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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퇴사하면 안 될까-89화 (89/113)

89화

한차수는 이를 꽉 물고 재빨리 스킬 창을 불러냈다. 새파란 창이 순식간에 시야를 가렸다.

[ 위장 신분(A)이 비활성화 상태입니다. ]

[ 현재 활성화 가능한 위장 신분 5/6 ]

[ 1. 순진하고 멍청한 막내

2. 유혹적인 밤의 손님

3. 재벌가 후계자

4. 유리 몸 포션 제작자

5. ???급 미등록 각성자 ]

‘4번 활성화!’

[ 위장 신분, ‘유리 몸 포션 제작자’를 활성화하시겠습니까? ]

그래, 시간 없으니까 더 물어보지 말고!

시스템 메시지가 뜨는 시간마저 아까웠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경쾌한 알림음이 귓가를 적셨다.

[ 위장 신분, ‘유리 몸 포션 제작자’를 활성화합니다. ]

[ 주의하세요! 활성화된 위장 신분에 부합하지 않는 행동을 할 시, 페널티가 부과됩니다. ]

됐다.

“하….”

안도감이 파도처럼 몸을 적셨다. 실제로 식은땀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한차수 헌터!”

“한차수 씨!”

처음 그를 부른 기태연은 그러려니 했다. 자기가 버티라고 했으니 찾아왔겠지.

하지만 뒤를 이어 들린 두 번째 목소리는 의외였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지금 여기 있으면 안 될 텐데.

“길드장님?”

“한차수 씨!”

고개를 돌린 한차수는 탄식을 흘렸다.

총알처럼 균열을 빠져나와 그에게 달려오고 있는 사내는 다름 아닌 정이흔이었다.

‘도대체 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기가 막혔지만 따져 물을 힘도 없었다. 한차수는 맥없이 그의 뒤로 시선을 던졌다. 균열을 넘은 건 기태연과 정이흔을 포함해 총 네 명이었다.

하얀 의료 가운을 휘날리며 달려오는 건 아마도 서정민.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누구지?’

인상이 흐릿한 남자는 체력이 좋지 않은지 힘겹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저런 꼴을 해서 용케 균열까지 넘은 걸 보니 중요 인력인 듯했다.

“한차수 씨, 괜찮습니까?!”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정이흔이 가까이였다. 달려오는 와중에도 그의 눈이 빠르게 자신을 훑는 게 느껴졌다.

아, 그러고 보니 상처를 치료하지 않았었나. 한차수는 무심결에 발걸음을 뒤로 뗐다. 정이흔의 붉은 눈이 일그러지는 게 보였다.

별거 아닌 걸로 너무 과민 반응을 한다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쿵.

심장이 내려앉았다.

“?!”

삐이이이———

화살처럼 고막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소음. 그리고 눈앞을 빨갛게 물들이는 경고창의 향연.

[ 경고! ]

[ 경고! ]

[ 경고! ]

.

.

.

[ 경고!! ]

[ 반경 10m 이내 숙적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

[ 파악된 숙적의 숫자 : 1/4 ]

[ 스킬 반항(A)이 활성화됩니다… ]

[ 알림! ]

[ 내면의 반항심이 들끓고 분노가 의식을 잠식합니다! ]

이런 X발.

한차수는 그대로 몸을 돌려 반대로 뛰었다.

“한차수 씨!”

정이흔의 당황스러운 목소리가 힘차게 울렸다.

***

“빌어먹을, 젠장, 이런 개 같은!”

한차수는 되는 대로 욕설을 내뱉으며 미친 듯이 뛰었다. 그 와중에도 등 뒤에서는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한차수 헌터!”

“한차수 씨!”

“무슨 일입니까! 한차수 씨, 왜 그래요!”

물어보지 마라 속 터지니까!

속에서부터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눈앞의 모든 걸 부숴 버리고 싶은 한편, 그대로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고 싶기도 했다.

개 같은 반항 스킬의 효과였다. 한차수는 방금 전 상황을 떠올리며 이를 아득 갈았다.

하마터면 그는 정이흔을 지나쳐, 마지막 남자를 향해 칼을 휘두를 뻔했다.

그만큼 크고 깊은 증오심이었다.

한차수는 절대로 그를 반경 10m 이내에 둘 수 없었다.

“하, 미치겠네.”

하지만 이대로 반항 스킬을 강제로 끌 수도 없었다. 왜냐고?

한 번 꺼 봤다가 그대로 기절했으니까!

결국 이대로 거리를 유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반항 스킬께서는 고맙게도 숙적이 10m 밖으로 1cm만 나가도 자동으로 꺼져 주셨지만 그 숙적은 끈질기게 자신을 따라오고 있는 중이라서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한차수 씨, 제발 왜 그러는지 말이라도 해 주십시오!”

정이흔이 따라오며 애타게 외쳐 댔다. 그래, 이대로 계속 술래잡기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한차수는 이를 악물고 일단 자리에 멈춰 섰다.

“다가오지 않는다고 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네 남자가 일시에 자리에서 멈춰 섰다. 의외로 말을 잘 듣는 모습에 한차수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정말로 말씀해 주실 겁니까?”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저놈이 숙적이라서 가까이 오면 죽이고 싶다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한차수는 되는 대로 둘러댈 생각이었다.

‘구조대로 온 걸 보면 분명 이 자리에 꼭 필요한 인물일 테지, 그렇지 않고서야 기태연이 여기까지 데려올 리 없으니까.’

