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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퇴사하면 안 될까-99화 (99/113)

99화

콱!

땅을 박차는 걸음이 호쾌했다.

한차수는 저택을 벗어나 헬기장으로 질주했다. 바닷바람이 텅 빈 들판 위를 가볍게 스치고 지나 그의 등을 떠밀어 주었다.

어떻게 이리 딱 맞는 때에 도착한 건지 모르겠다.

지금 그의 마음은 적시에 도착한 지원군을 맞이한 군인의 심정과 비슷했다. 그것도 수세에 몰린 상태에서 동료의 총소리를 들은 군인.

정이흔을 부둥켜안고 머리를 한바탕 헝클어트려 줄까. 저번에 보니까 비비적대는 걸 좋아하는 것 같던데.

한차수는 영양가 없는 생각에 맞춰 바삐 발을 놀렸다. 어느새 그가 머물던 저택이 저 멀리 뒤로 밀려났다.

“안 쫓아오네.”

흘끗 뒤로 시선을 던진 한차수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채라하나 민목하. 둘 중 한 명이라도 쫓아올 줄 알았는데 다행히 눈치는 있는 모양이었다.

어찌 되었든 그놈의 형제 지옥을 벗어난 걸로 족했다.

“후우….”

일단 숨 좀 돌리자.

한차수는 건물 그림자 아래에서 잠시 땀을 식혔다. 너무 열심히 뛴 탓에 폐 부근이 뻐근할 정도였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지나가는 이들이 그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옷깃과 소맷단이 푸른 흰 정복을 입은 직원들이었다.

한차수는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다 마주 인사를 건넸다. 제각기 다른 얼굴 위로 똑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틀에 찍어낸 듯한 웃음을 머금은 직원들이 그를 스쳐 지나갔다. 한차수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가만히 발치를 바라보다 다시 헬기장을 향해 움직였다.

대기를 난타하는 듯한 강풍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렸다.

‘그러고 보니 위장 신분이 아직 그대로던가.’

한차수는 공터를 향해 걸어가며 상태창을 활성화시켰다.

위장 신분은 균열을 나오기 전에 등록한 그대로였다.

[ 위장 신분(A) : 활성화 ]

[ 활성화된 신분: 유리몸 포션 제작자 ]

“쯧.”

혀를 찬 그는 상태창을 치운 뒤 먼 곳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이틀 내내 제 곁에서 떨어지지 않은 채라하 때문에 위장 신분을 바꿔볼 기회가 없었다.

채라하가 한차수의 직업군과 능력에 대해 얼마만큼 알고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경쟁 상대였으면 중요한 능력은 숨겼을 거야.’

원작 한차수의 성격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암살자라는 직업은 숨길 수 없었더라도 위장 신분처럼 희귀한 스킬은 비밀로 했을 가능성이 높다.

만약의 경우 정체를 숨기고 도망칠 때 용이한 능력이었으니까.

같은 맥락에서 한차수는 채라하에게 자신의 능력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느냐 묻지 않았다.

‘그쪽에서 먼저 꺼내지 않는 화제를 굳이 내가 나서서 이야기할 필요는 없지.’

위장 신분을 건드리는 건 채라하와 정이흔이 가까이 있지 않을 때. 그들에게 자신의 변화를 들키지 않을 게 확실한 순간에 해 볼 생각이었다.

사색에 잠겨 몸을 움직이다 보니 어느새 헬기 착륙장이 가까워졌다.

두두두두—!

“윽.”

몸을 밀어내는 강한 바람에 한차수는 두 팔로 얼굴을 감쌌다. 돌개바람이 흰 도료를 바른 넓은 공터를 감싼 채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왜 아직도 착륙하지 않은 거지?’

뭔가 잘못된 건가. 한차수가 채라하를 부르기 위해 돌아가야 하나 생각했을 무렵이었다.

쿵!

무언가가 지축을 울렸다. 삽시간에 바람이 가라앉고, 재빠른 발소리가 공기를 때렸다.

“한차수 씨—!”

“…?”

어깨를 넘긴 주홍빛 단발이 경쾌하게 흔들렸다. 고양이처럼 살짝 올라간 눈매는 기쁨에 겨워 한껏 접힌 상태였다.

한 번 본 기억이 있는 외양에 한차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보고 싶었어요, 한차수 씨!”

“선희다 헌터. 오랜만입니다.”

“몸은 어떠세요? 균열에 휘말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말이 이어질 때마다 훅훅 거리가 줄어들었다. 씩씩한 기세만큼 강렬한 존재감이었다.

바람이 그녀를 따라 몰아치는 듯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속까지 멀쩡한 거 맞으세요? 듣자 하니 저주까지 당하셨다던데. 사람을 막 죽이고 싶으셨다면서요.”

선희다의 눈이 천둥처럼 번쩍였다.

“지금은 눌러놨다지만 언제 발동할지 모르는 상태죠? 제가 저주 이런 건 잘 보는데, 괜찮으시면 좀 살펴봐도 될까요?”

정중한 언사에 한차수는 가만히 눈을 굴렸다.

‘사람이 달라진 것 같은데.’

그때 했던 말이 사실이란 말인가.

“저 평소에는 되게 침착하거든요? 길드장님도 그래서 절 믿고 한차수 씨를 맡긴 건데….”

그때는 믿을 수 없었는데 이렇게 다시 보니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기억 속의 선희다와 달리 눈앞의 그녀는 단단한 산 같았다. 허리춤에 찬 검이 묵직한 기도를 더했다.

한차수가 입을 떼려던 순간이다.

“여기서 나눌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선희다 헌터.”

소리 없이 나타난 정이흔이 두 사람을 가르고 섰다. 단단한 몸이 좁은 공간을 순식간에 채웠다.

