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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퇴사하면 안 될까-91화 (91/113)

91화

대격변은 지구에 참혹한 흔적을 남겼다. 산이 있던 자리에 바닷물이 차오르고, 호수가 펼쳐져 있던 곳에는 들판이 꽃을 피웠다.

지형이 바뀌었으니 삶의 양식이 달라지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제반 시설이 모두 파괴되고 혼란이 사람들을 잠식한 세상.

숨겨 왔던 욕망을 발하기에 몹시 적절한 때가 아닌가.

그렇게 수많은 정부가 몰락했다. 봉기가 일어나고 쿠데타가 들불처럼 세계를 휩쓸었다.

한국은 그나마 잘 버틴 축에 속했다. 과거, 한차례 나라가 분단될 뻔한 위기를 겪었던 국민들은 단결에 능했으며 환란에 강했다.

하지만 주변국은 사정이 달랐다.

크고 작은 내전의 시작. 분열과 증오의 시대.

외부로 눈을 돌릴 시간 따위는 없었다. 그렇게 대격변과 함께 서해안에 솟아오른 수백 개의 섬은 그대로 한국의 소유가 되었다.

지금 활활 불타오르고 있는 섬 또한 그중의 하나였다.

채라하가 비밀리에 사 둔 섬이자 천혜의 요새. 동생과의 행복한 미래를 꿈꾸며 가꿔 온 그만의 낙원이었으나 지금은 그저 화력 좋은 땔감일 뿐이었다.

곱게 데려오려던 동생한테 하필이면 S급 화염계 헌터가 스토커로 붙은 탓이었다.

“이 미친 새끼…!”

“하아…. 하.”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야!”

말없이 검을 고쳐 쥐는 정이흔을 보며, 서정민은 피에 젖은 팔을 움켜쥐었다.

섬은 그야말로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몇 년에 걸쳐 아름답게 가꿔 온 삼림은 폭격을 맞은 듯 검게 그을렸고 호수는 메마른 바닥을 드러냈다.

그 와중에도 정이흔은 주인을 지키는 개처럼 한차수를 품에 안고 있었다.

아니, 그는 인질이었다.

저 미친놈은 한차수를 인질로 잡고 있었다. 채라하의 하나뿐인 동생을 붙잡아 되도 않는 농성을 부리고 있을 뿐이었다.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 됐지?’

아무리 생각해도 원인을 알 수 없어 서정민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균열을 넘을 때까지만 해도 잘못된 것은 없었다. 채라하와 자신은 기태연과 정이흔을 훌륭히 무력화시켰다. 죽일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기에 자신들이 떠난 뒤 그들이 날아갈 ‘장소’까지 지정해 두었다.

그런데 균열을 넘은 순간 갑자기 영문 모를 불꽃이 한차수를 휘감았다.

“윽…!”

한차수는 신음을 흘리며 몸을 뒤틀었고, 채라하와 서정민은 당혹을 금치 못했다.

불꽃은 마치 지옥의 겁화처럼 타올랐다. 무슨 짓을 해도 꺼지지 않는 불길에 서정민은 점점 공포심이 차올랐다.

‘안 돼.’

지금의 한차수는 완벽했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고, 잘못된 증오심도 품지 않은 깨끗한 인물. 심지어 성정마저 곧고 올발라, 진실을 알게 된다 한들 크게 뒤틀리지 않을 것이 자명했다.

그런 그를 이리 허무하게 잃을 수는 없었다.

채라하를 위해서, 서정민은 ‘완벽한 한차수’를 살려야 했다.

그러나 불길은 마침내 한차수를 완전히 집어삼켰다. 서정민은 억눌린 비명을 내질렀다. 그 순간.

“내 사람입니다.”

불꽃은 인간의 형상을 취했다.

“당신들이 마음대로 버렸다가 다시 제멋대로 주워 가는 가족이 아니라, 내가 지켜야 할 내 길드원이라고.”

