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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퇴사하면 안 될까-94화 (94/113)

94화

화아악—!

날카롭게 찢겨 나간 균열이 그를 사방에서 노리고 있음에도 정이흔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감싼 열기는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원한다면, 모든 것을 기꺼이 삼켜 불태워 주겠다는 듯이.

뒤이어 청량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하. 그런 말을 하면 내가 물러설 수가 없잖아.”

채라하는 가볍게 손뼉을 치며 웃었다. 마치 그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한 태도였다.

“좋아요, 정이흔 씨. 아주 좋은 제안이었어.”

방금 전 그를 수천 결로 찢어발기겠다고 외친 남자의 입에서 자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대신 계약은 쌍방으로 이루어질 겁니다. 나의 진실과 당신의 진심. 대가는 죽음으로. 이의는 받지 않겠어요.”

정이흔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고, 채라하는 그를 둘러싼 균열을 일시에 거두어들였다.

사람들이 흩어지는 소리가 고요한 대기를 흔들었다.

채라하가 민목하의 시중을 받아 피를 닦아 내며 말했다.

“계약서는 가지고 있나요?”

“곧 도착할 사람들 중에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응, 그럼 좀 기다릴까. 차수는 어떤가요? 아까 땀을 좀 흘리는 것 같았거든.”

한차수는 무사했다. 채라하는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가슴을 내리누르는 손짓에 초조함은 없었다.

여유로운 태도에 정이흔은 소리 없이 혀를 찼다.

‘전부 계산된 거였군.’

한차수를 쫓아 섬에 도착했을 때부터 눈치채기는 했다. 그의 부하들이 자신을 섬 중심으로 몰아넣는 와중에도 채라하는 손 하나 꼼짝하지 않았으니까.

그의 눈은 예리하고 침착하게 자신을 관찰했다.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늠하기 위해서.

따라서 그의 협박이 진심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리는 건 쉬웠다.

채라하는 자신을 시험한 것이다.

상황을 살피고, 상대의 행동에서 의중을 파악할 수 있는지.

“여기는 중간 지점인 겁니까?”

그리고 단순히 위기를 모면하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상대를 협상 테이블로 끌고 와 자리에 앉힐 수 있는지 말이다.

“맞아요. 예쁘게 꾸몄는데 난장판이 되어서 좀 아쉽네요. 차수한테 보여 주고 싶었는데.”

이자의 목적은 한차수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에 가깝지.

정이흔은 금세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측. 그는 확신을 위해 채라하를 자극했고, 그는 예상대로 선뜻 받아들였다.

진실을 위해 목숨을 걸라는 제안을.

“형! 괜찮아?!”

“으아악, 정이흔! 이게 무슨 불지옥이야!”

투두두두두—

헬리콥터의 거센 바람이 그을린 풀밭을 휩쓸고, 황폐화된 섬은 뜻하지 않은 손님을 받았다.

그렇게 정이흔은 이제는 봉문되어 구할 수 없는 유리탑의 최고급 헌터용 계약서를 사용해 채라하와 계약을 맺었다.

효력이 강한 계약인 만큼 내용은 단순했다.

첫째, 한차수의 친형이 아닐 시, 채라하는 계약 성립과 동시에 심장이 멎는다.

“잠깐만요, 정말로 목숨을 걸었던 겁니까?”

당혹스러운 목소리에 정이흔은 설명을 멈췄다. 한차수가 두 눈을 커다랗게 뜬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가로운 정오의 식당.

정이흔은 사람들을 물린 채 한차수에게 그간의 일을 알려 주고 있었다. 물론 채라하가 자신을 시험했다는 등의 사견은 빼고, 건조한 사실만을 위주로.

“쌍방 계약이었으니까요.”

“하….”

한차수는 연거푸 마른세수를 했다. 창백하게 질린 하얀 손에 일어난 거스러미가 신경 쓰였다.

정이흔은 그의 손을 붙잡아 내리며 말했다.

“제 경우는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목숨을 걸어 놓고 뭐가 어렵지 않다고….”

“제가 한차수 씨를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걸로 충분했으니까요.”

한차수가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정이흔을 흘겼다. 정이흔은 어깨를 으쓱였다.

채라하가 그에게 내건 조건을 말하기 위해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널 쫓아 균열을 넘은 이유가 오로지 널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었을 경우, 정이흔은 그 자리에서 심장이 갈기갈기 찢겨 사망한다.”

부드러운 미성이 공간을 울렸다. 고개를 돌리자 채라하가 깍지 낀 손에 턱을 괴고 있었다.

“소중한 동생을 구하러 온 내게 감히 진실을 요구한 대가로 합당한 조건이었지. 공평하기도 하고.”

은은한 회색 눈동자 위로 새파란 빛이 스쳐 지나갔다. 한차수가 질린 듯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

“형씨라고 불러 주는 거 아니었니?”

한차수가 한숨을 내쉬자 채라하는 아무래도 좋다는 얼굴로 달콤하게 웃었다.

“아, 물론 그냥 형이라고 불러도 좋단다.”

“…….”

“이제 내가 네 형이라는 건 믿는 거지?”

믿지 않을 수가 있나.

“이게 그 계약서입니다, 작은 도련님.”

