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모놀리스는 단순한 이익 집단이 아니라 채강호와 그의 부하들이 긴 세월에 거쳐 꾸려 온 둥지에 가까웠다.
환란의 시대. 오랫동안 살아온 터전을 버리고 새로운 물결에 함께 몸을 던질 만큼 강한 신뢰로 엮인 이들이 만들어 낸 공동체였으니까.
그리고 채라하는 그 속에서 자랐다. 부친의 뜻을 이어받고 삼촌들의 애정과 걱정을 한 몸에 받으며.
그렇기에 그는 부친이 물려주고자 하는 모든 걸 최대한 훼손시키지 않고 기꺼이 보듬고자 했다.
그들이 아무리 제 동생을 기껍게 여기지 않는다 해도 말이다.
“거리를 두는 편이 좋겠구나.”
“네 동생은 어린 게 너무 영악해. 저래서야 커서도 못쓰게 될 거다.”
애정 어린 조언은 날이 갈수록 강도를 더해갔다. 이미 일선에서 물러난 이들까지 넌지시 권유했다.
하지만 동생에 있어서 채라하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드넓은 배포와 아량은 그가 이끌어야 하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게 아니었다.
“차수를 잘 돌봐 주렴. 네 하나뿐인 동생이잖니.”
무엇보다도 어머니의 부탁이 있었다.
그러니 어찌 그를 저버리겠는가? 그렇지 않아도 사랑스러운 아이인데.
끝없는 애정은 하나뿐인 동생을 향해서도 비처럼 쏟아져 내렸고, 주변의 모든 이들이 그에 한탄했다.
“동생한테 조금만 덜 관대하시면 안 되는 겁니까?”
“왜 채차수를 상대로는 그 잘난 이성이라는 게 작동하지를 않는 거냐고요!”
모두가 자신 같을 수가 없으므로 채라하는 측근에게 동생에 대한 마음을 바꾸라 지시하지 않았다. 그는 각자의 뜻을 존중했다.
대신 동생에게 직접 손을 대는 일만은 금지했다. 누차 부탁하자 모두들 그의 뜻을 존중해 주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간계를 부리다니. 채라하는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열기에 달아오른 머리가 바삐 돌아가는 와중에 흥미롭게도 정이흔이라는 뜻밖의 기회가 주어졌다.
“그렇게까지 아끼는 동생이라면 자기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 아닌가?”
“당신이 한차수 씨의 형이자 가족이라면, 증명하십시오.”
동생의 진솔한 면모를 알아차리고 그를 가족처럼 아끼는 S급 각성자. 쉽게 가져올 수 없는 패였으며 곁에 두기에 아쉽지 않은 존재였다.
A급인 척하는 각성자 관리국 실장, 기태연과는 달리 말이다.
‘그건 실격이었지.’
머리를 짚은 채라하가 침대 위에서 나른한 숨을 뱉었다. 얼굴이 부서질 듯 창백했다.
“쿨럭!”
몸이 지끈거리며 통증을 호소했다. 속에서는 연신 핏물이 올라왔다. 몸이 조각조각 쪼개지는 듯한 고통이었다.
과도한 능력 사용의 여파였으나 채라하는 개의치 않았다. 고통이 두려워 필요한 때에 능력을 쓰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후우….”
균열 안에서 지켜본 바, 기태연의 목표는 동생의 구명이 아니라 자신을 제압하는 데에 있었다.
힘을 비축하고 존재감을 낮춰 공격이 이어지는 내내 동생에게 다가가려 애썼던 정이흔과는 달리 말이다.
딱히 기태연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그의 판단은 관리국의 일원으로서 옳은 것이었을 테니까.
초청을 받아 온 손님이 갑자기 태도를 달리한 데다 만만치 않은 힘을 지녔으니 안보 면에서 심상치 않은 위협이라 느꼈겠지. 자신을 죽이지 않고 살려 붙잡아 두고자 하는 기세가 느껴졌다.
하지만 형의 입장으로서는, 글쎄?
관리국의 사명이니 공무원으로서의 책임이니 하는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이보다 오로지 제 동생의 안위만을 챙기는 사람을 선호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 가족이 얽히면 사적인 감정이 앞서는 법이다.
정이흔은 그 사적인 감정을 제법 솔찬히 만족시키는 인물이었고, 기태연은 아니었을 뿐.
정이흔을 통해 사정을 전달받자마자 동해안에 발생했다는 게이트로 떠난 걸 보면 기태연은 확실히 나랏일이 잘 어울리는 사내였다.
“차수는 어떻지? 안정제 부작용이 심한 것 같던데.”
채라하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의료 센터에서 개발했다는 안정제는 동생의 몸에 부담을 줬다.
본래 환자에게 쓸 목적으로 가지고 있던 게 아니라 효력이 지나치게 강한 게 문제였다.
광증이 발발했다는 동생을 안정시키기에는 걸맞았지만 그래도 마음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채라하의 물음에 민목하가 안경을 치켜올리며 답했다.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원래도 회복력 하나는 좋으신 분이었으니까요. 명줄도 질기시고.”
“우리 차수가 보통이 아니긴 하지.”
채라하는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힘없이 의자에 걸터앉았다. 민목하의 한숨이 창가의 노을 위로 스며들었다.
따뜻한 빛으로 가득한 방 안.