상황을 이해하기도 전에 그들은 균열 바깥으로 튕겨 나왔다. 동시에 정이흔은 순식간에 그들을 몰아붙였다.

콰아앙!

콰앙!

지금도 울창한 숲 곳곳에서 불꽃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스킬을 쓰고 있는 건지, 그가 딛고 있는 땅은 용암처럼 이글거리며 끓어올라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정보가 잘못된 건가? 아냐, 그렇다기엔 좌표를 심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어.’

관리국에 도착하기 직전 들은 소식에 의하면 정이흔은 1급 게이트 보스 네 마리를 단신으로 격파하고 녹초가 된 상태였다. 실제로 연구동 지하에 나타난 그의 모습은 들은 것과 똑같았다.

그래서 서정민은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정이흔에게 좌표를 심었다. 채라하로 하여금 그를 수월히 제압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일종의 함정을.

그러나 그게 이제 와 다 무슨 소용인가.

그렇게 공을 들여 데려오고자 한 한차수가 저 빌어먹을 놈의 손아귀에 있는데!

서정민은 울화통이 터져 목 놓아 소리 질렀다.

“가족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가족이라고, 한차수 씨를 보호하기 위해서 데려가는 거라고!”

“나는 내 길드원을 보호하는 겁니다.”

“이 미친놈이 진짜 대가리마저 불에 타 버렸나!”

“…그건 당신이 해야 할 걱정인 것 같은데.”

나지막한 목소리는 평소와 달랐다. 의료 센터에 들를 때마다 모든 직원들에게 일일이 고개 숙여 다정히 인사하던 정이흔은 없었다.

쌔애액!

정이흔은 다시 한번 도약했다. 파파팍! 그가 뛰어오른 자리에 수십 발의 화살이 꽂혔다.

“이게 당신들이 말하는 보호입니까?”

“그건 당신이, 아니, 하…! 정이흔 씨, 도대체 왜 이러는 겁니까?”

서정민은 얼굴을 감싸며 탄식했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한차수에게 집착하는 건가.

그의 가족도 아니면서,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적도, 원망과 악의를 주고받은 사이도 아니면서!

서정민이 뿌득 이를 간 순간이었다.

저벅.

내내 정이흔이 폭주하는 꼴을 지켜보며 명령을 내리던 채라하가 드디어 직접 걸음을 옮겼다.

후욱! 후덥지근한 바람이 그의 소매를 부풀렸다.

“천령 길드장.”

“…곧 사람들이 올 겁니다.”

정이흔은 담담히 그에게 경고했다. 여기서 멈추라고, 그렇다면 자신도 더 이상 문제를 크게 키울 생각은 없다고.

채라하는 그의 말에 죄를 인정하는 대신 맑게 웃었다.

“차수를 많이 좋아하나 봅니다.”

타닥타닥, 불꽃 튀는 소리가 적막한 공기를 때렸다. 붉은 눈동자에 검은 그림자가 넘실거렸다.

숨조차 내뱉지 못하는 정이흔을 응시하며, 채라하가 한 걸음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서정민이 다급히 그의 뒤를 따르려 했지만 채라하의 손짓에 밀려날 뿐이었다.

“당신이라면 이해할 것 같군요. 내 동생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차수는 참 사랑스럽고 솔직한 아이예요. 어려서부터 원하는 게 분명하고, 그걸 이루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아이였지. 하지만 그 아이의 사랑스러움을 알아보는 사람은 많지 않았어.”

“무슨 말을 하려는 겁니까.”

“목적이 같다면 싸워야 할 이유가 있을까?”

금속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공기를 찢었다. 불길에 우글거리던 대기는 어느새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아니,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빽빽한 삼림도, 그것을 모조리 불태우던 불꽃도 공간을 찢으면서 나타난 수백 개의 균열이 전부 삼켜 버렸으니까.

“하.”

정이흔은 한차수를 추켜올려 안았다. 건조한 목소리가 잇새로 흘러나왔다.