그렇다면 그럴듯한 이유가 필요했다. 억지를 부렸다가는 오히려 이쪽이 역풍을 맞을 수도 있으니까.

한차수의 머리가 바삐 돌아갔다. 그러는 동안 그를 바라보는 눈빛은 점차 간절해져 갔다.

“한차수 씨, 말씀해 주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좀 기다려 보십시오.”

“그게 안 된다면 상처만이라도 살피게 해 주시면 안 됩니까? 머리에 난 상처가 심각한 것 같은데요. 치료할 포션이 없었던 겁니까?”

“아.”

그러고 보니 이마가 찢어졌었지. 정이흔의 말에 한차수는 말라붙은 핏물을 대충 털어 냈다. 정이흔이 끓는 신음을 흘렸지만 한차수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에겐 그보다 신경 써야 할 게 잔뜩 있었으니까.

이를테면 친절한 얼굴을 하고 자신을 바라보는 숙적 말이다.

“괜찮으세요?”

“…….”

“아, 제 이름은 채라하라고 합니다. 어쩌다 보니 기태연 실장님을 도와 한차수 헌터를 구출하는 데 힘을 보태게 됐습니다.”

숙적, 채라하는 한차수가 묻기도 전에 자신에 관련된 모든 것을 말해 주었다. 자신을 궁금해하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기태연도 그의 설명에 덧붙여 말했다.

“이 사람 덕분에 한차수 헌터한테 연결된 균열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렇군요.”

역시 구조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할이었다. 한차수는 그를 향한 경계심이 무럭무럭 커져 가는 걸 느꼈다.

겉보기에는 별거 없는 남자였다. 흐릿한 인상에 더해 체력이 좋지 않은지 겨우 숨을 몰아쉬는 게 더없이 병약해 보였다.

하지만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저 남자는 어딘지 모르게 꺼림칙하다고.

그래, 괜히 그가 ‘숙적’이겠는가.

“한차수 씨, 포션이라도 받아 주십시오.”

정이흔의 목소리가 그를 상념에서 건져 냈다. 붉은 눈에서 자신을 향한 걱정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저 호구 같으니라고.’

한차수는 한숨을 삼켰다. 원작 한차수가 그를 얼마나 증오하고 죽이고 싶어 했는지 알면 저러지 못할 텐데… 아.

그 순간, 한차수는 머릿속의 안개가 걷히는 듯했다.

굳이 숙적에게만 집착할 필요가 없었다. 그만 해치려고 하는 게 아니라 그들 모두를 해치고 싶어서 피했다고 하면 되니까.

‘기태연이 자리를 비운 동안 저주에 걸렸다고 하면 돼.’

그거라면 숙적을 향한 자신의 폭력적인 태도 또한 설명할 수 있었다.

해결법을 찾은 한차수는 바로 실행에 나섰다.

“사실 제가 저주에 걸린 상태입니다.”

“예?”

“아니, 상태 이상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뭐가 되었든….”

“무슨, 저주입니까? 상태 이상에 걸린 거예요?”

“아니 내가 그걸 줬는데도 걸렸어?”

“제가 광증 치료제를 몇 개 가지고 있는데…!”

설명을 끝내기도 전에 질문이 쏟아졌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다가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한차수는 흥분을 못 이겨 조금씩 다가오는 이들에게 꺼지라는 눈빛을 쏘아 주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아까 전에 여러분을 보자마자 도망친 건 그러지 않으면 여러분을 덮칠 것 같아서였습니다.”

“뭐라고요?!”

서정민의 경악 어린 비명을 무시하며 한차수는 말을 이었다.

“살인 충동이 자꾸 들더군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충동이었습니다.”

“…….”

“…….”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도망친 겁니다. 사실 이렇게 여러분과 마주하고 있는 지금도 편하지만은 않습니다.”

담담한 고백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사람들은 저마다 복잡한 얼굴로 한차수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말인데.”

한차수가 채라하를 가리키며, 약해 보이는 그를 먼저 내보내는 게 좋겠다고 말하려던 때였다.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예?”

채라하가 돌연 그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여기서 나가게 되면 가족을 찾을 거라고 들었는데, 그 마음은 변함이 없나요?”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지. 한차수가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원작 한차수의 가족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게 있나.’

채라하는 지금 숙적으로서 자신에게 경고하는 걸지도 몰랐다.

“하….”

한차수는 이를 악물었다. 죽어도 혼자 죽지, 괜한 사람을 얽히게 할 생각은 없었다.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 찾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살인 충동에 시달리는 사람이 갑자기 가족이라고 나타난다면 분명 좋아하지 않을 테니-”

“그럴 리가.”

상냥한 목소리였다. 가슴속 깊이 쌓인 울화를 모두 보듬어 줄 듯 아름답고 부드러운 목소리.

그래서 한차수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의 뒤바뀐 말투를.

“내가 널 보호하기 위해서 여기까지 왔잖니.”

“무슨-”

“집으로 가자, 차수야.”

안개가 걷힌 듯 어느새 뚜렷해진 그의 이목구비를.

“난 네가 날 죽이려 한다 해도 괜찮아.”

원래 형제란 그런 거니까.

나지막한 울림이 고막을 흔든 순간, 바늘처럼 날카로운 무언가가 그의 목덜미를 꿰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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