“놀라라, 갑자기 나타나셔서 하마터면 주먹을 내지를 뻔했잖아요.”

“…여기서 제일 놀란 건 선희다 씨가 아니라 한차수 씨일 겁니다.”

정이흔은 다짜고짜 저주 이야기를 꺼낸 걸 지적했다.

“아.”

선희다가 턱을 긁적였다. 곧이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은 그녀가 한차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미안해요, 한차수 씨. 길드로 보낸 해태 포션 잘 썼어요. 그거 덕분에 목숨 몇 번 건졌거든요. 은혜를 갚아야겠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흥분했네요.”

게다가 저번에 제가 일을 그르친 것도 있잖아요. 선희다가 씁쓸한 얼굴로 덧붙였다.

“마음에 두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포션은 쓰라고 드린 겁니다.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네요.”

“한차수 씨, 그렇게 살면 손해만 봐요.”

선희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한차수는 그저 가만히 웃기만 했다.

“얼굴이 많이 좋아졌네요, 한차수 씨.”

묵묵한 목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남자가 익숙하게 제 머리를 손으로 매만졌다. 단단한 손끝이 여린 살갗을 스쳤다.

한차수는 반사적으로 눈을 살짝 찡그렸다. 간지러운데.

“굳이 마중 나올 필요는 없었는데. 몸은 괜찮습니까?”

“멀쩡하니까 이렇게 길드장님을 데리러 나온 게 아닐까요.”

“아. 괜찮다는 질문은 하지 않기로 했었는데 내가 그걸 잊었네요.”

한차수는 피식 웃으며 어느새 목 뒤까지 내려간 그의 손을 잡아 내렸다.

‘이것 봐라.’

은근히 사람하고 닿는 걸 좋아한다니까.

이런 놈이 원작에서는 동생이 죽고 미쳐서 어깨만 닿아도 사람을 산 채로 태우고 다녔단 말이지.

‘이런 걸 보면 원작을 비튼 게 잘한 일 같기는 한데….’

아니, 그게 아니지.

한차수는 소리 없이 혀를 차고선 재빨리 헛생각을 지워 냈다. 회색 눈동자에 차가운 빛이 움텄다 사라졌다.

‘선후 관계를 착각할 뻔했군.’

자신은 오로지 제 목숨이 아까워 움직였을 뿐이다. 원작이 비틀리고 정이흔이 미치지 않은 건 그에 따른 부수적인 효과.

그러니 그 어떤 공명심도 자부심도 그의 소유가 아니다. 한차수는 위인도, 의인도 아니었으니까.

새로 얻게 된 삶이 아까워 어떻게든 살 길을 찾아 아등바등 몸부림치는 평범한 인간이면 충분해.

그때, 온기가 상념을 흐트러트렸다.

“열은 없네요.”

정이흔의 손등이 뺨을 한차례 훑고 지나갔다. 미련 없이 거둔 손길은 산뜻할 정도였다.

“아픈 게 아니라 딴생각을 하고 있는 거였습니까?”

자신을 앞에 두고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듯 살짝 책망하는 듯한 어조였다. 한차수의 입꼬리가 실룩였다.

그는 기가 차다는 듯한 눈으로 정이흔을 흘기고는 선희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섬광 같은 두 눈은 여전히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보다 선희다 씨는 어쩐 일로 함께 오신 겁니까?”

“아, 길드장님이 자리를 비우실 경우를 대비해 제가 곁을 지켜 드리기로 했어요.”

호오.

한차수는 정이흔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형님과 사전에 협의된 내용입니까?”

들은 적이 없는 내용인데. 한차수의 읊조림에 정이흔의 눈매가 살짝 굳었다.

마침 한차수는 어제 저녁 채라하와 경호 인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참이었다.

“차수야, 불편하지 않다면 사람을 몇 명 불러도 될까?”

채라하는 그의 업무를 보조하면서 동시에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이들을 데려오고자 했다.

그러나 정이흔이 따로 사람을 데려온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 점을 지적하며 묻자, 뚱딴지같은 소리가 돌아왔다.

“…제가 없는 동안 많이 친해지셨나 보네요.”

“예?”

“아닙니다.”

어딘지 샐쭉하기까지 한 음성에 한차수는 어이없는 얼굴로 정이흔을 바라보았다. 그는 짧은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씁쓸한 낯으로 말했다.

“한차수 씨의 형님과는 진작에 말을 나눴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한차수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 툭 하고 내뱉었다.

“길드장님, 왜 민목하 씨나 형님이 아닌 제가 여기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설마하니 절 싸고도는 형님께서 직접 길드장님을 데려오라고 보냈을 리는 없을 텐데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정이흔은 한차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차수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계속 길드장님을 기다렸습니다. 절 구하려고 목숨까지 거셨는데도 감사하다는 말 하나 드리지 못했으니까요.”

“그건.”

“잘 오셨습니다. 줄곧 기다리고 있었어요.”

속삭이며 끌어안자 정이흔이 그를 마주 안았다.

‘역시 포옹을 좋아하는군.’

이걸로 풀려서 다행이다. 한차수는 낮은 숨을 내쉬었다.

치대는 걸 좋아하고. 자신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진 사람이 다른 누군가와 더 친해지면 토라지고… 참 손이 많이 가는 주인공이었다.

그래도 형제 지옥에서 자신을 구해 줄 인물이니 맞춰 줄 수밖에.

“이제 가실까요.”

한차수가 그들을 안내하려던 참이었다.

“…잠깐만요.”

“네?”

“이 녀석도, 한차수 씨를 많이 기다렸을 겁니다.”

주먹만 한 온기가 손바닥을 가득 채웠다.

어딘가 눈에 익은 불투명한 수정.

그건 정이흔이 그에게 선물한 마령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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