“아이템이 아니라, 당신의 힘이었군.”

“혼잣말은 끝났나? 그럼 결정해. 차수를 넘기고 내 이야기를 듣든지, 아니면 이대로 수천 결로 찢겨 죽든지.”

채라하가 피범벅이 된 얼굴로 손을 들어 올렸다.

“참고로 허튼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사슬처럼 차가운 빛을 발하는 손끝이 정이흔을 겨눴다.

“여긴 내 ‘집’이니까.”

후오오오——

균열들이 공명하며 울부짖었다.

검은 핏물이 바닷바람에 섞여 휘몰아쳤다.

***

기억이 드문드문 끊겼다. 정신은 수면 위로 뛰어올랐다가 다시 아래로 빠져드는 물고기처럼 오락가락을 반복했다.

“으….”

한차수는 끓어오르는 열기와 그것을 식히는 냉기 사이에서 몸부림쳤다. 마치 누군가 자신을 들어 용암과 빙하에 번갈아 빠트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더웠다, 미친 듯이 더워 당장에라도 물속으로 뛰어들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가 맞부딪힐 정도로 추웠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예전에 이것과 똑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언제였더라…. 그래, 몰래 섹터 바깥으로 빠져나갔다가 병에 걸려 왔을 때였지.

그때, 그의 부모는 그를 걱정하면서도 ‘몹쓸 병’에 걸린 것에 실망을 내비쳤다. 열이 펄펄 끓는 와중에도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었던지.

못된 생각이지만 차라리 죽을병에 걸리는 게 나았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면 간절한 얼굴로 제게 매달릴지도 모르니까.

자신이 곧 죽기라도 할 것처럼 절박한 눈으로 바라보던 그 남자처럼.

‘아.’

태양처럼 뜨거운 눈동자가 침몰해 가던 그의 정신을 건져 냈다. 내리쬐는 열기에 머릿속을 메운 안개가 흩어졌다.

정이흔. 그래, 이 세계의 주인공이 그를 구하려고 했다.

기태연이 채라하의 빈틈을 찾기 위해 노려보고 있는 동안, 그는 피투성이가 된 주제에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자신을 구할 기회만을 엿봤다.

그때 자신은 놀랐던가, 감동했던가. 아니면 그의 이유 모를 절박함에 의문이 들었던가? 이제 와서는 잘 모르겠다. 눈이 마주쳤을 때, 그의 입술에 온 정신을 빼앗겼으니까.

정이흔은 아주 짧은 단어를 속삭였다. 그게 뭐였더라. 분명 중요한 물건이었는데, 두 글자 밖에 되지 않는, 아.

“구, 슬!”

“도련님!”

“허억, 헉….”

정신을 차리자마자 깨달은 건 몸이 너무 무겁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물먹은 솜을 팔다리 대신 달아 놓은 것 같았다.

아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한차수는 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를 걱정스레 바라보던 서정민과 눈이 마주쳤다.

이런 젠장.

결국 붙잡혀 온 건가. 한차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깨진 구슬에서 흘러나온 그 빌어먹게 간지럽기만 한 불꽃이 뭐라도 할 줄 알았는데.

그때였다.

“한차수 씨, 물 드세요.”

“길드… 콜록, 컥!”

“이런.”

사레에 걸린 한차수의 어깨를 정이흔이 다정히 다독였다.

“괜찮습니까?”

내가 이상한 건가? 왜 날 납치하려던 놈의 수하와 날 구하려던 놈이 사이좋게 날 바라보고 있지?

한차수를 혼란의 구렁텅이에서 건져 낸 건 그를 납치한 장본인이었다.

“일어났구나. 몸은 좀 괜찮니, 차수야?”

싱그러운 꽃다발을 한가득 안고 나타난 채라하가 맑은 목소리로 폭탄을 투하했다.

“아, 정이흔 씨는 오늘부터 한동안 우리와 함께 지내시기로 했단다. 그동안 밀린 휴가를 이곳에서 보내고 싶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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