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맨 처음 위장 신분 스킬을 해제하지 않은 이유는 단순했다.
죽기 싫어서.
안 그래도 원작 한차수의 헛짓거리 때문에 몸을 사려야 하는 처지. 괜히 스킬을 해제했다가 경계심을 사고 싶지 않았었다.
게다가 이 세계는 제법 만족스러웠다.
악역에 빙의했다는 사실만 뺀다면 이전 세상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그래서 열심히 움직였다. 정서흔을 살리고, 어쩌다 백선도 살리고. 도중에 금명결 때문에 좀 골치 아팠지만 대충 살아날 길이 보였다. 기대가 희망과 뒤섞여 점점 부풀어 오르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대로 문제 일으키지 말고, 이미 저지른 짓은 들키지 말고 조용히 사라지자.
그러기 위해선 위장 신분을 끝까지 고수해야 했다. 한차수는 단 한 순간도 스킬을 해제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S급들이 그에게 보이는 호의를 믿지 않았으니까.
“제가 다 책임지겠습니다.”
“우리 집 둘째가 되는 건 생각해 봤어요?”
“내가 어떻게 한차수 씨를 건드리겠어?”
믿어 주는 거야 쉽지. 호의를 받아들이고 걱정을 내다 버리면 편하겠지.
하지만 그 순간, 그들에게 목줄의 끝을 내어 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온전히 제 것이 아닌 힘을 빌리는 건 언제나 그런 식이다. 적어도 자신이 살아온 바로는 그러했다.
그래서였다. 끝까지 ‘유리 몸 포션 제작자 한차수’로서 사람들 앞에 존재한 것은.
비록 숨통이 조이고, 머리가 쪼개질 듯 아프고 피를 토하는 고통을 혼자 견뎌야 했지만….
이제는 아니지.
쿠웅, 쿵——!
좁혀 오는 포위망. 폐부를 짓눌러 버릴 듯 강한 압박감. 겁에 질린 먹잇감이 제 발로 뛰쳐나오길 바라는 사냥꾼들의 눈동자.
절체절명의 상황 속에서 한차수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흐린 안개 같은 회색 눈동자 위로 상태창의 푸른빛이 아른거렸다.
“위장 스킬 해제.”
고요한 읊조림이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
연구동 지하에 떨어진 기태연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방금 전까지 그는 신상이 남긴 균열의 흔적을 이용해 한차수를 찾고 있었다. 한차수의 기운을 손에 잡힐 듯 느낄 수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가.
분명 한차수의 기운을 느껴 그가 있는 곳을 향해 뛰어들었는데….
“젠장, 당신 누구야?!”
눈앞에 있는 건 흐릿한 인상의 사내였다. 그것도 한차수와 비슷한 기운을 풍기는.
‘설마 함정인가.’
환각심장의 꾀에 넘어간 걸지도 몰랐다. 한차수에게 가려는 자신을 꼬여 내 환각 속에 가둔 거라면….
기태연의 눈에 날이 섰다. 손등 위로 푸른 기운이 맺혔다.
그때였다.
“기 실장님, 비키세요!”
“…서정민?”
기태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서정민이 왜 이곳에 있는 거지. 푸른 눈에 파문이 일었다.
서정민을 본 순간, 환각 심장의 덫에 갇혔다는 가설은 처참히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그가 보고 싶은 건 한차수지 저 멀대같은 안경잡이가 아니었으니까.
‘그렇다면, 설마.’
환각 심장의 공간 바깥으로 나온 거라고?
충격을 수습할 길이 없었다. 기태연은 반사적으로 자신이 빠져나온 균열을 찾았다. 다시 돌아가기 위함이었다.
서정민이 그 꼴을 가만 두고 볼 리 없었다.
“멍하니 서서 뭐하 십니까, 위험하다니까요!”
“잠깐, 위험한 건 내가 아냐. 한차수가 아직 안에…!”
“저희도 압니다!”
“뭐?”
서정민은 있는 힘을 다해 그를 뒤쪽으로 끌어당겼다. 방심하고 있던 기태연은 어어 하는 사이 중심 결계로부터 멀어졌다.
서정민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생각할 시간을 주지 마.
-알겠습니다.
채라하와 눈빛을 주고받은 그가 우렁차게 외쳤다.
“여러분! 기태연 실장님이 돌아오셨습니다!”
뒤이어 여기저기서 기쁨 어린 비명이 울려 퍼졌다. 산 제물로 공양된 피해자들을 구출하던 위기관리실 직원들의 외침이었다.
“서정민, 지금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설명부터 하라고!”
미친 듯이 달려오기 시작하는 부하 직원들을 본 기태연이 이를 악물었다. 슬슬 정신을 차린 모양이다.
“저 녀석들 꼴이 왜 저런 거지? 안보실 놈들은 왜 우리 애들 등에 업혀 있는 거고!”
“그건….”
“실장니이이임!”
기태연의 질문에 대한 답은 미친 듯이 뛰어온 위기관리실 직원들이 대신 해 주었다.
서정민은 그 모습을 보며 천천히 걸음을 뒤로 물렸다.
‘성공이군.’
이제 채리하에 대한 기태연의 적대감은 상당 부분 낮아졌다.
멀쩡하다 못해 혈기 넘치는 위기관리실 직원들. 그리고 그들이 구해낸 안보실 직원을 보여 줬으니까.
경계심을 낮췄으니 남은 건 ‘균열’에 대한 의심을 지우는 것뿐이었다.
채라하가 날렵하게 손을 휘둘렀다.
치이잉!
가는 실선이 허공을 수놓는다.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결계를 파고드는 날카로운 힘.