채라하는 민목하와 눈을 맞췄다. 그는 동생을 데려와야겠다는 제 말에 반대하지 않은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측근조차 제 동생을 싫어한다니 참 슬픈 현실이었다. 다들 마음 씀씀이를 넓게 가지면 좋을 텐데.
“다시 보니 생각보다 귀엽지 않아?”
“예?”
“차수 말이야.”
민목하가 질린 듯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기억을 잃기 전의 작은 도련님은 전혀 귀엽지 않았습니다.”
“그건 네가 차수를 제대로 본 적이 없어서 그런 거야.”
“거듭 말씀드리지만 작은 도련님의 패악질을 곁에서 모두 지켜본 게 접니다.”
민목하의 정색에도 채라하는 개의치 않았다. 그 무엇도 동생을 향한 그의 애정을 훼손할 수는 없었다.
“지금은 어때. 기억을 잃은 차수를 가까이서 지켜봤잖아. 아직도 같은 심경인가?”
“…확실히 달라진 면은 있습니다. 사람이 뒤바뀐 게 아닐까 싶을 때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완전히 마음을 놓으라는 말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저는 어디까지나 도련님을 보좌하는 역할. 경계심을 모두 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런 것까지 요구하지는 않아.”
민목하는 의료 센터에 지내면서 이미 마음 한편에 동생을 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채라하는 옅은 미소를 띤 채 리모컨을 찾았다.
핏!
한쪽 벽면을 차지한 대형 스크린에 빛이 들어왔다. 섬 곳곳에 띄운 ‘눈’에 비친 다양한 광경이 화면에 떠올랐다.
채라하의 시선은 개중 한 곳에 붙박였다.
섬을 구경하고 싶다며 자리를 박차고 나간 동생은 여유롭게 해변을 거니는 중이었다. 자신과 함께 있을 때와 달리 편안한 얼굴이었다.
“정부터 쌓아야 했는데.”
채라하가 혀를 찼다.
동생이 자신을 꺼리고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기억이 휘발된 탓이겠지. 아니면 스스로 없앴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집 안에 자신과 관련된 흔적이 전무했으니까.
휑한 집 안을 떠올린 채라하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그의 동생은 독립 후 문단속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민목하가 위로하듯 말을 붙여왔다.
“차차 좋아질 겁니다.”
“그러기를 바라야지. 바깥은 어때? 한창 시끄러울 텐데.”
자신이 동생을 데려왔다는 이야기는 이미 알음알음 퍼진 지 오래였다. 딱히 단속할 생각도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으로서는 눈에 띄는 움직임은 없습니다. 저희 측의 동태를 살피고 있겠죠. 아무래도 바로 행동에 나서기에는 눈치가 보일 테니.”
“오래가지는 않을 거야. 제 발 저린 자든, 오해를 사기 싫은 자든 결국 움직여야지.”
각성자 관리국과도 정리가 끝났다. 건도영 국장은 말이 잘 통하는 이였다. 기태연을 A급으로 속여 위장 취업시킨 사람답다고 할까. 머릿속에 영달만 가득 찬 본부장과는 태생부터 달랐다.
민목하가 서류를 훑으며 말했다.
“손님을 맞을 준비는 언제나 되어 있습니다.”
연구소로 쓰일 것을 대비하여 준비해 둔 섬이다. 습격을 대비한 방비용 결계는 물론 충동 억제 마법진도 새로 깔았다.
사람들을 처리할 장소도 차고 넘쳤고.
채라하가 화면을 핥을 듯 바라보며 뇌까렸다. 해변을 걷는 동생의 머리카락이 무척이나 폭신해 보였다.
“사람들이 오기 전에 더 친해지면 좋겠는데. 힘들겠지?”
“옛날 생각이 나는군요.”
“응?”
“무슨 말이든 결국 작은 도련님으로 귀결되는 게 참 징글징글합니다. 그동안 어떻게 참으신 겁니까?”
투덜거림에 묻어 내지른 물음은 수차례 반복된 것이었다. 채라하는 언제나처럼 평온한 얼굴로 답했다.
“차수가 그걸 원했으니까.”
“하아….”
“알면서 묻는 심보가 고약하네.”
채라하는 언제나 동생의 뜻을 존중하고자 노력했다. 어렸을 때부터 죽 그래 왔다. 사람이 원하는 것은 각기 다른 바. 각자의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 부딪힐 때도 종종 있었다. 다만 일부러 방해하고자 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의 뜻이 자신과 일치한다면.
가족을 찾고자 하는 마음이 같다면 더 이상 참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날 보고 싶어 하면 좋을 텐데.”
아쉬움 섞인 숨결이 화면을 어루만졌다.
프레임 안의 동생은 보면 볼수록 사랑스러웠다.
***
갑자기 소름이 끼치는데.
한차수는 모래사장을 거닐다말고 걸음을 멈췄다. 바닷물에는 발끝도 담그지 않았는데 어째선지 냉기가 몸을 울렸다.
한차수는 정이흔이 주고 간 담요를 여미며 먼 바다 위로 시선을 던졌다.
그곳엔 물결치듯 희미한 빛이 정교한 짜임새로 일렁였다.
견고하게 만들어진 결계였다. 딱히 위협적인 기세를 내뿜지는 않지만 쉽게 부서지지 않을 것은 분명했다.
“역시나….”
한차수는 낮게 혀를 찼다.
어차피 약속한 것이 있어 도망칠 생각은 아니었으나 이걸로 확실해졌다.
이건 좀 더 호화로운 형태의 감금이었다. 보호를 목적으로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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