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인데 퇴사하면 안 될까-90화 (90/113)

90화

원작 한차수에게는 가족이 없다.

그건 한차수에게 너무나 당연한 명제였다.

그에게는 가족에 대한 어떠한 단서도, 흔적도 없었다. 집에는 흔한 사진 하나 없었고 핸드폰 갤러리도, 주소록도 마찬가지였다. 뭐, 거기까지는 사이 나쁜 가족과 연락을 끊고 독립했다고도 볼 수 있는 수준이긴 했다.

하지만 백담의 도움을 받아 퇴원했을 때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한차수에게는 법적 보호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가족 관계로 명시된 그 어떤 사람도 그의 인생에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자 무의식중에 남아 있던 불안마저 사라졌다. 더 이상 한차수의 가족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가능성은 아직 남아 있었다. 원작 한차수조차 모르는 그의 가족. 혹시라도 비극적인 이유로 헤어졌다면 아직도 누군가 그를 찾고 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굳이 그들의 존재를 확인해야 할까?

원작 한차수가 걸어온 삶의 길. 그가 뿌려 놓은 악행의 씨앗은 자신 혼자서 감당하기도 힘든데 다른 사람들을 굳이 끌어들여야만 할까?

그럴 필요 없지.

한차수는 거기서 사건을 종결시켰다.

원작 한차수에게는 가족이 없다.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변치 않을 명제였고 그가 굳게 지키고자 하는 현실이었다.

그래서 지금의 상황을 믿고 싶지 않았다.

숙적이라고 나타난 놈이 자신의 형제라니. 그리고 뭐, 날 보호하기 위해 나타났다고?

“뭐, 이런. 미, 친…!”

마음 같아서는 있는 힘껏 욕설을 내지르고 싶은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 빌어먹을 배신자 새끼 때문이었다.

한차수는 사력을 다해 서정민을 노려보았다. 안경 아래 노랗게 빛나는 눈동자가 호선을 그렸다.

“우리 작은 도련님, 형님 오셨다고 투정 부리시기는.”

“지….”

“지랄한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죠? 우리 한차수 씨가 얼마나 상냥하고 착한 사람인데, 그런 소리를 할 리가 없지.”

이놈도 제정신은 아니다.

하긴 정이흔과 기태연을 앞에 두고 제 목에 주삿바늘을 찌른 놈이 정상일 리가 없겠지.

“아직 치료 안 끝났으니까 힘 빼지 마세요, 도련님. 그나저나 참을성 하나만큼은 대단하시네요. 몸이 완전 걸레짝인데 아까는 도대체 어떻게 뛰어다닌 겁니까?”

이게 치료야, 고문이야.

한차수는 담요에 둘둘 말린 상태로 서정민의 일방적인 치료를 받았다.

핏물을 닦아 내는 손길은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다. 방금 전 제 몸의 통제권을 뺏어 간 놈 주제에 말이다.

“어휴, 많이도 다치셨네. 이러니까 큰 도련님 눈이 돌아가지.”

“…….”

“그러길래 왜 해태의 포션을 애먼 놈들한테 나눠 주신 겁니까. 그거만 있었어도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거 아니에요.”

치료하는 내내 서정민은 툴툴댔고, 한차수는 노인들이 말하던 화병이라는 게 무엇인지 몸소 깨달았다.

“너, 이….”

그나마 제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부위인 입을 통해 조금이라도 짜증을 해소해 보려던 찰나였다.

[ 반경 10m 이내 숙적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

[ 파악된 숙적의 숫자 : 1/4 ]

[ 스킬 반항(A)이 활성화됩니다…. ]

[ 알림! ]

[ 내면의 반항심이 들끓고 분노가 의식을 잠식합니다! ]

눈앞이 새빨갛게 물들고, 한차수는 분노 섞인 신음을 터트렸다.

콰아앙! 쾅!

뒤이어 폭발음이 가까워졌다.

