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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퇴사하면 안 될까-88화 (88/113)

88화

핏물에 눈이 따갑다. 지친 육신이 피로를 호소한다. 흙먼지가 사납게 일고, 숨을 쉴 때마다 폐부가 쪼그라든다.

콰앙, 쾅!

점점 척박해지는 환경. 수세에 몰리는 듯한 기분. 쿵쾅대는 심장은 어서 도망치라 외친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리했을 것이다.

“지쳤네.”

한차수는 눈앞으로 쏘아진 빛살을 쳐 내며 중얼거렸다. 공격을 흘려 보낸 검신이 둔중하게 울렸다.

궁지에 몰린 상대의 몸부림은 지겨울 만큼 보아 왔다.

그것이 인간이든, 인간이 아니든.

창백한 얼굴이 차가운 미소를 머금는다. 한차수는 숨을 짧게 내뱉고, 그대로 신상의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후우욱!

카가가각!

당연하게도 칼끝은 수정 표면에 닿지 못했다. 불길한 기운이 막처럼 그를 밀어내고 있었다.

수차례 계속된 공방.

자신이 마도사의 패턴을 꿰었듯, 적 또한 자신의 공격에 익숙해졌다.

그렇기에 죽는 것이다.

키이이이잉——!

왼 손가락에 감아 놓은 실이 진동한다. 대리석을 깎아 만든 눈썹이 크게 올라간다. 흑요석을 박아 넣은 눈동자에 파문이 인다.

“알아보네. 그래, 네 부하의 유품이다.”

수십 차례의 공방전은 눈속임이었을 뿐이다.

궁병의 활에서 떼어 낸 시위. 위장 신분 스킬이 친절히 A급이라 알려 주었으며, 공작이 쓸모를 귀띔해 준 ‘음율의 선’

거미줄처럼 얇은 투명한 실에는 힘을 머금어 그것을 간직하는 능력이 있었다.

끄드득-

그리고 그걸 방출하는 능력도 있었고.

타닥!

한차수는 그대로 땅을 박찼다. 그의 뒤로 늘어진 선 위로 짙푸른 액체가 흘러내린다.

음율의 선이 마도사에게서 흡수한 힘을 증폭시킬 촉매제. 해태의 장인이 만든 강화 포션이었다.

[———!]

자신에게 어떤 비극이 닥칠지 알아차린 것일까.

마도사는 다급히 그를 막으려 했다. 안타깝게도 그물처럼 몸을 감싼 실 때문에 그대로 쓰러져야만 했지만.

쿠우웅!

균형을 잃은 마도사는 흙먼지를 피워 올리며 고꾸라졌다. 바닥에 처박힌 팔다리가 꿈틀거렸다.

그 순간.

딱!

손가락 튕기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콰앙!

콰아아앙!

그리고 광휘가 폭발했다. 화염이 치솟고 굉음이 귓가를 찢었다.

“큭!”

생각보다 폭발력이 너무 강했다. 한차수는 그대로 데구루루 땅을 굴렀다.

뭐든 쉽게 풀리는 일이 없다니까.

“쿨럭!”

겨우 땅을 기어 엄폐물 뒤로 몸을 숨겼다. 하아. 막혔던 숨이 터져 나왔다. 그제야 온몸에 피가 돌며 감각이 느껴졌다.

고통 또한 마찬가지였다.

‘빌어먹을.’

콰앙, 쾅!

“쿨럭!”

연속해서 터져 나오는 충격파가 대기를 후려쳤다.

챙강, 챙강, 챙강—!

그때마다 얄팍한 유리가 터져 나가는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그렇게 몇 차례 더 휩쓸리고 나서야 충격파는 멎었다.

“후우…. 하아.”

저릿저릿한 몸의 감각을 느끼며 한차수는 손등으로 핏물을 닦았다. 입술이 터져 피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하아….”

