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햇볕이 따사로웠다.
먼지 한 점 없는 대기를 훑고서 살결에 내려앉는 산뜻함. 혼탁한 도심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공기에는 약간의 짠 내도 섞여 있었다.
섬에서의 하루가 또 한 번 밝은 것이다.
촤아악!
전날 복잡한 마음으로 저택으로 돌아온 한차수는 침침한 눈으로 커튼을 걷었다.
늦게 잠에 든 그를 배려한 걸까. 보통 같으면 진작에 문을 두드렸어야 할 민목하가 보이지 않았다.
한차수로서는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는 터벅터벅 걸음을 옮겨 방에 딸린 욕실에 들어섰다.
간단히 씻은 뒤 거실로 나오자 짙은 커피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간이 주방이 위치한 쪽이었다.
“일어나셨습니까?”
“…….”
침실에만 들어오지 않은 모양이군.
한차수는 물기를 대충 닦아 내며 커피를 내리고 있는 민목하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시선을 돌리니 이것저것 뭔가 잔뜩 쌓인 테이블이 보였다. 샌드위치, 베이글, 수프 등 위에 부담을 주지 않는 간단한 아침 식사였다.
문제가 하나 있다면 소파 한가운데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부담스러운 존재라고 해야 할까.
“잘 잤니?”
“…….”
“아직 졸리나 보네. 커피는?”
“다 됐습니다.”
“차수는 신맛을 싫어했지?”
얘가 왜 여기 있지.
눈을 끔뻑이고 있자니 부드럽게 어깨를 누르는 손길이 느껴졌다. 저항 없이 자리에 앉은 한차수를 향해 채라하가 눈웃음을 뿌렸다.
곧 뜨거운 커피 향이 비강을 타고 뇌리를 강타했다. 한차수는 본능적으로 잔을 움켜쥐었다가 떨어트릴 뻔했다.
“위험하게!”
“아.”
붉은 자국이 남은 손바닥을 모양 좋은 손이 움켜쥐었다. 작은 소란이 일고 어디서 난 건지 모를 얼음주머니가 손에 쥐어졌다.
“그대로 꽉 잡고 있어. 얼음이 녹으면 바꿔 달라고 말하고.”
“아니, 괜찮…습니다.”
고막에 대고 직접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에 한차수의 눈꺼풀이 느리게 움직였다.
‘왜 이렇게 졸린지 모르겠군.’
피곤해서 그런가. 아니면 섬의 평화로운 분위기에 무장 해제당한 건가.
하품을 내쉰 한차수는 다시 커피잔을 향해 손을 뻗었다. 방금 전의 실수를 반복하려는 건 아니고, 얼음을 가져다 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툭.
“형이 해 줄게.”
뭘…?
섬세한 손가락에 가로막힌 제 손은 그대로 허벅지 위에 얌전히 올려졌다. 그리고 이내 입가에 와닿는 차가운 감촉.
“자.”
“…….”
내가 아직 꿈에서 깨지 못했나.
한차수는 눈꺼풀에 힘을 줘 천천히 감았다 떴다. 시야를 간지럽히는 햇살은 변함없었다.
테이블 한가득 차려진 형형색색의 음식도, 가까이 달라붙어 제 입가에 잔을 갖다 댄 채라하도 그대로였다.
참고로 채라하가 들고 있는 잔은 그의 앞에 놓여 있던 것이다. 자신의 것이 아니라.
‘이게 지금 뭐 하자는 거지.’
입술을 열지 않은 채 그대로 시선만 돌리자 채라하의 반짝이는 눈동자가 보였다.
“자다 일어나서 몸에 힘이 안 들어가잖아. 또 잔을 놓치면 위험하니 도와줄게.”
“…잠 다 깼습니다. 제가 혼자 할 수 있으니까 이리 주시죠.”
“흘릴까 봐 걱정돼서 그래? 그럼 커피는 식은 뒤에 마시고, 먼저 배부터 채우자. 요즘 네가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일단 이것저것 가져오긴 했는데….”
채라하가 한껏 들뜬 몸짓으로 달라붙었다. 정신이 없었다. 한차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짜증 섞인 목소리에 들뜬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내가 부담스럽게 했구나.”
아차 싶었다. 잠결에 감정적으로 반응한 한차수는 다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부담스러운 게 아닙니다. 그저. 음, 뭐라고 해야 할까요.”
적절한 말을 골라내는 게 왜 이리 힘든지 모르겠다. 그는 둔해진 혀를 겨우 굴렸다.
“저한테 이렇게까지 해 주실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아무리 기억을 잃었다지만 제가 어린애가 된 것도 아니고….”
“그래, 그렇지. 네 말이 맞아.”
채라하는 두 손을 모아 무릎 위에 둔 채 그의 말을 경청했다. 먹혔나. 한차수가 안도의 숨을 내쉴 때였다.
스윽. 천끼리 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채라하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푸른빛 도는 회색 눈동자가 어딘지 조금 서글퍼 보였다.
“급한 일이 있던 걸 잊고 있었네.”
잠깐.
“이따 보자, 차수야. 밥 맛있게 먹고. 체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나머지는 부탁하지.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
“알겠습니다.”
그렇게 끝이었다.
채라하는 자신을 민목하에게 맡기고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
“…….”
무거운 침묵이 폐부를 짓누르고, 민목하의 지긋한 시선이 느껴졌다. 책망과 이해가 반반씩 섞인 눈빛에 한차수는 제가 잘못 본 게 아님을 깨달았다.
급히 자리를 뜨던 채라하의 슬픈 눈동자.
“아.”
