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한밤중의 야시장 사건은 채라하가 점주들에게 허락을 구했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나름대로 평화롭게 끝났다.
“내가 사적으로 가진 땅에 가게를 차린 사람들이란다.”
“충분한 보수를 지급하기로 약속하고 옮겨 온 겁니다. 작은 도련님이 걱정하실 일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건 다행이긴 한데….”
한차수는 탐탁지 않은 눈으로 들판을 응시했다.
알아볼 수 없는 문자가 새겨진 간판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를 따라 퍼지는 이국적인 향신료의 냄새.
팔짱을 낀 한차수를 향해 강렬한 이목구비를 가진 이들이 손짓했다. 웃음 가득한 얼굴엔 어느 모로 보나 강제로 끌려온 기색은 없었다.
하지만 한차수는 이번 일을 통해 다시 한번 깨달았다.
이 세계에서 동생에게 미친 형이란 재해에 가까웠다. 종잡을 수 없으며 함부로 행동을 예측해서는 안 되는 존재.
한차수는 고심 끝에 채라하에게 조심스레 제안했다.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뭐든 말만 하렴.”
“저는 형님과 단둘이서 시간을 보내고 싶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방해 없이, 오직 형제끼리만 보낼 수 있는 시간을요.”
채라하의 입매가 흐물흐물 풀어지는 게 보였다. 짙푸른 색을 띠는 회색 눈동자에는 폭풍이 몰아쳤다.
“나랑, 단둘이?”
“예.”
한차수는 쐐기를 박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로도 모자라 채라하의 두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흠칫 놀랐다.
‘왜 이렇게 차갑지?’
마치 시체의 손을 만지는 것 같지 않나.
혈색이 없어 창백한 손에 한차수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가까이서 보니 손뿐만이 아니었다.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피 냄새.
한차수는 다급히 채라하의 어깨를 붙들었다.
“다치신 겁니까?”
“아.”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듯 채라하의 턱을 타고 핏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채라하가 멍한 얼굴로 코피를 닦아 냈다.
한차수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이건 그냥 피곤해서.”
“힘을 써서 이런 겁니까?”
“…….”
채라하는 대답하지 않은 채 조용히 미소 지었다. 민목하는 벌써 들켰냐는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하실까 봐 말씀드리지 않았던 건데.”
민목하의 말에 따르면 채라하의 능력은 공간을 다루는 힘이었다.
한차수도 내심 짐작하고 있던 바였다. 자신을 감싸 안고 균열을 여는 모습을 봤으니까.
‘하지만 육체가 힘을 버티지 못할 정도라면… 역시 S급이었다는 소리군.’
심지어 채라하는 열 살이 되기 전에 각성했다고 한다. 미처 여물지 못한 신체는 거대한 힘에 짓눌려 오랜 시간 신음해야 했고.
‘어린 시절에 곁에 있어 주지 못한 게 한으로 남았다는 게 그 말이었나.’
한차수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런데 그걸 고작 자신을 기쁘게 하겠다는 이유로 썼다고.
기가 차다 못해 가능하다면 채라하의 다리 사이를 걷어차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채라하가 왈칵 피를 쏟지만 않았어도 분명 그리했으리라.
“형님, 아니.”
한차수가 이를 악문 채 두 눈을 부릅떴다. 민목하에게서 뺏은 손수건으로 채라하의 입가를 닦으면서 그를 불렀다.
“형.”
“…!”
채라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의 풍부한 속눈썹이 격렬히 떨렸다.
한차수는 눈매에 힘을 주고서 말을 이었다.
“앞으로는 날 기쁘게 해 주겠다는 이유로 힘을 낭비하지 마.”
“차수야.”
“전혀 기쁘지 않으니까.”
“…….”
“아까 말했듯, 내가 원하는 건 형과 단둘이 보내는 소소한 시간이야.”
남의 형을 이런 식으로 골로 보낼 수는 없었다.
심지어 그게 자신을 즐겁게 만들고 싶어서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 때문이라면 더더욱.
‘게다가 이놈은 제법 이름 있는 기업의 후계자잖아.’
그놈의 후계 경쟁 때문에 동생인 자신을 노리는 내부자까지 존재할 지경이다. 자신 때문에 채라하가 몸을 해쳤다는 말이 퍼진다면 그들이 두고 볼 리 없었다.
이 미친놈의 팔불출에 제동을 걸어야만 했다.
제 목숨을 위해서라도.
“아침에 형을 밀어낸 건… 쑥스러워서였어.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없는 건 형이 아니라 나도 마찬가지잖아. 싫어서가 아니라 낯설었던 것뿐이야.”
한차수는 부끄러운 척 고개를 숙이며 목소리를 죽였다. 채라하의 거친 숨이 목 위로 쏟아졌다.
슬쩍 고개를 들자 푸른색이 섞인 눈동자가 호수처럼 잔잔하게 물결치는 게 보였다.
멀리서는 민목하가 손수건을 물어뜯으며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살아생전 이런 모습을 볼 줄은 몰랐다는 둥 뭐라고 지껄이는 것 같았지만 한차수는 무시했다.
그에게 중요한 건 눈앞의 미친 사내였다.
한차수는 머뭇거리는 기색으로 입을 뗐다.
“우리가 그리 정다운 형제지간이 아니었다는 건 알고 있어. 그래서 나와 하고 싶은 게 많았겠지. 그렇지만 초조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
딱딱하게 곱은 채라하의 손을 붙잡아 올리며, 한차수가 담담히 고했다.