‘이거, 비늘이 아니었으면 벌써 기절했겠는데.’

아직까지도 공기가 불안정했다. 멀리서 이글거리는 화염의 열기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마도사의 거대한 몸은 하얀 화염에 감싸여 점차 부서지고 있었다. 한차수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을….]

죽기 전까지 알 수 없는 말이나 해 대는군.

한차수는 한숨을 내쉬며 뻐근한 몸을 주물렀다. 뭔가가 걸리적거려 내려다보니 왼 손가락에 아직도 실이 감겨 있었다.

[대단했네.]

공작의 목소리가 울렸다. 어딘가 울적한 분위기가 감도는 게, 연인의 죽음을 보는 게 힘겨운 듯했다.

“음….”

이걸 위로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차수는 고민하다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어찌 되었든 자신은 그의 연인…. 그러니까, 생전의 연인이었던 존재를 죽인 사람이 아닌가.

섣부른 위로는 도리어 분란을 일으킬 여지가 컸다.

그러는 사이 열기가 사그라들었다. 한차수는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폐허를 가로질렀다.

[치료는 하지 않는 건가?]

“포션 다 썼습니다.”

[그렇군. 아… 저기 있네.]

공작의 말처럼 다 죽어 가는 환각 심장의 빛이 보였다.

“쯧.”

거대했던 환각 심장은 이제 손바닥보다도 작았다. 떨어져 나간 수정 조각이 모래처럼 반짝였다.

“드디어 집에 갈 수 있겠네.”

한차수는 지친 음성과 함께 검을 치켜들었다.

이번엔 그 무엇도 그를 가로막지 않았다.

콰득.

“흠?”

생각보다 단단한데. 한차수는 팔에 힘을 더 실어 칼을 깊이 눌렀다.

꾸드득….

마침내 핵의 외피에 금이 갔다. 갈비뼈를 부수는 것 같군. 한차수는 담담히 손에 힘을 더 실었다.

갈라진 틈 사이로 새어 나온 빛이 무심한 낯을 핥듯이 스쳤다.

쩌저적-

챙강!

핵이 부서지며 별빛 같은 수정 조각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끝이었다.

***

세계가 소리 없이 무너져 내린다. 조용히, 그러나 착실하게.

어둠뿐이었던 공간은 어느새 새하얗게 일변해 있었다. 마치 하얗게 타 버린 잿더미처럼.

한차수는 털썩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후우….”

한차수는 기분 좋은 탈력감을 느꼈다.

비록 손끝은 너덜거리고 관절은 시큰거렸지만.

‘비늘의 힘을 빌리고도 이 꼴이라니.’

마도사는 본래 그의 힘으로는 잡을 수 없는 상대임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죽였으니 됐다.

무슨 수를 썼든지 간에 해치웠으니 끝이다. 한차수는 그대로 쓰러져 바닥에 머리를 댔다.

분명 바람 한 줄기 불지 않을 텐데, 어째선지 밤바람을 쐬고 있는 것 같았다.

“…뭡니까.”

[응?]

“할 말 있으면 하세요. 아.”

번쩍 눈을 뜨자 공작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허리를 숙인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맙다는 말을 듣고 싶은 겁니까?”

원한다면 해 줄 의향이 있었다. 한차수가 아무렇지 않게 묻자, 공작의 표정이 묘해졌다.

[딱히 공치사를 원한 건 아니었네. 이런 상황에서 따져 봤자 뭘 한다고.]

맞는 말이었다.

옛 연인을 죽이려는 자신에게 협조한 놈이나, 그 녀석의 도움을 받아 결국 마도사를 죽인 자신이나 거기서 거기였다.

한차수는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 내려다 말았다. 제가 어떤 꼴을 하고 있는지 잊고 있었다.

“뭐… 짧은 시간이었지만 즐거웠습니다.”

[나야말로.]

“…….”

[…….]

어색한 침묵을 깬 건 공작이었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건가?]

