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한차수는 눈을 내리 뜬 채 마령석을 들여다보았다.
“흠….”
착각일까. 희미한 빛을 품은 마령석은 어째선지 이전보다 조금 무거워진 느낌이었다. 표면에 난 실금도 원래는 없었던 것 같고.
하지만 둘 다 부화의 징조는 아니었다.
부화의 조건을 충족시킬 만큼 기운을 쏟지도 않았고.
한차수는 무심한 표정으로 마령석을 갈무리했다. 선희다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의료 센터에서 가져온 물건들은 이쪽에 두세요. 아, 그건 오른쪽에 두시면 됩니다. 네, 관리국 표식이 찍혀 있는 물건들이요. 잠깐만요. 그거 어디서 내리신 거죠?”
정이흔이 가져온 건 마령석뿐만이 아니었다.
마령석을 건네받은 뒤 결계 밖에 머물고 있던 헬기 다섯 대가 연이어 착륙했다. 하나같이 거대한 컨테이너를 줄에 매달고서.
고개를 돌리자 공터 한쪽에 선 선희다가 보였다. 그녀는 한 손으로 허리를 짚은 채 컨테이너를 오가는 이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물건이 제대로 도착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도와 드릴까요?”
“아, 한차수 씨. 아니에요. 금세 끝날 겁니다.”
“그렇기엔 뭔가 많아 보이는데요.”
한차수는 넓은 공터에 차곡차곡 쌓인 컨테이너를 응시했다. 같은 곳을 바라본 선희다가 눈을 깜빡이다 아, 하고는 설명을 덧붙였다.
“봉인 포장 때문이에요. 마력 충돌을 일으킬 수 있는 물건이 몇 개 있어서…. 괜히 부피만 차지하는 것들이긴 한데 그렇게 안 하면 터져서 어쩔 수가 없거든요.”
과대 포장을 했다는 말이로군. 한차수는 납득했다.
문득 익숙한 무게감이 어깨를 눌렀다. 살짝 시선을 들어 올리니 정이흔이 보였다.
“먼저 들어가셔도 됩니다.”
“괜찮습니다.”
혼자 돌아갔다가 채라한한테 붙잡혀서 무슨 꼴을 당할 줄 알고.
한차수는 저택을 박차고 나오기 직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자꾸 잔소리만 하면 너도 기분이 안 좋겠지. 음… 날 저물기 전에 같이 해변에 가지 않을래?”
“갑자기 해변은 왜…?”
“모래성 쌓기도 꼭 해 봐야 한다고 하더구나. 모래찜질도 해 보고 싶고.”
환히 웃으며 말하는 채라하의 손에는 노트가 하나 들려 있었다.
[평범한 형제가 하는 일]
오른쪽 아래 귀퉁이에 쓰여 있는 이름은 민목하.
동생과의 행복한 생활을 위해 민목하가 손수 저술한 거지 같은 안내 책자였다.
그때, 섬뜩한 단어가 그의 정신을 두드렸다.
“또 괜찮다는 말을…. 한차수 씨, 저랑 계약 하나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종신 계약이라면 거절합니다.”
거의 척수반사급이었다. 계약이라는 말이 튀어나오기가 무섭게 뒤로 물러선 한차수를 정이흔이 웃는 얼굴로 바라봤다.
“꿈도 꾸지 않습니다.”
“그것 말고 저희가 할 계약이 뭐가 있다고….”
“‘괜찮습니다’라는 말을 한 번 할 때마다 제가 드리는 선물을 무조건 받아 주기. 어떻습니까?”
되겠냐?
한차수는 어처구니없다는 얼굴으로 정이흔을 응시했다. 힐난하는 눈빛을 읽은 정이흔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도 진심은 아니었나 보다.
“정리 끝났습니다!”
선희다가 씩씩한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수고하셨어요, 선희다 씨.”
“에이, 그러지 마세요.”
손사래를 친 선희다가 말했다.
“공치사는 한차수 씨가 아니라 그 형님이라는 분한테 받아야 하는걸요.”