“아직도 싸우시네. 재미 붙이셨나.”

서정민이 먼 곳을 흘끗대며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분노에 못 이겨 꿈틀거리는 한차수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큰 도련님이 몸이 좀 약할 뿐이지 누구한테 지는 분은 아니라서.”

내가 지금 그 새끼 걱정하는 거로 보이냐?

한차수는 분노에 몸을 떨며 폭발음이 들리는 쪽으로 눈을 흘겼다.

콰아아앙——!

그곳에는 그렇지 않아도 알아서 무너져 내리고 있던 공간을 아주 착실히 개박살 내고 있는 범인들이 있었다.

“실장님, A급이 아니신가 보네요?”

“그러는 너는 손님이 아니라 도둑놈 새끼고!”

“제멋대로 입을 놀리는 성격이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더하군요.”

두 사람은 호각으로 싸우고 있었다. 채라하라는 놈은 기태연을 상대로 단 한 치도 밀리지 않고 있던 것이다.

기태연이 마도사와 싸우느라 어느 정도 지친 상태인 걸 감안해도 놀라운 건 마찬가지였다.

쌔애액!

파공음과 함께 살갗이 터져 나가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렸다. 폭죽처럼 튀어 오르는 선혈은 흐릿한는 눈으로도 빌어먹게 잘 보였다.

한차수는 호각이라는 단어를 수정해야 했다.

채라하는 기태연을 여유롭게 몰아붙이고 있었다.

“반대로 천령 길드장은 참 말이 없고.”

정이흔이 소리 없이 그를 공격하는 와중에도.

쿠우웅——

화아악!

정이흔이 팔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새빨간 화염이 대기를 일그러트렸다. 채라하는 막힘없이 그의 공격을 받아쳤고, 그때마다 불똥이 꽃처럼 허공을 수놓았다.

압도적인 광경에 한차수는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이글거리는 불꽃이 도마뱀처럼 제 살결을 핥아 대는 것 같았다. 그만큼 엄청난 열기였다.

스스로를 불태우고도 모자라 세상 모든 것을 살라 버릴 듯한 불꽃.

소설에 묘사된 것과 똑같았다. 당시 소설을 읽으며 느꼈던 감정은 지금과 달랐지만.

‘빙의했다는 걸 이런 식으로 새삼 깨닫게 될 줄은 몰랐네.’

한숨과 함께 눈을 깜빡인 순간이었다.

“미친!”

“윽!”

짧은 신음과 함께 두 남자의 자세가 동시에 무너져 내렸다. 한차수는 눈을 부릅떴다. 그들은 사슬에 사지가 꿰뚫린 처참한 꼴이었다.

정이흔이 피투성이 꼴로 피를 뱉어 내는 게 보였다.

“길, 드… 콜록!”

“작은 도련님, 그러다가 목 붓습니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이러다가 은인이 아니라 역적이 되게 생겼다.

‘이 새끼들 제정신이 아니야.’

정이흔은 한국에 몇 없는 S급 헌터이자 대형 길드인 천령을 이끄는 수장이었다. 그런 그를 죽인다는 건 단순히 S급 헌터를 잃는다는 걸로 끝나지 않는다.

나라를 적으로 돌리는 꼴이란 말이다.

게다가 그뿐인가?

기태연은 A급인 척하는 S급이자 각성자 관리국 실장이었다.

그가 잘못된다면 위기 관리실은 물론이고 관리국이 자체적으로 ‘사냥’에 나설 수도 있다.

“당, 장 그만…두, 라고!”

이 미친놈들아!

있는 힘 없는 힘 다 끌어내 소리치자 서정민이 웃었다. 조금 힘이 없는 듯한 미소였다.

“진짜 적응 안 되네. 그래도 걱정하시는 것 같으니 말해 드리자면 저 두 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죽일 생각이었으면 진작에 없앴어요.”

개소리 늘어놓지 말고 풀어 주기나 해라.

