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불투명한 장막은 물 샐 틈 없이 섬을 둘러싸고 있었다. 굳이 바위산을 넘어 해안 전부를 둘러볼 필요도 없었다.
저건 거대한 성벽이었다. 아마 바깥에서는 들어올 엄두도 못 낼 게 분명했다.
‘의료 센터에 설치된 결계 못지않겠는데.’
결계에 대한 전문 지식이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상식선에서 생각해 봤을 뿐이다.
거대한 섬 하나를 뒤덮을 규모의 결계를 과연 허술한 수준으로 짰을까?
심지어 그걸 지시한 자는 채라하다. 각성자 관리국을 한바탕 뒤엎고도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은, 한차수의 친형.
“하….”
그를 떠올리자 자연스레 한숨이 흘러나왔다.
파도가 닿지 않는 자리. 꺼끌거리는 모래사장 위에 털썩 드러누운 한차수의 눈이 허공을 훑었다.
‘이게 업보라는 건가.’
한차수는 과거의 제 입을 후려치고 싶었다. 세계가 자신에게 거대한 악의를 품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미친 형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제게 S급임이 분명한 미친놈을 주다니. 고의가 아닐 수가 없었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한낱 엑스트라 악역 주제에 가진 서사가 너무 깊어.’
채라하와 민목하가 식사 동안 흘린 말을 종합하자면 한차수는 있는 집 도련님이 맞았다. 모놀리스라는 국제 기업을 이끄는 채강호 회장의 차남.
당연히 원작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은 내용이었다. 채라하의 등장 또한 마찬가지다.
열등감에 푹 절은 삼류 악역의 가정사가 등장할 구석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니 작금의 상황은 그가 한차수의 생을 억지로 잡아 늘려서 벌어진 일이라는 뜻이다.
덕분에 아주 귀찮게 됐다.
“돌겠네.”
한차수는 머리 뒤로 손깍지를 낀 채 눈을 찌푸렸다. 남빛으로 물든 하늘 위로 언뜻언뜻 결계의 빛이 흘렀다. 문득 그의 입에서 불퉁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아니지. 따지고 보면 내가 아니라 백담 때문인 것 같은데….”
잔뜩 구겨진 눈매가 날카로운 기색을 띠었다. 생각해 보니 진실로 그러했다.
애초에 가족에 대한 말이 제 입에서 왜 나왔는가.
“한차수 씨, 우리 집 둘째가 되는 건 어때요?”
“종신 계약이라느니, 파트너라느니 그딴 삭막한 계약 관계보다 정이 넘치고 화목한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게 낫지 않겠어요?”
백담이 자신에게 입양되라는 개 같은 소리를 해서가 아닌가. 그런 웃기지도 않는 말만 하지 않았어도 가족을 찾고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을 텐데.
결국 자신은 백담을 형제로 맞이하지 않으려다 진짜 미친 형을 불러들이게 된 것이다.
“하아….”
한차수는 두 눈을 감은 채 긴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떠올렸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반 시간 전, 일방적인 화기애애함이 흐르는 저녁 식사 자리.
왜 이제서야 자신을 찾아왔냐는 물음에 채라하가 내놓았던 답을.
“네가 날 보고 싶어 하지 않았거든.”
채라하는 빌어먹게도 정말 동생을 사랑하는 형이었다. 무척이나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나 내놓는 답마다 정이흔이나 백담과 같은 결이었다.
“네가 싫어해서 먼저 연락도 하지 않고, 널 만나러 가지도 않았어.”
그래서 채라하는 하나뿐인 동생이 기억을 잃은 것도 몰랐다며 슬퍼했다.
끝없는 탄식에 한차수도 함께 안타까워했다.
‘입을 닥치고 지낼걸 그랬지.’
뒤늦게 말조심 제약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하루에 다섯 끼씩 먹지도 않고, 입 다물고 누워만 있었을 텐데.
하지만 이제 와서 뭘 어쩌겠는가.
‘내부의 적을 찾기 전까지는 예전처럼 꺼져 달라고도 말할 수도 없고.’
자신은 원작 한차수처럼 채라하를 밀어낼 수 없었다. 환각 심장의 사고가 진짜 ‘사고’가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널 위협으로 본 사람들이 벌인 일이겠지. 대신 사과할게. 미안하구나, 차수야.”
채라하의 나긋한 목소리를 떠올리며, 한차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회색 눈동자가 지루하다 못해 지긋지긋하다는 소회를 띠고 있었다.
권력과 부를 지닌 가문. 서로를 가족이 아니라 경쟁 상대로 보는 사람들. 그리고 그에 기생해 영달을 추구하는 거머리들.
세간에는 더없이 경탄스러운 자태를 과시하나 속은 곪을 대로 곪아 추잡한 성채.
달리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부족함은 결속의 열쇠가 되어 주기도 하지만, 풍족함은 언제나 불화의 씨앗이 된다.
그건 어느 시대든 똑같았다.
그러니 이곳도 별다를 바 없는 것이다.
게이트와 몬스터로 인해 변혁을 겪은 세계든, 정체 모를 재앙에 의해 멸망에 다다랐다 겨우 되살아난 세계든.
“사람 사는 곳은 어디든 비슷하다니까.”
건조한 목소리가 바닷바람에 흩어졌다.
예상컨대 원작의 한차수는 채라하의 자리를 탐냈을 것이다.
