네 사랑이 그 애를 망친 거야.”

일순간 숨이 턱하고 막히는 기분이었다.

“…….”

“한차수 씨? 어디 아프세요? 돌아갈까요?”

“…괜찮습니다.”

그는 눈을 감은 채 심호흡했다. 그리고 선희다의 걱정 어린 목소리를 도움 삼아 오래된 상처를 머릿속에서 내몰았다.

“정말 괜찮은 거 맞으세요?”

“아까 마셨던 차가 넘어올 뻔한 것뿐입니다. 그러고 보니 삼킬 때 뭔가 이상한 게 씹히는 것 같던데.”

“멀쩡하시네요.”

다시 근엄한 표정을 짓는 선희다를 바라보며 한차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래서, 서지음 씨부터 만나러 가실 건가요?”

“아뇨. 다른 분부터 만날 겁니다.”

짙은 검은색 머리를 높이 올려 묶은 창백한 여인.

세상 모든 귀물보다 던전에서 긁어 온 돌멩이 하나를 더 값지게 생각하는 모놀리스 소속 연구원 아일라.

한차수가 첫 번째로 만나고자 하는 이는 바로 그녀였다.

순서에 별다른 의미는 없었다.

‘어차피 세 명 다 오늘 안에 만날 생각이니까.’

어두운 방을 한가득 밝히며 자랑스레 반짝이던 황금빛 글자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 너는 속고 있다 ]

[ 진실을 알고 싶나 ]

[ 내일 만나지 ]

딱 봐도 이간질시키고 싶어 죽겠다는 마음이 물씬 풍겨 나오는 메시지들이었다.

의도가 너무 명백해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몰래 메시지를 보내는 주제에 뭘 의식한 건지 주어를 뺀 것도 그렇고.

‘내가 채라하에게 속고 있다고 생각하기를 바라는 거겠지.’

대충 이런 구도에서 나오는 이야기라면 뻔했다.

기억과 과거를 모조리 잃어버린 한차수. 그런 동생을 아끼다 못해 밖은 위험하니 나가지 말라고 반쯤 감금해 두는 채라하.

그리고 경쟁 구도의 동복형제인 두 사람.

발신자가 원하는 그림이 훤히 보였다.

아마 진짜 후계자는 한차수고, 채라하는 그런 자신을 잡음 없이 처리하기 위해 섬에 가뒀다는 ‘진실’을 믿도록 판을 깔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나를 바보로 아는 건가?’

정말로 채라하가 후계자 자리를 뺏기 위해서 자신을 죽일 계획이라면 정이흔을 왜 불러들였겠는가.

역시 그냥 멍청한 놈이 시답잖은 짓을 벌이는 걸지도 몰랐다.

‘사실 아주 가능성 없는 이야기도 아니지.’

이런 식으로 중간에서 수작질을 벌이는 놈들 중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는 놈은 거의 없으니까.

하지만 그렇기에 더 곤란했다.

‘이대로 가만히 있는다고 해도 저쪽은 포기하지 않을 거야.’

한차수는 멍청한 인간이 얼마나 끈질겨질 수 있는지 진저리 날 만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뜻대로 해 주기로 했다.

콕 집어 내일 만나자고 말하지 않았나. 원하는 대로 만나러 가 줄 생각이었다.

자신에게 흘리고자 하는 정보가 뭔지, 자신을 어떤 방식으로 이용하고 싶은 건지는 몰라도….

‘이쪽이 가만히 당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안 되지.’

한차수는 차분한 얼굴로 왼손 둘째손가락에 낀 반지를 매만졌다.

환각 심장이 만들어 낸 공간 안에서 획득한 아이템, 담쟁이덩굴의 갈라진 손등.

한 사람당 하루 두 번, 직접 손을 잡은 상태에서 상대의 속마음을 들을 수 있게 해 주는 A급 아이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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