“산 제물? 도대체 어떤 새끼가…. 잠깐, 거기 지금 뭘 하고 있는 겁니까?”
물고기가 미끼를 물었다. 서정민은 지체하지 않고 낚싯대를 당겼다.
“결계를 풀고 있는 겁니다. 마지막 남은 피해자마저 구출해야 환각 심장의 제어권을 되찾을 수 있으니까요.”
“이젠 그럴 필요 없습니다. 두 분 다 연구동에서 나가세요. 지금부터는 위기관리실이 현장을 통제합니다.”
“기 실장님, 위기관리실에 이 정도로 복잡한 결계를 해제할 수 있는 사람 없는 거 알고 있습니다.”
“…….”
“그리고 방금 전, 채라하 씨가 결계를 건드리지 않았더라면 실장님은 아직도 갇혀 있었을 텐데요.”
푸른 눈이 자신을 태워 버릴 듯 노려보았다.
“그래, 그걸 잊었네. 모놀리스의 인간이 어떻게 날 꺼낸 겁니까.”
“제가 꺼낸 게 아니라 실장님이 뛰쳐나오신 겁니다.”
대답은 채라하에게서 나왔다. 그는 결계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결계 해제 도중 갑자기 틈이 생겼습니다. 예상치 못한 일이라 당황했는데, 이제 알겠네요. 안쪽에서 균열에 접촉 중이셨죠?”
기태연은 답하지 못했다. 채라하는 기세를 이어 그를 몰아붙였다.
“타이밍이 맞아떨어졌던 겁니다. 피해자를 구출하면서 환각 심장의 힘은 약해졌고, 덩달아 그것이 구현한 공간도 허술해졌을 테죠. 그 와중에 저는 마지막 남은 중심 결계를 흔들고 있었고, 실장님은 균열을 건드리다 이쪽으로 튕긴 거고요.”
침묵이 흐르는 와중에도 불꽃 튀는 소리가 이어졌다. 결계를 부수는 소리였다.
“혼란스러운 상황에 낯선 사람을 믿으라는 말은 드리지 않겠습니다. 절 믿으실 수 없으면, 실장님의 눈에 보이는 걸 믿으세요. 기적이 한 번 더 일어난다면 이번엔 한차수 씨에게로 향하는 균열이 나타날 수도 있는 일 아닙니까.”
“하….”
“그게 아니더라도 이 결계는 해제해야만 합니다. 설마 이대로 환각 심장을 내버려 두실 겁니까?”
채라하의 청산유수에 서정민은 새삼 감탄했다.
거짓말과 진실을 적절히 뒤섞어 그럴듯한 말로 풀어내는 데는 역시 그만 한 사람이 없었다.
실은 기태연을 반으로 갈라 죽이고 싶을 텐데 전혀 티를 내지 않는 점도 대단했고.
“할 거면 확실히 하세요.”
결국 기태연은 채라하가 결계를 해제하도록 내버려 뒀다. 잘못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말이 들린 듯했으나 그 이상의 험한 말은 없었다.
‘됐다.’
주도권을 완벽하게 가져왔다. 이제 계획대로만 가면 된다.
결계를 해제하면서 한편으로 몰래 균열을 열어 한차수를 데려오는 것 말이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균열을 열어야 할 채라하가 움직이지 않았다.
“채라하 씨? 왜 그러십….”
채라하의 얼굴을 본 서정민은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살짝 올라간 입꼬리와 미소 짓듯 부드럽게 접한 눈매. 일견 웃는 듯한 얼굴이었으나 눈동자에 빛이 없었다.
서정민과 시선이 마주친 채라하가 소리 없이 말했다.
‘내부자였어.’
결계 군데군데 채 지우지 못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너무나도 익숙한 흔적이.
“결국 또다시….”
푸른 잿빛 눈동자 한가득 지독한 혐오감이 들어찼다.
환각 심장의 폭주를 일으키고, 동생을 위험에 빠트린 건 모놀리스의 일원이었다
***
“트레이닝 제대로 하고 가네.”
오길 잘했어.
한차수는 뱃속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누르지 않았다.
“하아….”
그는 핏물 한복판에 선 채 상쾌함을 만끽했다. 모두 그를 향해 달려들던 몬스터들이 흘린 피였다.
“이렇게 날뛸 수 있을 줄 몰랐는데.”
한차수는 아직도 저릿한 손을 쥐었다 폈다. 이 손으로 기사들을 갈라 죽인 감각이 아직도 생생했다.
위장 신분을 해제하자마자 그의 몸은 가뿐해졌다. 족쇄를 벗어던진 죄수처럼 팔다리가 시원스럽게 뻗어 나갔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페널티였다. 몬스터를 공격하는 동안 단 한 번도 페널티를 받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한차수는 만족스러웠다. 이 몸이 악역이었다는 사실을 아주 잠깐 외면할 정도로.
“상태창.”
푸른빛을 뿜어내는 시스템 창을 본 한차수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사실 위장 신분을 해제하면서 불안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위장 신분을 해제하고 다시 사용했을 때, 이전의 신분을 그대로 가져올 수 있는지 알 수 없으니까.
하지만 그런 걱정 때문에 목숨을 날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그는 선택했고….
[ 위장 신분(A)이 비활성화 상태입니다. ]
[ 현재 활성화 가능한 위장 신분 ▼ ]
성공했다.
[ 해당 목록 중에 원하는 위장 신분을 선택하세요. ]
[ 선택 가능한 위장 신분은 다양한 요소에 의해 정해집니다. ]
빌어먹을 위장 신분은 선택형 스킬이었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86)============================================================