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강건한 체구에 굳센 기도를 가진 헌터는 한차수와 잠시간 눈을 맞췄다.
지켜보는 사람마저 살짝 어색함을 느끼게 될 만한 시간이 흘렀을 때.
꾸벅. 고개를 숙인 헌터가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모퉁이를 돌았다.
긴 그림자의 끄트머리까지 보이지 않을 때쯤 선희다가 막힌 숨을 터트렸다.
“대단하네요.”
“대형 길드 소속 랭커라고 봐도 될 정도로군요.”
정이흔이 말을 보탰다. 선희다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상대는 그저 가만히 서 있을 뿐인데도 빈틈이 없었다. 선희다는 생각했다. 전력을 다해 붙는다 해도 승리를 점치기 힘들지도 모른다고.
“저분이 서지음 씨인 것 같군요.”
한차수가 조용히 입을 뗐다. 휙 하고 선희다의 고개가 날카롭게 돌아갔다.
“누군지 알고 계세요?”
“그저께 형님께서 알려 주셨습니다. 정확히 누가 올 거라고 얘기하신 건 아니지만….”
한차수는 기억을 되짚었다.
정이흔이 섬에 도착하기 전날. 채라하는 자신을 도와줄 사람들을 불러도 되겠냐며 그의 허락을 구했다.
그리고 그때, 섬에 오게 될지도 모를 사람들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했다.
‘줄줄이 늘어놓길래 다 올 줄 알았더니 정작 도착한 건 세 명뿐이었지.’
그리고 그중 한 명이 방금 눈이 마주친 상대다.
한차수는 서지음에 대한 정보를 떠올렸다.
“대검을 주로 사용하는 A급 헌터이고, 주로 제 경호를 담당할 거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두 분도 아예 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서지음 씨가 책임자라는 느낌으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흐음….”
콧소리를 낸 선희다가 발끝으로 바닥을 툭툭 건드렸다. 한차수는 창가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깊은 생각에 빠진 듯한 자세.
선희다는 한차수의 눈이 앞마당에 고정되어 있는 걸 확인하고 정이흔에게 입 모양으로 물었다.
‘서지음, 들어 본 적 있으세요?’
정이흔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선희다의 눈이 반짝였다.
‘채라하의 개인 경호원입니다. 10년 전부터 곁을 지킨 걸로 아는데… 모놀리스 소속이 아니라 채라하가 개인적으로 고용한 사람이라더군요.’
정이흔이 서지음에 대해 알고 있는 건 그게 다였다.
한차수가 모놀리스 회장의 차남임을 알게 된 이후, 관계자라 할 만한 이들의 정보를 수집했으니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손에 들어온 정보 중에 쓸 만한 건 거의 없다 해도 무방했다.
모놀리스는 한국에 적을 두고 있는 기업이 아니었고, 용병업에서 시작한 기업답게 안보 수준이 매우 높으며 폐쇄성이 뚜렷한 회사였다.
결국 표적을 채라하로 좁힐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그나마 건질 만한 것들이 있었다.
채라하는 모놀리스의 차기 회장으로 점쳐지는 몸. 후계자 수업의 일환인지 몰라도 그는 아버지를 대신해 이곳저곳 얼굴을 비치고는 했다.
그리고 기업의 후계자가 강림하는 자리에 그와 가까운 이, 가까워지고자 하는 이들이 나타나는 건 당연한 일.
그렇게 정이흔은 채라하의 주변 인물을 대강 파악했다.
채라하는 용의선상이 추려지면 명단을 건네겠다고 했지만, 그때까지 가만히 앉아 기다릴 수는 없지 않은가.
‘이쪽을 완전히 방패막이로만 써먹으려는 심산일지도 모르고.’
민목하의 태도를 떠올리면 아예 불가능한 일도 아닐 듯싶었다.
채라하와 다르게 그는 섬에 들여보내 준 걸로 만족하라며 이를 득득 갈고 있으니까.
‘그러고 보니 의료 센터에서도 날 탐탁지 않아 했지.’
그때는 환자를 잘 챙기는 의료진이라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자기가 모시는 도련님이라 그랬던 거였다.
그것도 모르고 한차수에게 정성을 쏟는 의료진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니. 정이흔은 쓴웃음을 삼켰다. 그리고 그사이 자리를 비운 선희다를 찾아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차를 마시려는 모양인지 물을 끓이고 있었다.
전기 포트 위로 뿌연 수증기가 몽글몽글 올라왔다. 뜨거운 김에 손을 휘젓는 선희다를 보며 정이흔은 눈을 내리떴다.
‘원래대로였다면….’
저 자리에는 선희다 대신 정서흔이 있어야 했다.
한차수의 경호 역으로 가장 먼저 거론된 건 정서흔이었으니까.
그러나 이진렬이 선희다를 추천했고, 그녀 또한 지난번의 실수를 만회하겠다며 자신을 데려가라 강력히 주장했다.
그리고 자신은 그들의 뜻을 꺾지 않았다.
왜냐하면….
“쿨럭!”
그때, 돌연 목을 찢는 듯한 기침 소리가 들렸다.
찬 바람을 정면으로 맞고 있던 한차수가 끝내 기침을 시작한 것이다.
“한차수 씨.”
“아, 길드… 쿨럭!”