눈빛으로 말하자 서정민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더니 사실 저렇게 잡아 두는 것도 힘들다, 여기 들어오기 전부터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아냐 등등 뭐라 변명을 지껄여 댔지만 별로 듣고 싶지 않았다.

그때, 열받는 목소리가 귓가를 강타했다.

“차수야, 몸은 괜찮니? 이제 아픈 데는 없지?”

“또, 라이….”

딱히 보자마자 욕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가 버렸다. 그러자 사내가 눈에 띄게 시무룩해했다.

한차수는 기가 막혀서 헛웃음을 터트리다 인상을 찡그렸다.

“첫 만남은 제대로 된 장소에서 멋지게 하고 싶었는데 아쉽네.”

“처음이 너무 좋아도 별롭니다, 도련님. 기대치가 높으면 그 뒤로 만족이 아니라 실망만 따를 가능성이 크니까요.”

“그런가?”

“예. 첫 만남이 최악이면 어떻습니까. 반대로 말하면 두 분에겐 앞으로 오늘보다 좋은 날만 가득할 거라는 얘기 아닙니까?”

“맞는 말이네. 차수 잘 데리고 있어. 슬슬 돌아가자.”

“예!”

채라하는 욕으로 끝난 걸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서정민이 자신의 목덜미에 꽂아 넣은 특급 안정제가 아니었다면 그의 멱을 따 버렸을 테니까.

거리가 가까워지자 여실히 알 수 있었다.

채라하를 향한 분노와 증오는 의료 센터 옥상에서 느꼈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만약 지금 반항 스킬을 끈다면 어떻게 될까.

‘상상 안 해도 알 것 같군.’

분명 기절만으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경련과 두통, 오한은 물론이거니와 어쩌면 피를 토할지도 모르지. 기절은 그 모든 걸 겪고 난 뒤 끝에 올 평화고.

원작 한차수는 도대체 어떻게 이런 놈과 가족이었던 걸까. 채라하를 견딜 수 없어서 가족을 떠났던 걸까?

이런 형제를 뒀다면… 잠깐.

‘순진하고 멍청한 막내.’

그거였구나. 위장 신분 목록의 가장 첫 번째에 그런 이상한 신분이 있었던 이유.

그건 채라하 때문이 틀림없었다.

‘순진하고 멍청한 막내로 보여야만 자신이 안전해질 테니까 만든 거였나.’

생각을 죽이고, 현실을 멀리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으로 남으면 분노할 일도 없어진다.

분노해야 할 이유가, 대상이 사라지니까.

깨달음이 격류처럼 몸을 휩쓸었다.

한차수는 바로 상태 창을 열었다가 멈칫했다.

아직 근처에 정이흔과 기태연이 있었다.

타인의 기척과 기운에 민감한 S급이라면 자신의 변화를 감지할 수도 있는 노릇. 그래서 그들 앞에서 일부러 위장 신분을 유지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정체가 밝혀진다 한들 지금 이 상황보다 심각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천령 길드장과 관리국 실장을 때려눕힌 범인의 동생이라는 점에서 일단 자신의 인생 계획은 상당히 훼손되었다.

‘그냥 해제해 버릴까.’

한차수는 슬쩍 정이흔을 향해 고개를 틀었다. 그리고 시선이 맞부딪혔다.

“…!”

설마 계속 나를 보고 있었던 건가.

붉게 달아오른 눈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간절하다 못해 절박한 눈빛. 한차수는 어째선지 목 안쪽이 간지러운 걸 느꼈다.

한차수의 시선을 사로잡은 채로 정이흔이 입술을 달싹였다.

한차수의 두 눈이 커졌다. 그가 주먹을 꽉 움켜쥐기 무섭게 등 뒤로 커다란 균열이 열리고, 채라하가 그를 끌어안았다.

“집에 가자, 차수야.”

그날, 서해안 어딘가의 섬에서 지옥 같은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90)============================================================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