“…예?”
“아.”
곁에서 정이흔이 탄성을 내질렀다. 한차수가 눈썹을 찡그렸다.
이 녀석, 뭘 숨긴 거야.
“뭡니까.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으음.”
정이흔은 공터를 한 번 훑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모든 건 채라하의 갑작스러운 변덕 때문이었다.
마력충돌을 일으킬 수 있는 물건들을 가지고 대형결계를 넘는 건 꽤나 수고로운 일. 그런데 채라하 씨가 직접 공간을 열겠다고 먼저 제안했단다.
굳이 거절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정이흔을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런데 이틀 전, 채라하가 느닷없이 말을 바꿨단다.
“갑자기 공간을 열어 줄 수가 없다더군요. 이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
“아, 한차수 씨의 형님을 탓할 마음은 없습니다. 계획이 변경되느라 소요된 물자 전부 채라하 씨 측에서 제공하신 터라. 덕분에 기존 물량보다 배는 더 가져올 수 있었죠.”
정이흔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형에 대해 안 좋게 말했다고 자신의 기분이 상할까 염려라도 하는 걸까.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잠깐.
“길드장님. 저기 있는 물건들 혹시 길드장님이 쓰시기 위해 가져온 게 아닙니까?”
정이흔은 침묵했고, 한차수는 얼굴을 감싸 쥐었다.
‘어쩐지…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그럴 리가 없지.’
한차수는 채라하에게 모든 일에 힘을 아끼라고 하지 않았다.
그가 건 조건은 단 하나.
자신을 기쁘게 하겠다는 이유로 힘을 남용하지 않을 것. 오로지 그것뿐이었다.
‘그러니 물건을 옮겨 준다는 약속을 취소한 건, 그 물건들이 날 위한 것이었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지.’
정이흔은 흠흠 헛기침을 내뱉었고, 한차수는 한숨을 내쉬며 손을 내렸다.
‘이걸 잘했다고 해야 할지 잘못했다고 해야 할지….’
한차수는 그늘 진 눈가를 꾹꾹 누르며 생각했다.
쓸데없는 데 힘을 남용하지 않은 건 좋았다. 그런데 힘의 공백을 상쇄하겠다고 돈을 허공으로 흩뿌리고 앉았으니.
가슴이 절로 답답해졌다.
‘그러고 보니 비슷한 놈이 한 명 더 있잖아.’
한차수의 시선이 정이흔에게 가닿았다. 그는 어느새 제 곁에서 도망쳐 선희다의 앞에 가 있었다.
그 호구 같은 등짝을 응시하고 있자니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오른다.
동생을 살려 줘서 고맙다고 종신 계약서를 내민 정이흔. 이유는 모르겠지만 자신에게 부유한 가족의 일원이 되게 해 주겠다며 입양을 권유하던 백담.
그리고 채신머리없이 전방위적으로 브라콤 기질을 뿌려 대고 있는 채라하까지.
하나면 몰라도 셋이나 이러고 있으니 이쯤 되면 어떤 법칙이 존재하는 걸지도 몰랐다.
‘동생한테 미친놈들은 처음부터 호구 기질을 타고나서 그렇게 된 건가?’
어쩌면 이 세계를 지탱하는 규칙 중의 하나일지도 몰랐다. 엑스트라 악역에게 끊임없는 위기를 부여하는 빌어먹을 세상처럼.
그때였다.
“작은 도련님!”
멀리서 민목하가 그의 이름을 외치며 달려왔다. 하도 돌아오지 않으니 잡으러 온 모양이었다.
젠장.
한차수는 재빨리 달려가 정이흔의 소맷자락을 붙들었다.
“길드장님.”
“한차수 씨? 왜 그럽니까.”
어떤 부탁이든 다 받아 줄 호구의 눈동자가 다정하게 반짝였다. 한차수는 가슴 한구석에서 피어오르는 양심의 가책을 내리눌렀다.
미안하다. 그렇지만 나도 살고 봐야 하지 않겠냐.