“예?”

[나야 어차피 이곳에 속한 몸. 함께 사라지는 것이 순리지만 그대는 아닐 텐데.]

공작이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생기 없는 얼굴에 의문이 가득했다.

그리고 한차수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잠깐, 이대로 있으면 되는 거 아니었습니까?”

이 이변적인 세계를 구축한 원흉을 해치웠다. 그러니 당연히 힘이 흩어지면 자신도 원래 세계로 돌아가게 되는 게 아니었나.

당황스러움을 숨기지 못한 채, 한차수가 공작에게 물었다.

그는 안타깝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싸늘한 감각이 척추를 타고 흘렀다.

[이곳은 오르데의 집념과 그가 희생시킨 목숨이 모여 이루어 낸 미련의 공간. 그 야망의 불을 꺼트린 이들을 쉽게 내보내 줄 리 없지.]

오한이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한차수는 공작의 말뜻을 바로 알아들었다.

그 말인즉슨.

[세계가 무너지기 전에 출구를 찾아야 하네. 그렇지 않으면 우리와 함께 한 줌 먼지로 화하겠지. 그래도 괜찮은가?]

괜찮겠냐?!

한차수는 악 소리를 내지르고 싶은 걸 참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런 데 쏟을 힘조차 아까웠기 때문이다.

‘제기랄, 젠장, 뭐 이런 미친놈한테 걸려서!’

삐그덕대는 관절이 그 대신 비명을 질러 댔다. 힘을 줄 때마다 격통이 이는 근육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 염병할 마도사 같으니라고!’

까득. 이를 간 한차수는 땅을 박찼다.

후욱! 걸음을 뗄 때마다 푹푹 가라앉는 바닥이 돌아 버릴 만큼 섬뜩했다.

그를 둘러싼 세상이 올올이 흩어져 갔다.

***

[체력이 좋군.]

“입 다무, 시죠!”

한차수는 빠득 이를 갈았다. 까마득한 공간을 미친 듯이 뛰어다니기를 수십 분째.

출구는커녕 출구다 싶은 그림자도 보지 못했다.

‘안 되겠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 먼지가 되어 버릴 수도 있는 일.

한차수는 고민했다.

‘비늘을 사용할까?’

혹시 모른다.‘S급 미등록 각성자’라는 위장 신분에 어떤 보조 효과가 존재할 수도 있는 일 아닌가.

다만 해당 신분을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기태연이 준 반룡의 비늘을 사용해야만 했다.

“젠장.”

땅을 박차면서 한차수는 생각했다.

기회는 단 한 번. 괜히 비늘을 소모했다가 아무 효과도 받지 못한다면 괜한 아이템만 낭비한 꼴이 된다.

어떻게 할까. 어떤 걸 제일 합리적인 선택이라 할 수 있을까.

회색 눈동자가 깊이 침잠했다. 생각을 이어 나가는 와중에도 몸은 착실히 움직였다.

그때였다.

[저건…! 저길 보게!]

공작의 외마디 비명이 귓가에서 울렸다. 그의 손이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를 따라 고개를 돌린 한차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누군가 백지를 할퀸 것 같았다. 새하얀 공간이 찢어지며 눈이 아플 정도로 강렬한 색이 세계를 침범하고 있었다.

‘균열? 설마 기태연인가?’

지금껏 새까맣게 잊고 있던 이름이 뇌리를 스쳤다. 만약 기태연이 자신을 찾아온 거라면.

화아악!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균열이 순식간에 수십 배로 커졌다. 사람 서너 명은 한꺼번에 통과할 만큼 거대한 규모였다.

이윽고 목소리가 들렸다.

“한차수 헌터! 거기 있습니까?!”

“한차수 씨!”

“저희가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한차수 씨!”

그 순간, 한차수는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지금 그는 A급 암살자 한차수였다.

B급 유리 몸 포션 제작자 한차수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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