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어디 한번 뭐가 있나 볼까.
한차수는 가까운 엄폐물 뒤에 몸을 숨겼다. 마도사의 습격은 신경 쓰지 않았다
휘오오오——
녀석은 자신의 적극적인 반격에 놀라 몸을 숨긴 상태였으니까.
다만 자신을 정말 잡아 죽이고 싶은 건 변함없는지, 시시때때로 살기가 몸을 덮쳤다.
‘귀찮게.’
느낌이 좋을 때 단번에 끝내 버리고 싶었는데, 마도사가 도망치는 바람에 이렇게 추격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차라리 어디 숨겼는지 방향이라도 알면 좋을 텐데 쓸데없이 철저해서 그것도 할 수 없었다.
한숨을 내쉰 한차수가 머리를 쓸어 올렸다. 땀방울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그건 나중에 생각하자. 어차피 당장 급한 일도 아니고.
생각을 정리한 한차수는 다시 상태창을 띄웠다. 위장 신분 목록을 선택하자 곧이어 경쾌한 알림음이 귓가를 울렸다.
그리고 눈앞을 가린 큼지막한 시스템 창.
한차수는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다 눈을 깜빡였다.
“…….”
깜빡, 깜빡.
두어 번 정도 같은 행동을 반복하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뭘 잘못 본 게 아닐까.
“이봐요, 공작님.”
[…뭔가?]
브로치 안의 공작이 주눅 든 목소리로 답했다.
“혹시 내 앞에 떠있는 파란 창이 보입니까?”
[맙소사, 정말 저주에 걸린 건가. 하긴 피를 토하던 이가 갑자기 뛰어난 기량을 선보이며 무차별적인 살육을 일삼는 게 말이 안 되긴 하지….]
이놈은 쓸모가 없군. 한차수는 주머니를 세게 두드려 공작을 침묵시켰다.
그럼 내가 보고 있는 게 진짜라는 소리인데….
“이걸 기뻐해야 해, 말아야 해.”
한차수는 묘한 얼굴로 시스템 창을 응시했다.
그의 앞에 나타난 목록은 다음과 같았다.
[ 해당 목록 중에 원하는 위장 신분을 선택하세요. ]
[ 현재 활성화 가능한 위장 신분 (5/6) ]
[ 1. 순진하고 멍청한 막내
2. 유혹적인 밤의 손님
3. 재벌가 후계자
4. 유리 몸 포션 제작자
5. ???급 미등록 각성자 ]
[ 등록 보류 중인 위장 신분이 존재합니다. ]
[ 대상자의 상태에 따라 위장 신분은 임의적으로 변동될 수 있습니다. ]
하나하나 정말 주옥같은 신분들이었다.
***
“순진하고 멍청한 막내… 허.”
그림자인 척 다가온 지네를 밟아 터트리며, 한차수는 헛숨을 삼켰다.
언젠가 원작 한차수를 만나게 된다면 고소라도 해야겠다. 그만큼 정신적인 충격이 너무 심각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위장 신분은 말 그대로 거짓으로 둘러대는 신분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원작 한차수가 본래의 모습 대신 ‘보이고 싶은 모습’
즉, 그는 누군가에게 순진하고 멍청한 막내로 보이고 싶었다는 뜻이다.
같은 맥락으로….
“하아….”
눈이 본능적으로 두 번째 목록 보는 것을 거부했다. 첫 번째보다 더한 단어들의 조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면할 수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
원작 한차수가 저걸 어디서 어떻게 이용했는지 모를 일. 만약 누군가 해당 신분을 들먹이며 접근했을 때, 놀라지 않고 대응할 수 있어야 했다.
‘버텨라, 한차수!’
한차수는 이를 꽉 깨문 채 두 눈을 부릅떴다. 그러자 목록이 한결 잘 보였다. 정말 죽고 싶었다.
하필이면 왜 이런 악역한테 빙의해서.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다. 한차수는 충격적인 신분 두 가지를 한 번에 끝내기로 했다.
‘유혹적인 밤의 손님과 재벌가 후계자라.’
후자는 납득 가능한 신분이었다. 원작 한차수는 열등감에 가득 차다 못해 돌아 버린 인물. 재벌가 후계자를 참칭하는 것 따위 그에게는 숨 쉬기보다 쉬운 일이었을 테다.
그리고 유혹적인 밤의 손님은….
‘내가 이걸 쓸 일이 있을까.’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아무리 궁리해 봐도 도저히 뭐 하자는 신분인지 짐작이 안 가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건 ???급 미등록 각성자.
그나마 정상적인 신분이었지만 이상한 건 마찬가지였다.
“…흠.”
그래도 이건 꽤 쓸 만해 보이는데. 한차수는 고민했다.
이제 그는 위장 신분 스킬은 원하는 대로 선택하고 해제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참에 한 번 시도해 봐도 좋지 않을까.
“공작님.”
[왜 부르는가, 저주받은 이여?]
“…근처에 적이 있습니까?”
[없다네. 오르데는 신중한 성격이거든. 아마 그대에게 보낼 괴수를 세심히 고르고 있겠지….]
그럼 됐다.
한차수는 추억에 젖어 주절거리는 브로치를 무시한 채 상태창을 바라보았다.
‘5번 위장 신분 선택.’
[ 위장 신분, ‘???급 미등록 각성자’를 활성화하시겠습니까? ]
“그래.”
고개를 끄덕이자 붉은 창이 연이어 떠올랐다. 페널티 창을 방불케 하는 위협적인 등장에 한차수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바로 위장 신분이 활성화되는 게 아니었나?’
회색 눈동자가 신중하게 시스템 창을 살폈다.