설마 그는 나름대로 자신과 친해지기 위해 노력했던 걸까.
‘어울려 주기로 했는데 그걸 까먹고 무심코.’
아니, 그런데 다짜고짜 자신을 어린애 취급하면 누가 받아주느냔 말이다.
탄식하며 얼굴을 감싸자 민목하가 십분 이해한다는 듯한 목소리로 그를 위로했다.
“어제 작은 도련님에게 그런 말을 듣고는 굉장히 기대하고 계셨거든요. 앞으로는 사이좋은 형제처럼 지낼 수 있는 거냐고 들뜨셔서는 잠도 제대로 못 주무셨습니다.”
“…하지만 방금 전의 그건 조금.”
장성한 동생한테 하기에는 너무 낯부끄러운 짓이 아닌가.
얼굴을 감싼 손가락 사이로 항의하듯 그를 바라보자 민목하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릴 때 작은 도련님을 곁에서 챙겨 주지 못한 게 한으로 맺히신 분이라.”
“아….”
하긴 후계 경쟁이 치열하면 어릴 때부터 주변에서 두 사람을 들들 볶기 마련이지.
고개 숙인 한차수에게서 앓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민목하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작은 도련님이 잘못하셨다는 건 아닙니다. 큰 도련님도 본인에게 과한 면이 있다는 걸 깨달을 필요가 있어요. 음, 커피 더 드릴까요?”
“…….”
한차수는 식은 커피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깊은 한숨을 쉬었다.
바로 전날 채라하가 동생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끔 해 주겠다며 다짐한 보람이 없었다.
‘다음부터는 튕기지 말고 잘 받아 줘야겠군.’
한차수는 손을 뻗어 잔을 쥐었다. 적당히 식은 커피 잔의 온기가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낯간지러운 형제 사이를 동경하는 것 같긴 한데… 그래, 어릴 때부터 하고 싶었다는데, 뭐.’
남이 주는 음식 받아먹는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애초에 병원에서도 여러 번 경험하지 않았나.
한차수는 굳은 결심을 하고 단숨에 커피를 비웠다.
“후우.”
정신 차리자, 한차수.
어차피 오래 볼 사이도 아니지 않나.
‘원하는 대로 어울려 주자.’
사람은 좀 창피하다고 죽지 않는다. 한차수는 결연한 얼굴로 샌드위치를 베어 물었다.
민목하가 한 걸음 뒤에서 그를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
각오를 행동으로 보여 줄 기회는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아 찾아왔다.
“큰 도련님께서 저녁을 함께 하는 건 어떻냐고 물으셨습니다. 물론 거절하셔도 괜찮으시고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전 좋습니다. 그보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말씀하시죠.”
“형님은 다른 곳에 계신 겁니까?”
상심한 채라하가 자리를 떠난 뒤 한차수는 그를 찾아 저택을 뒤졌다. 안타깝게도 별다른 소득은 없었지만.
“민목하 씨도 건물에 안 계시던데요.”
“아, 예. 업무용 공간은 다른 건물에 있습니다. 큰 도련님께서 먹고 자는 곳과 일하는 곳을 함께 두는 걸 좋아하지 않으셔서요.”
민목하는 설명하면서도 조금 놀란 듯한 눈이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그를 먼저 찾아 나선 게 의외인 모양이었다.
한차수는 조금 고민하다 말을 꺼냈다.
“제가 뵈러 간다면 좋아하실까요.”
“예? 누굴, 헉, 큰 도련님을 말입니까?”
“…예.”
이런 걸로 놀라다니. 정말 삭막한 사이였나 보군. 한차수의 눈썹이 내려앉았다.
“물론이지요! 바로 연락을 넣겠습니다. 아, 식사 전에 같이 걸으시는 건 어떻습니까? 건물 뒤쪽 공터에서 숲으로 이어지는 산책로가 있습니다.”
사무실에서 가만히 기다리는 것보다는 그게 낫지 않겠냐며 민목하가 권했다.
“저녁 식사 전까지 돌아올 수 있는 거리면 괜찮습니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민목하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떠났다. 그로부터 약 이십여 분 뒤, 채라하가 상기된 표정으로 나타났다.
“날 보러 오고 싶다고 했다며.”
“…예.”
지난번부터 은연중에 느낀 거지만 채라하는 자신을 보고 싶다는 말에 참 약한 것 같았다.
가족을 찾길 원한다는 말에 득달같이 달려온 것부터 그렇고….
“저 때문에 무리해서 나오신 건 아닙니까?”
“그럴 리가.”
채라하가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건물 뒤편으로 이끄는 손길에 한차수는 몸을 맡겼다.
이번에는 채라하가 원하는 대로 맞춰 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한차수는 보았다.
검은 하늘 색색들이 수놓는 화려한 불꽃놀이와 작은 풀꽃만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던 들판 위를 가득 채운 요란한 가게의 행렬을.
“이게 무슨.”
“아무것도 없는 산책로는 재미없잖니. 그리고 너랑 같이 꼭 경험해 보고 싶은 일이기도 했고.”
어딘가의 야시장 거리를 통째로 뜯어내 가져온 사내가 두 눈을 곱게 휘며 웃었다.
“정말 기쁘다, 차수야. 너랑 같이 이럴 수 있다니… 꿈만 같아.”
“…….”
그래, 왜 몰랐을까.
동생을 죽인 놈을 잡아 사지를 뜯고 세상을 불태우는 놈이 있다면, 동생이 같이 산책 좀 하자는 말에 섬의 풍경을 통째로 바꾸는 놈도 있을 텐데.
깊은 한숨이 밤공기를 물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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