“옷이 너무 얇은 거 아닙니까?”
잰걸음으로 다가간 정이흔이 그의 어깨 위로 자신이 입고 있던 카디건을 걸쳤다.
채라하가 직접 준비했다는 한차수의 옷은 지나치게 얇은 감이 있었다.
정이흔이 눈살을 찌푸리자 한차수가 변명하듯 말했다.
“나름대로 방한 스킬이 달려 있는 옷이긴 한데….”
“그걸로는 한차수 씨의 목을 지킬 수 없었나 보군요.”
언뜻 들으면 냉담하게까지 느껴지는 목소리에 한차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정이흔은 아차 싶어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놓았다.
“채라하 씨를 탓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천령 길드에 솜씨 좋은 제작자가 있는지라, 조금 아쉽다는 말이었습니다.”
“어쩐지 기회만 있다면 새 옷을 가져오겠다는 말로 들립니다만….”
“한차수 씨가 원한다면 언제든,”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차수는 그의 제안을 부드럽게 거절했다. 정이흔의 눈에 수심이 어렸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 한차수는 단 한 번도 주는 대로 곧잘 받아 준 적이 없었다.
그에게 받은 건 너무나 많은데 정작 돌려줄 수 있는 게 너무 적었다.
“형님이 많이 바쁘신가 봅니다. 보통 이때쯤 되면 꼭 들르셨는데.”
“앞으로도 매일 볼 사람 아닙니까. 섬을 떠나면 언제 보게 될지 모르는 저희와 다르게.”
“예?”
“언제든 볼 수 있으니 너무 상심할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다만 함께 침대를 쓰는 건 앞으로도 지양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몸이 약한데 그러다 잠이라도 설치게 되면….”
의식 않고 튀어나온 말에 한차수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마치 해괴한 몬스터를 보는 듯한 얼굴에 정이흔은 불현듯 제 모습을 자각했다.
“그러니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천천히, 서로에게 적응해 나가는 게 좋겠다는 얘기였습니다.”
회색 눈동자가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정이흔은 괜스레 머리를 쓸어 넘겼다.
‘정말 형제긴 형제군.’
멀리서 볼 때는 몰랐는데 같이 지내다 보니 조금씩 닮은 구석이 보였다.
그래, 한차수에겐 이제 진짜 형제가 있었다. 그가 그토록 애타게 찾고 싶어 하던, 그리고 이제 그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줄 가족이.
선희다 헌터 대신 굳이 서흔이를 데려오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
사실 처음엔 믿기 힘들었다. 한차수는 서류상으로 완벽히 혼자였으니까. 누군지 몰라도 거짓말을 한다 여겼다.
그러나 채라하는 목숨을 걸고 계약에 응했으며 자신을 증명했다. 그리된 이상 자신이 부정해 봤자 소용없었다.
더욱이 한차수는 가족을 찾길 원하지 않았던가.
“여태껏 살면서 가족이라는 존재를 그리워한 적이 없는데…. 몇 차례나 생사를 오가니 생각이 바뀌더군요. 그래요, 어쩌면 백담 씨처럼 사이좋은 형제를 곁에서 지켜본 것도 이유 중의 하나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족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
“기억 속에 가족이라는 존재가 없어서 그런가. 아무래도 전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가족이라는 걸 좀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사실 그때 깨달았어야 했다.
아무리 노력한다 한들 그에게 가족 같은 존재가 될 수 없으리라는 걸 알아차렸어야 했다.
다만 욕심을 버리지 못해 스스로의 눈을 가리고 있었을 뿐이다. 한차수의 존재란 기적과 같았으니까.
그렇게 시간이 흘러 정말로 그의 가족이 찾아왔으나, 우습게도 생각만큼 슬프지 않았다.
자신이 죽은 뒤 동생을 지켜 줄 존재를 잃은 건데도 마음이 요동치지 않았다.
혼란이 일단락된 뒤 드는 생각이라고는 그저, 한차수를 잃어버리지 않아 다행이라는 것뿐이었다.
그가 죽길 바라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환각 심장의 폭주가 사고가 아니라 함정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니까.
다행히 채라하가 자신의 도움을 받겠다고 했지만 안심할 수 없었다.
“차수를 잘 지켜줬으면 좋겠군요, 천령 길드장.”
그는 묘한 인물이었다.
한차수를 위해 무엇도 아끼지 않았으나 한편으로는 동생이 잃어버린 기억에 대해 별다른 안타까움을 표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것을 자연스레 받아들이고 흘려 넘겼다.
위화감이 드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하지만 한차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지, 금세 채라하에게 마음을 열고 그와 어울렸다.
기적처럼 만난 가족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데, 막상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이상한 감상이 들곤 했다.
그러다 방금 전처럼 제멋대로 말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길드장님? 괜찮으십니까?”
걱정스레 자신을 올려다보는 회색 눈동자에 정이흔은 목 안쪽이 타들어 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냥….”
한껏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가 필요해지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그거면 됩니다.”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이는 한차수를 보며 정이흔은 생각했다.
이제 자신은 그가 퇴사한다 하더라도 말릴 수 없다. 그러니 적어도 그의 안전이 확실히 보장될 때까지만이라도 곁을 지키자.
그 무엇도 쉽사리 받아 주지 않는 한차수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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