[ ‘???급 미등록 각성자’ 활성화 시작 ]
[ 활성화에 필요한 아이템들을 탐색합니다…. ]
[ 탐색 중… ]
[ 주의 ! 탐색이 끝나기 전까지는 인벤토리를 정리하지 마세요. ]
.
.
.
[ 탐색 완료 ]
[ 조건에 맞는 아이템은 다음과 같습니다. ]
[ F급(5), E급(12),…, A급(3), S급(1) ]
[ 원하는 등급의 아이템을 선택해 주세요.]
[ 선택한 아이템은 해당 등급의 위장 신분 활성화를 위해 사용되며, 돌려받을 수 없습니다. ]
마지막 메시지를 읽은 한차수의 눈이 번쩍 뜨였다.
활성화를 위해 소멸시키는 아이템의 등급에 따라 위장 신분의 등급이 달라진다니, 그 말인즉슨.
“S급이 될 수 있다는 건가…. 아니, 분명 겉모습만 그렇게 보이는 거겠지.”
게다가 분명 그만한 페널티가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어째선지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S급이라니.
저 위장 신분이 만일 어느 정도 효력이 있다면 사지가 뜯겨 죽을 걱정은 덜해도 되지 않을까.
한차수는 한줄기 희망이 샘솟는 걸 느꼈다.
***
서정민은 절망적이었다.
‘미치겠다. 진짜로 작은 도련님을 노린 짓이었다니.’
채라하의 말을 듣고 살펴본 결계에서는 정말로 익숙한 흔적이 느껴졌다.
모놀리스의 이사진. 그중에서도 현 회장인 채강호와 함께 기업의 초석을 닦은 가족 같은 이들만이 전수받은 힘의 흔적이었다.
‘도대체 어떤 미친 녀석이야?’
이제 단순히 한차수를 구출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모놀리스의 일원으로서 두 사람은 모놀리스와 관련된 모든 흔적을 지워야 했다.
어쩌면, 현장을 목격한 사람까지도.
‘돌겠네.’
서정민은 식은땀이 흐르는 와중에도 채라하의 눈치를 살폈다.
“저, 채라하 씨.”
“…….”
안 되겠다.
살인멸구만은 막아 보려 했는데, 이미 텄다. 채라하의 표정을 본 서정민은 확신했다.
지금 당장 그를 기절시키지 않으면 연구동 지하는 지옥도가 될 것이라고.
그가 조심스럽게 채라하의 뒤편에 섰을 때였다.
쿠구궁….
끼기기기기긱!
까가가가각——!
“윽!”
“뭐, 뭡니까?!”
“채라하 씨?!”
결계를 뒤덮은 빛의 사슬이 끔찍한 소음을 내기 시작했다. 동시에 섬세하게 해체되고 있던 결계 외피에 균열이 일었다.
쩌저적!
‘설마.’
서정민은 곧 채라하가 하려는 일을 깨달았다. 채라하를 진정시키기 위해 약물을 꺼내던 손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꾸드득!
철골이 비틀리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채라하 씨, 저기, 이거 괜찮은 겁니까?”
“피해자들에게는 아무 해도 가지 않을 겁니다.”
“아….”
더 이상 채라하를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마음껏 결계를 짓눌렀다. 조이고, 내려치고 때려 부쉈다.
누군가 결계에 다가와 모놀리스의 흔적을 느끼지 못하도록.
‘누구지…. 누굴까.’
그리고 범인이 남긴 자취를 하나하나 전부 수거해, 그 정체를 밝혀낼 수 있도록 말이다.
***
“하…. 고민되는데.”
소지한 아이템의 수는 충분했다. 마도사가 소환한 몬스터들로부터 무기는 물론이거니와 다양한 부산물을 습득한 덕분이었다.
하지만 S급 아이템은 하나뿐이었다.
‘반룡의 비늘.’
기태연이 던지고 간 비늘 말이다.
하지만 이게 없으면 마도사와의 결전이 힘들어질 게 뻔했다.
[저주가 심해지나 보군. 아까부터 혼잣말이 심해졌어.]
“…조용히 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하나뿐인 말동무가 이성을 잃어 가는데 걱정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않나.]
말은 잘하는군. 한차수는 기가 차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마도사가 이 브로치에 과민 반응만 하지 않았어도 바로 버리는 건데.’
적어도 인벤토리에 들어가거나, 부서지기만 했어도 지금보다는 괜찮았을 거다.
하지만 브로치는 그 어떤 무기로도 부서지지 않았다. 결국 한차수는 공작이 브로치에서 나오지 않는 걸 조건으로 그를 데리고 다니기로 했다.
바위틈에 던져 놨다가 그 꼴을 본 마도사가 다시 폭주하기 시작하면 곤란하니까.
‘제거할 수 없는 위험 요소라면 차라리 가까이 두는 게 낫지.’
그때였다.
쿠우웅——!
공간이 뒤틀리며 발밑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게, 뭐…! 윽!”
[속이 울렁거리는군.]
공작의 말대로였다. 세계가 통째로 흔들리고 있었다. 시야 가장자리부터 공간이 깨져 나가는 게 보였다.
갑자기 왜, 라는 질문이 들기가 무섭게 살기가 피어올랐다.
아니, 살기가 아니었다. 그보다 더 절박하고 간절한 무언가.
[온다.]
“…!”
고오오오오오——
마도사가 갈퀴 같은 손을 내민 채 그를 향해 미끄러지듯 달려오고 있었다.
[심■■ 내■——!]
미친 마도사가 뭐라 외치든 한차수는 개의치 않았다.
그래, 슬슬 끝을 낼 때가 되긴 했지.
가까스로 균형을 잡은 한차수는 기사에게서 빼앗은 검을 굳게 쥐었다.
점에 불과했던 마도사의 몸집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콰아아아앙!
두 신형이 격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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