“도망치지 않겠다고 말했는데, 설마 날 믿지 않는 건가? 형의 하나뿐인 동생을?”
“…차수야.”
“약속했으면 믿어. 이 섬에서 있는 동안은 형의 곁에 있어 줄 테니까.”
단단한 암석이 쪼개지고 그 속의 보석이 드러나듯 채라하의 눈에 황홀경이 들어찼다.
작게 입을 벌린 그의 얼굴은 깨달음을 얻은 성자와 같았다. 한차수는 그의 시선을 제게 붙든 채 나지막이 속삭였다.
“형.”
“응….”
“다른 형제들처럼 평범한 시간을 갖자. 굳이 대단할 필요 없잖아. 난 거창한 게 아니라 소소한 걸 원해. 형을 아프게 하면서까지 추억을 쌓고 싶지는… 윽.”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단단한 팔이 그를 감싸 안았다. 온몸을 바스러트릴 듯 껴안는 힘에 한차수는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맞아, 차수야.”
잔잔한 목소리에 기분 좋은 울림이 담겨 있었다. 한차수는 가만히 채라하의 등을 토닥였다.
파아앙—!
검푸른 하늘 위로 폭죽 터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점점이 떨어지는 불꽃이 한차수의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정말 별짓을 다한다, 내가.
차게 식은 얼굴 위를 불빛이 스쳤다.
“나도 몰랐는데, 내가 초조했나 보다.”
채라하가 차분한 음성과 함께 팔을 풀었다. 반짝이는 폭죽의 빛깔이 그의 눈동자에 담겼다.
“앞으로 네가 걱정할 만한 일은 하지 않을게. 형이 되어서 동생을 슬프게 하면 안 되지. 그래, 참, 다른 형제들처럼 지내고 싶다고 했지? 당연히 그래야지.”
번민을 떨쳐낸 듯한 얼굴이었다. 믿음직스러움이 넘쳐흐르는 태도에 한차수는 내심 안도했다.
‘이제야 겨우 형다운 모습이군.’
동생한테 미친 형이 아니라, 평범한 손위 형제 말이다.
“그치만 이미 부른 사람들을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으니 이번만 봐주지 않겠니?”
“…알겠습니다.”
“아까처럼 편히 말할 줄 알았는데.”
“하루 이틀 함께 할 것도 아닌데 뭘 그리 급하게 굽니까. 같이 있다 보면 어련히 편하게 나올 텐데.”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활짝 웃는 채라하의 얼굴에 한차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한차수는 채라하의 앞뒤 없는 동생 사랑에 훌륭한 제동을 걸었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아침이 되어 제 옆에 두 눈을 꼭 감고 숙면을 취하고 있는 채라하를 발견하기 전까지 말이다.
***
무얼 상상하든 그 한계를 뛰어넘는 존재였다.
동생에게 눈이 돌아간 형이란 과연 범상치 않았다.
“왜 여기에 있는….”
“형제라면 한 침대에서 자고 일어나잖니. 아, 베개 맡에 과자도 숨겨 뒀어. 아침 먹기 전에 먹을까?”
“…….”
“이러고 있으니 옛날 생각이 나네. 네가 과자를 가지고 내 방으로 왔을 때마다 늘 같이 먹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어서 슬펐지.”
마음 한구석을 쿡쿡 찌르는 말에 한차수는 말없이 과자 봉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래, 어울려 주기로 했으니….’
침대에서 같이 과자를 먹는 것 정도야 쉽지 않은가.
한차수는 해맑은 얼굴로 제 입에 짠 과자를 물려 주는 채라하를 보며 허허 웃음 지었다.
그러나 형제들만이 할 수 있는 소소하고 정다운 시간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물이 너무 뜨겁지는 않고?”
“채라… 형님?”
“등 밀어 줄게. 이리 나와 앉아 봐.”
“저는 괜찮은데.”
“아, 부담스러웠니? 미안해. 목하가 형제라면 한 번쯤 서로 등을 밀어 준다길래.”
“…….”
촤아악!
“어? 밀어 줘도 되는 거니?”
“…예.”
그렇게 한차수는 하루의 대부분을 채라하와 함께하게 되었다.
그가 일하는 시간 외의 대부분을 한차수와 같이 보내고자 한 까닭이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결국 참다못한 한차수는 저도 모르게 짜증을 내비쳤고.
“이게 애들이 그렇게 말하던 ‘평범한 형제 싸움’인 건가?”
채라하의 감격 어린 중얼거림에 장탄식을 내뱉었다.
그는 ‘버릇없는 동생을 혼내는 형’이 되기 위해 엄한 얼굴을 꾸며 내는 채라하를 보며 생각했다.
어쩌면 원작의 한차수는 후계 구도에서 밀려나 도망친 게 아니라, 그냥 채라하가 싫었던 건 아닐까.
‘가능성 있는 이야기야….’
“차수야, 형이 말하면 집중해야지.”
“…예.”
제 수명을 깎아 대는 팔불출 짓을 못하게 했더니 대신 형제 지옥에 갇혀 버렸다.
‘이 짓을 계속할 셈은 아니겠지.’
한차수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져 갔다. 설마하니 내부의 적을 잡기 전까지 매일 이런 생활이 반복되는 건 아닐 터이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한차수의 시름을 한 번에 날려 줄 바람이 불었다.
두두두두——
“천령 길드장이 왔나 보네요.”
민목하의 말에 한차수는 단숨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제가 마중 나가겠습니다.”
역시 정이흔. 이 소설의 주인공다웠다.
한차수는 그의 구원자를 향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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