원작 한차수는 가족을 떠나고 겨우 몸담은 대형 길드의 S급 헌터를 상대로도 열등감을 참지 못했던 사내다.
그런 사람이 친형을 상대로 과연 가만히 있었을까. 채라하를 제치기만 하면 손에 들어올 것이 차고 넘치는데?
‘한차수가 채라하를 만나고 싶지 않아 한 걸 보면 뻔하지.’
경쟁에서 밀려나 도망친 것이다.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라 구태여 캐물을 필요도 없었다. 물었더라도 곧이곧대로 알려주지는 않았겠지만.
물론 그게 아니더라도 과거에 대해 묻지 않을 이유는 충분했다. 그 자리에 있는 건 자신만이 아니었으니까.
정이흔.
원작의 주인공이자 원작 한차수가 증오한 사내가 함께 있었다.
그의 앞에서 굳이 원작 한차수의 본성을 까발릴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렇지 않아도 외부인을 보는 민목하의 시선이 무척이나 살벌했는데 말이다.
‘금방이라도 쫓아내고 싶어 하는 눈초리였지.’
의료 센터 안에서도 그리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섬으로 오니 정도가 심해졌다.
툭툭.
한차수는 대충 바짓단을 털었다. 물기 없는 모래는 손짓 몇 번에 모두 날아갔다. 밤공기가 서늘하게 목 뒤를 스쳤다.
허리를 편 그의 눈에 건물의 불빛들이 아롱졌다.
한차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었다.
‘차라리 한차수를 미치도록 미워하는 형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아쉬움에 절로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평범한 형제지간이라면 서로를 경원시하다 못해 없는 존재처럼 여기는 게 보통 아닌가.
비록 제게는 그럴 만한 형제도 없었지만, 곁에서 지켜본 바로는 대개 원수에서 데면데면한 사이를 유지했다.
‘사이좋은 형제가 아예 없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한차수는 생각을 이어 나가다 말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되었든 자신은 저곳으로 가야 했다. 비록 원한 적 없는 형제라 하더라도 존재를 알아 버렸으니까.
“어쩔 수 없지.”
한차수는 머리를 헝클어트리다 말고 걸음을 옮겼다. 복잡한 눈빛과 달리 모래사장 위의 흔적은 가지런했다.
‘굳이 친해지려 애써 노력할 필요는 없다.’
한차수는 내부의 적이 해결되는 대로 채라하의 곁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 전까지는 채라하에게 어울려 줄 생각이었다.
“차수 왔니?”
“…예.”
두꺼운 외투가 어깨를 감쌌다. 한참 전부터 층계참 위에 서 있던 사내는 다정한 손길로 그를 건물 안으로 이끌었다.
채라하는 동생을 지극히 사랑하는 형이었다. 가족이 보고 싶다는 동생의 말 한 마디에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올 정도로 한차수를 아끼는 사내였다.
그러니 그에겐 동생과 화목한 시간을 보낼 자격이 있었다.
비록 긴 생애에 빗대어 본다면 짧은 순간에 불과하며, 그의 곁에 있는 건 진짜 한차수가 아닌 자신이지만.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이다.’
무거운 숨을 삼킨 한차수는 채라하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차분한 회색 눈에 결연한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제가 그쪽을 뭐라고 부르면 되겠습니까.”
“응? 잠깐, 나한테 물은 거니?”
“예.”
아까 전에는 경황이 없어 미처 물어보지 못했습니다.
변명하듯 덧붙이자 웃음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종소리처럼 가볍고 기분 좋은 소리였다.
채라하는 더없이 환한 얼굴로 그를 얼싸안았다. 숨이 막힐 듯 강한 포옹이었다.
“그냥 형이라고 부르면 돼. 어려운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굳어 있어.”
“…….”
“아. 내가 어색한 거구나.”
겹쳐진 몸을 떼어 낸 채라하가 머뭇거리는 시선을 보냈다. 애정을 거부당한 아이처럼 기운 없는 모양새였다.
“…기억이 없으니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한차수가 침중함을 내리누르며 말했다.
“그래도 같이 지내다 보면 나아지겠죠.”
“정말 그렇게 생각하니?”
화악.
안개가 걷히는 듯한 미소였다. 두 눈에서 푸른빛 광채가 뿜어 나왔다. 적잖이 기쁜 모양이다.
채라하가 두 손을 붙잡으며 외쳤다.
“나랑 같이 있어 줄 거니? 도망치지 않고?”
아아, 부담스러운 건 기합으로도 해결할 수가 없군.
다짐이 한차례 흔들릴 뻔했지만 한차수는 견뎌 냈다.
애초에 원해서 한차수의 몸에 빙의된 것도 아니고, 자신은 나름대로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이기에 억울한 감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게 채라하의 탓도 아니니까.
한차수는 감내하기로 했다.
“…약속했잖습니까. 도망치지 않을 겁니다. 채라하… 그러니까, 형님.”
“맙소사.”
감격에 가득 찬 목소리는 등 뒤에서 울렸다. 민목하가 틀림없었다.
속으로 혀를 차는데 온기가 얼굴을 감쌌다.
“넌 정말 착한 동생이야. 언제나, 늘 그랬지.”
“…….”
“앞으로 같이 노력하자.”
한차수는 그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영원을 약속할 수는 없지만 이 정도는 해야지.’
그러나 그는 전혀 몰랐다.
동생에게 미친 형을 제3자로서 바라보는 것과, 그를 가족으로 두는 것의 차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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