한차수는 뒤통수를 잡아채는 민목호의 목소리를 애써 무시한 채, 정이흔을 향해 호소했다.
“오늘 계속 제 곁에 있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예?”
“형님에게는 죄송하지만, 저도 가끔은 가족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
모양 좋은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햇빛을 받은 붉은 눈동자가 즐거운 듯 반짝였다.
“한차수 씨가 원한다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죠.”
정이흔은 정말 좋은 주인공이었다.
***
결과적으로 자신의 판단은 옳았다.
한차수는 정이흔을 앞세움으로써 피해갈 수 있었던 온갖 귀찮은 일들을 떠올렸다.
같이 요리하기. 서로 등 밀어 주기, 얼굴에 팩을 얹은 채 나란히 누워 있기. 손잡고 심부름 갔다 오기, 전투 게임에서 같은 팀 먹고 게임하기….
끝도 없이 튀어나오는 할 일 목록에 민목하의 목을 조르고 싶었다.
심지어 같이 요리하기는 간단히 점심을 준비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채라하는 자신과 함께 텃밭에서 야채를 뽑아 다듬는 것부터 하길 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민목하를 다져야겠어.’
채라하에게 이상한 마음을 불어넣는 원흉부터 없애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마냥 정이흔에게 기대는 수밖에 없을 테니까.
바로 지금처럼.
“…여기서 뭐 하시는 거죠, 정이흔 씨?”
언제나처럼 자신과 함께 자러 온 채라하가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손에 쥔 베개가 터질 것 같았다.
“한차수 씨가 숙면을 취할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정이흔은 옆으로 몸을 돌린 채 나른히 대답했다. 등 뒤를 찌르는 채라하의 시선이 아플 텐데 용케 참아 내는 게 대단했다.
“거긴 내 자리에요.”
“한차수 씨 침대입니다.”
“우리 형제만 쓸 수 있는 침대죠.”
“그럼 이제 세 사람이 쓸 수 있는 침대가 됐군요.”
무형의 불꽃이 허공에서 튀어올랐다.
두 사람의 신경전은 예상보다 더 대단했다. 그래서 더더욱 보고 싶지 않았다.
‘S급들이 아이템을 두고 싸우는 것도 아니고 고작 침대 옆자리 가지고 싸우는 꼴을 내가 지켜보고 있어야 한다니….’
한차수는 착잡한 눈으로 이불을 뒤집어썼다. 다행히도 소란은 금세 가라앉았다.
정이흔이 계획대로 행동해 준 덕이었다.
“차수야, 자니? 벌써 자는 거야?”
“어지간히 피곤했나 보군요.”
“하루 종일 정이흔 씨에게 시달렸으니 그럴 만도 하죠.”
“…여기서 더 시끄럽게 하면 깰 것 같은데. 같이 나가시죠.”
“…….”
“싫으시다면 어쩔 수 없군요. 저는 이대로 누워 있어도 좋습니다.”
한숨이 적막 위로 번지고, 짜증스러운 음성이 이불 위로 내려앉았다.
“나오세요.”
흐린 웃음과 함께 침대가 살짝 흔들렸다. 커다란 손이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문지른 걸 마지막으로 문이 닫혔다.
“하….”
드디어 혼자가 되었구나.
한차수는 얼굴을 가린 이불을 내리고 참았던 숨을 토해 냈다.
오늘도 어김없이 채라하의 길고 긴 동화책 읽기 고문을 당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
‘고맙다, 정이흔.’
이 은혜는 종신 계약으로 갚…을 수는 없고 나중에 생각하자.
그렇게 한차수는 잠에 빠져들었다. 두 눈꺼풀이 천천히 내려앉고, 잇새로 고른 숨이 새어 나올 때였다.
파지직!
“?!”
허공에서 빛이 산란했다. 황급히 치켜뜬 눈에 황금빛 글자가 보였다.
어둠 위를 수놓는 단문의 메시지.
[ 너는 속고 있다 ]
그건 한차수를 향한 경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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