민목하가 이때라는 듯이 번쩍이는 계약서를 들고 나왔는데 말이다.

“하아….”

그래, 결국 친형이라는 얘기지. 그리고 본인은 납치를 한 게 아니라 숨넘어가게 생긴 동생을 보호하기 위해 데려온 것뿐이고.

한차수는 기묘한 빛이 흐르는 종이를 차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래서 섬 분위기가 이 모양이었던 거군.’

감금이 아니라 요양을 위해 꾸려진 장소였으니 이리도 평화로웠던 것이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리는데 어깨를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마음을 누그러트리는 따스한 온기는 정이흔의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이번에는 별로 효용이 없었지만.

“어제 제 설명이 부족했나 봅니다.”

“…….”

“피곤한 것 같아서 길게 얘기하지 않으려고 했던 건데.”

한차수는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이 미친놈….’

다시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주인공씩이나 되어 가지고 아무 데나 목숨을 걸고 다니다니.

장차 세계에 지대한 위협이 될 대규모 게이트를 해결해야 하는 주인공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 죽을 뻔했다는 사실에 한차수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심지어 그게 자신 때문이라는 게 제일 문제였다.

‘이걸 어쩌면 좋냐.’

정신 조작이나 세뇌를 걸 수도 없고.

이놈을 어떻게 정신 차리게 하지. 그리고 나는 어떻게 하지.

평생 내쉴 한숨의 절반가량을 푹푹 내쉬는 와중에 직원들이 후식을 가지고 들어왔다.

“커피면 되지?”

“…예.”

채라하가 내준 커피는 빌어먹게도 입맛에 딱 맞았다. 그것이 더욱 한차수의 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오늘은 여기서 머무를 건가요?”

“잠깐 들른 거라 다시 가 봐야 됩니다. 본격적으로 휴가에 들어가기 전에 처리해야 할 것들이 남은지라.”

“그래요? 편한 대로 해요. 참, 헬기는 계속 천령 길드 걸로 쓸 건가요? 대신 준비해 줄 수 있는데.”

“괜찮습니다. 이쪽이 이목을 사기에 더 쉬울 테니까요.”

“그렇다면야…. 응? 차수야, 뭐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니?”

“…그러고 보니 길드장님은 어쩌다가 여기서 휴가를 보내게 된 겁니까?”

한차수가 인상을 쓰며 물었다.

생각할 거리가 많아 하마터면 놓칠 뻔했다.

채라하가 자신의 형이고, 정말로 자신을 보호하고자 함이 확실하다면 정이흔은 이곳에 머무를 이유가 없다.

형이 동생을 지키고자 나섰는데 그가 뭐라고 이곳에 체류한다는 말인가?

‘둘 중 하나로군.’

정이흔이 채라하를 믿지 않거나, 아니면 제 곁에 머물러야만 하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전자의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만약 채라하가 자신을 해칠까 봐 걱정했다면 정이흔은 자신을 혼자 내버려 둔 채 섬을 떠나지 않았을 테니까.

“채라하 씨가 제 형인 것도 알겠고, 길드장님이 진심으로 절 구하고자 하신 것도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게 어떻게 지금 이 상황과 연결되는 건지는 모르겠군요. 혹시 두 분이 제게 숨기시는 게 있습니까?”

한차수는 팔짱을 낀 채 대답을 기다렸다.

두 사내는 뭐 그리 켕기는 게 많은지 말없이 눈빛을 주고받고 있었다.

“음…. 일부러 숨긴 건 아니란다. 네가 물어보면 당연히 말해 줄 생각이었어.”

먼저 말을 꺼낸 건 채라하였다. 심통 난 동생을 달래듯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를 어루만졌다.

“다만 한 가지만 약속해 줄 수 있니? 이야기를 듣고 나서 도망치지 않고 치료에 전념하겠다고 약속해 주렴.”

한차수가 눈썹을 치켜올리자 그가 녹아내릴 듯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형은 네가 뭘 하든 응원하고, 하고 싶은 게 생기면 무엇이든 지원해 줄 의사가 있지만, 이번엔 그럴 수가 없거든.”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널 노리는 사람들이 있어, 차수야. 그것도 내 아주 가까이에 있지. 우리 가족 중에.”

“…….”

“그래서 정이흔 씨와 손을 잡은 거란다. 나만큼 너를 소중히 아끼는 완벽한 외부인이니까.”

한차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뜬 그가 침착하게 물었다.

“…그 사람들은 왜 저를 노리는 겁니까?”

그러자 푸른빛 도는 눈동자에 상심이 깃들었다. 채라하가 힘없는 손길로 잔 표면의 물방울을 훔쳤다.

“네가 내게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더구나. 참 안타까운 일이지.”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날 리가 없는데 말이야.

조용히 읊조린 채라하가 낮은 숨을 내쉬었다.

그는 오랫동안 가족과 같은 이사진과 측근들에게 동생을 멀리하라는 말을 들었다. 그게 아니면 사람으로서 기능하지 못하도록 아예 망가트리라거나.

하지만 형이 되어서 어떻게 동생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있겠는가.

차수는 그의 동생이었다.

그가 보살펴야 마땅한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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